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글쓰기다 #김도인지음 #글과길 #들리는설교에서보이는설교로 글쓰기에 관심이 있고 청중의 한사람으로써 현재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설교자는 어떤 설교를 중점적으로 해야하나 알고 싶기도 해서 읽게되었다. 책을 읽지 않거나 여러 매체를 보게되지 않으면 매번 같은 패턴의 전달과 경험으로 듣는이에게 지루함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이마골로기시대로 감성적인 이미지에 지배받아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듣는 설교를 이미지로 생각하게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나는 듣는 설교도 좋아하지만 읽는 설교도 좋다. 아마도 이런 이미지설교에 최적화된 강해설교집이 아닐까 싶다. 단편적인 전달이 아닌 결합된 다양한 느낌으로 전달해야 한다. 받아들이는 청중의 태도도 중요하겠지만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청중이 원하는 설교가 무엇인지 파악하여야 한다. 메마른 설교가 아닌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여 명료하고 기억에 남는 설교를 해야한다. 저자가 하는 말에 공감가는 것은 나도 설명적인 글 그러니까 단편적인 글에만 머물러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글을 써야 읽는 이의 기억에 남는 것이다. 글쓰기를 연습하고 있지만 머물르기에 그치는 이유는 묘사와 이미지가 없기에 그런 것 같다. 정보전달에만 그치는 설교는 설명하는 설교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설교를 청중에게 전달할때에 어떻게 해야 효과적인지 요목조목 알려준다. 정보제공이나 일기처럼 쓰는 나에게도 무척이나 해당됐다. 그래서 글쓰기를 해도 지루했구나 무료했구나 싶었다. 글은 쓰지만 발전이 없는 제자리걸음의 글쓰기였던 것이다. 묘사글쓰기에 도전해보는 것이다. 원래는 글쓰기할때에 보통 쓰던 글의 길이보다 더 생각하여 길게썼는데 양을 늘리려고 하는것보다는 양보다는 질을 늘려야 하는것을 지금 깨달았다. 진부하고 평범한 글인 나의 글은 읽기는 쉽지만 감동이 없다. 새로운 시선으로 의미를 부여하여 묘사를 해보자. 설교자는 글쓰기를 꾸준히 배워야 하며 이미지 글쓰기를 성경에서 배워야 한다.P.207 글쓰기는 스킬이 아니라 설교자의 본질에 속한다. 세상에서 글쓰기는 학문함의 최고봉에 속한다. 글쓰기는 성경을 성경답게 제대로 대접받게 하는 최고의 처방이다. 이미지글을 쓰기 위한 몇가지 방법으로 나도 글쓰기에 도전해봐야겠다. 청중이지만 글쓰기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읽기를 추천한다.
#슈퍼스페이스실록 #곽재식지음 #파랑새 저자는 현재 <김영철의 파워FM>등 대중매체에 활약중이며 공학박사이자 숭실 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작가로도 꾸준히 활동하여 여러 저서를 내기도 했다. 한국의 전통문화 속 과학기술을 신선하게 작가가 알음알음하여 기초적인 우주지식을 두루두루 알려주려고 하였다. 한국의 옛 우주지식을 전달하며 한국의 전설과 신화, 옛이야기가 어우러져 현대 한국의 과학자들이 전해주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라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는 어땠을까하며 옛 조상들의 우주에 관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니 흥미롭지 않겠는가. 목차로 1. 하늘과 땅, 해와 달 2. 여덟 행성 3. 더 먼 곳 4. 별과 별자리 5. 블랙홀과 초신성, 이상한 별 6. 우주와 세상의 끝으로 되어있다. 별과 달, 태양, 하늘은 참으로 신비롭다. 이것을 주제로 한 동화는 우리 아이가 아직까지도 잠자기전에 영상으로나 책으로 읽어달라고까지 하니 말이다. 신라의 유례 이사금의 어머니는 어느날 별빛이 자기 입속으로 들어오는 신기한 일을 겪은 후에 유례 이사금이 태어났다는 사연을 [삼국사기]에 남기기도 하였다. 달을 떠올리면 사극에서 나라에서 큰 변화가 오는 극적인 순간을 보여줄때에 갑자기 개기일식이 일어나며 반전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상적이면서 신기했던 것은 달의 중력으로 지구의 바닷물이 이리저리 호령하듯 밀려나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는 별을 향해 기도했었다 한다. 금성을 향해 왕이 되게 해달라며 극진히 기도했을까?<조선왕조실록>에도 별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언급이 나온다. 여러 별중에 행성으로 분류되는 금성에 기도를 드린 이유는? 유독 반짝반짝 빛나기에 크게 보이기도 하며 이른 아침에도 자주보이니 금성을 좋아하는 이유일수도 있다. 기분이 별로 일때에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며 기운을 차릴때가 있다. 그런 마음과 비슷한 마음일까? 조선시대에는 북두칠성을 보며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국자모양의 북두칠성은 다른 별자리보다 찾기가 쉽다. 북두칠성은 나침판이 없는 경우 길을 찾는 역할도 해주기에 유용하기도 하다. 한국의 하늘과 별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첨성대는 1400년전 선덕여왕시대에 신라인이 지은 건물이다. 첨성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천문대이며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별을 내려다보는 용도라고 하는데 나도 첨성대를 보며 어떤 방식으로 별을 보았을까하며 생각하기도 했다. 첨성대의 모양의 보며 땅의 끝과 끝은 어땠을까 중국고전에서나 한반도에도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이 둥글고 땅이 네모난 모양이라고 전해졌고 널리 퍼졌다고 한다. 첨성대의 수수께끼는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유추해보니 재미있었다. 한국의 전설이나 옛이야기로 만나 본 과학이야기라 몰입도가 좋았다.
