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거나, 마음을 울리거나, 눈을 감고 되새기고 싶은 글은 애초에 포기했다.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진 문장, 냉소, 작은 흠을 붙잡고 “동네 사람들! 저것 좀 보래요!”, 맞춤법 나치당 소속(정작 본인 글은 인쇄 출판된 거 아니라고 관대함)
제대로 사랑 받지 못하고 자라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는 이렇게 됩니다. 를 현시하듯 내 말과 글은 언제나 모질다. (사랑 받지, 아니 작은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모두 부숴버리겠어! 이런 거냐...)
이런 종자들을 간단히 퇴치, 퇴마하는 법을 알려드립니다. 무관심이 가장 유효한 약입니다.
먹이를 주지 마세요. 교화시키려 들지 마세요. 대응하지 마세요. 좋아요도 싫어요도 누르지 마세요.
저절로 알아서 말라 죽습니다.
솔직함과 무례함의 경계를 줄타기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 공감 능력과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 대부분이 그러듯- 각도기가 뿌숴진 채 대체로 무례함으로 결론이 나곤 한다. 결과는 상처 입은 누군가, 안 본 눈 사고 싶은 소수, 자책과 함께 자존감 하락, 또다시 삐뚤어질테다! 하면서 더 무례해지는 악순환에 되먹임까지...
갑자기 자기 반성 모드가 된 것은 우연히도 난 상관 안 해, 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인 듯한 저자의 피드백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걸 안 봤으면 아마 계속 악당 짓거리를 하다 늙어(혹은 젊어서 사고나 병이나 상해나 살해로) 죽었을 것이다.
허공을 향해 던진다고 생각했던 칼날들이 어딘가 박히긴 박히고 엄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있었다. (혹은 정말 낮은 확률로 던지면서 생각한 누군가의 짧은 시간이나마 기분을 잡치게 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경험(주로 읽은 것)에 대한 정리, 생각한 것과 느낀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기(또는 적어 놓고 빨리 털어버리기), 기억의 보조(나중에 읽고 아 그 때 이런 일이 있었군, 이런 마음이었군), 더 나아가 나는 이런 인간이구나, 를 다져가는 것-그렇다면 나는 형편 없는 걸 쓰면서 내가 형편 없다는 것을 계속 다지고 있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굳이 쓴 글을 남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걸어 놓는 이유도 생각해 보았다.
인정욕구.
그 이상이 있을까?
문제는 항상 나를(혹은 내 글을) 치장하지 않으면서도, 나아지지 않으면서도,
이런 나라도 괜찮아? 한술 더 뜨고 더 뜨고 역치에 다다를때까지 최선이 아닌 최악을 향해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글쓰기 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도 그렇다. 초등학교 때 실험 시간에 포화용액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붓고 또 붓다 결국 가라앉은 앙금은 바닥에 단단하게 굳어 버린다. 그 다음은 쓰레기통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는 삶은 꿈꾼 적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정치계나 연예계로 가라지.
소수면 된다. 아니 단 한 사람이라도. 작은 부분이라도 있는 그대로 좋다고 해 주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바람이 소박해지니 덜 불행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조차 문제인 것 같다.
있는 그대로, 그 자체가 바뀌어야 할 때일지 몰라.
한 사람이라도, 다칠 만한 건 그냥 쓰지 말자.
굳이 그런 걸 쓸 거면 일기장에 쓰고 너나 봐라.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죽은 사람 책에나. (그런데 죽어서도 읽히는 사람들은 다 잘 썼지.)
살아 있는 사람 책에는 아예 편지 쓰듯 감상을 달까. 존대말로 쓸까. (그러면 욕은 못 하지. 이런 미친 새끼를 보셨나요. 이상하잖아.)
일단 삐뚤어진 마음부터 어떻게 해 봐야 될 것 같은데.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