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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문보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20200123 문보영
나는 시를 읽지 않는다고 했더니 소설을 쓰는 친구가 시집도 좀 보고 그러라고 했다. 뭘 볼까 했더니 문보영 시집이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문보영의 책기둥은 내 돈 주고 사 본 첫 시집이다. 아니 그전에 이상이랑 브레히트 시집을 중고로 사서 꽂아두긴 했다. 읽진 않았다. 문보영 시집도 처음부터 읽다가 너무 안 읽혀서 맨 뒤부터 봤더니 볼 만 했다. 그러고 읽다 말아서 도넛처럼 중간부분이 안 읽은 채 비어 있다. 사실 오래되서 읽은 시도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전자도서관 업데이트 되서 이야 신난다 하고 뒤지다가 문보영 산문집을 발견했다. 제목 봐 세상에. 빌려서 읽었다. 산문집이라기보다 일기 모음이다. 시인은 일기에 아무말잔치를 해도 책이 되고 내 일기는 그냥 나만 두고두고 본다. 둘의 차이를 못 알아보는 나니까 애초에 글러 먹은 거야.
이십 대의 문보영은 연애가 안 풀릴 때,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심해 정신과에 다니며 약을 타먹을 때 일기를 열심히 썼다. 도무지 식욕이 없고 피자를 좋아했다. 이거 난데. 나잖아. 다른 점도 있다. 문보영은 시를 쓴다. 춤을 춘다. 브이로그를 열심히 올린다. 내가 앞으로도 하지 않을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다.
엄청 금방 읽었는데, 읽고 나니까 기분이 급하강해서 괜히 읽었다 싶었다. 너무나 비슷하게 힘들었던 사람 이야기를 읽는다고 해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마지막 베트남 여행기조차 너무 우울했다. 베트남 도착하자마자 기대와 다르게 험한 꼴 본 것조차 비슷하잖아. 그래도 당신은 죽기 전에 등단이라도 했지. 시집이라도 냈지. 문학상도 탔지. 괜히 읽었어. 그래도 다음에 생각나면 시집 다 읽기 다시 한 번 시도해 볼게요.
시집 읽는 사람을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되었는데 나는 시는 하나도 모르고 무슨 시를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밑줄 긋기. 왜 이런데 밑줄을.
‘한때 누군가 나에게 사랑해, 라고 말했다. 사랑해, 라는 말은 어떤 구조로 생겨먹은 걸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어버버거린다. “나……, 나를……? 나는 쓰레기예요…….” 쓰레기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고, 쓰레기라고 겸손 떠는 것도 아니다. 쓰레기라는 건 그저,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면 어쩌죠?’ 하는 불안이다.’
-저도요.
‘왜 사람은 누군가를 안는 구조로 생겨서 타인을 갈망하게 되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고구마는 아무것도 떠올리게 하지 않아서 좋다. 태어날 때부터 온몸이 멍색이다. 온몸이 멍이면 멍 위에 멍을 얹어도 티가 나지 않으니 좋다. 다치고 또 다쳐도 한 번만 맞은 것 같은 모습이 나와 닮았다.’
-그래서 책이랑 시 읽으면 자꾸 고구마 먹는 기분이...아, 아닙니다.
‘양 볼에 흘러내려 턱 끝에서 만나는 두 갈래의 빛.’
-두 음소로 쓸 말을 시인은 이쁘게도. 엉엉.
‘얼그레이 잼 덕분에 문득 행복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오셔서 행복인지 못 알아뵀다. 그래서 악수를 하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내 악수를 받아주셨다. 그래서 악수를 한 김에 내 오른손과 행복의 왼손을 수갑으로 채웠다. 같이 걸었다. 그런데 어느덧 혼자 걷고 있었다. 행복은 손목이 너무 가늘어 수갑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내 손목이 가늘어서 수갑이 자꾸 빠진다고 우겨본다.
‘왜 사람들이 웃을 때 나는 웃지 못할까? 생각해보면, 세상이 웃는 방식으로 내가 웃었다면, 애초에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미소 짓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미소 지었으므로 시를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슬픈 이야기다.’
-반대로 아무도 웃지 않을 때 웃는 나는 잡문을 쓰게 되었다.
‘도서관에 있는 휴대폰들이 동시에 울렸다. 누군가 인류에게 같은 문자를 보낸 것이다. 긴급재난 문자였다. 타인의 휴대폰이 울릴 때 내 휴대폰도 함께 울려서 소속감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빼먹지 않았다는 게 신났다. 나도 포함된 것이다. 나는 왕따가 아닌 것이다.’
-오래 전에 재난문자 수신을 꺼놔서 내 폰만 울리지 않는다. 나는 왕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