#무엇이나를행복하게만드는가 #리처드지음 #북플레저 쫓기지 않고 남에게 끌려가지 않으며 나의 정체성을 찾고 나의 중심을 잡아가며 사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내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수도 없거니와 내 삶의 주체는 내가 되어야 한다. 나는 누구이고 나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건가하며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즈음에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고 계획을 세워보아야한다. 계획을 세워도 나는 계획대로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게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운다고 적어놓게 됨으로써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생각들을 붙잡아서 구체화할 수 있다. P.125 일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심오한 믿음과 진솔한 감정들이 조화를 이룬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잘 살기위해 돈을 벌었는데 물질적 풍요로움은 있었으나 진솔한 감정들이 있었는가와 조화를 이룬 삶을 살았는가는 나도 공감이 되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도 쳇바퀴 돌아가듯 똑같은 하루속에도 내가 하는 일에 더욱 진심을 다하고 그 안에서도 융화롭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이제는 내가 무얼 잘할 수 있고 그것으로 변화를 꾀할것인가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내 개인의 성장을 위해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한다. 이 책에서 계속되는 물음으로는 인생에 절반에 선 당신은 무엇이 하고 싶은가?로 아직 나도 나의 진로의 방향을 잡지못한 상태여서 그런지 내가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재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사소한 재능이라도 발견하라 말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없는 것들을 버리고 내 내면에 가방을 다시 꾸려야 한다. '나 다운 나'를 만들기 위해 다른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지금 내 안에 갖고 있는 것들 안에서 만족을 찾고 긴 안목으로 봐야겠다.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고 가진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 문득 내가 현재 잘하고 있나? 잘 살고 있나? 라는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는 어려운 질문들이다. 작은 것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를 찾아야 한다. 내 '인생의 오후'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돈 #손성찬지음 #죠이북스 #탐욕의대상에서사랑의도구로 돈에 대한 주제에 대한 책은 전에 잠깐 관심이 가있던터라 한두권쯤 읽다가 덮었던 기억이 있다. 현재 물질적으로의 풍요로움도 누리고 있지 않고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크게 없기때문에 눈여겨보지도 돈을 크게 벌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욕심이 없으니 돈을 크게 벌수있는 수단에 눈을 돌리지 않아서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돈을 크게 버는 재주도 없거니와 그럴 수단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돈인 맘몬에 끌려다니지 않는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한때에는 좀 더 나은 생활, 풍족하게 먹고 살려고 했었는데 우선순위로 두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뒤로 밀려나며 돈이라는 도구에게 끌려다닐때에는 언제부터인가 이 돈이라는 도구가 목적이 되어 무엇이 중요한지 간과하며 살게 됨을 더욱이 알게 되었다. 내가 나의 삶에서 돈을 어떻게 써야할까는 항상 하는 고민이다. 나의 삶이 돈이 중심이 아닌 도구로만 사용하고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고자 해야한다. 돈을 벌려고 하는데에 있어서 성실함과 진실성이 결여된 상태라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P.111 핵심은 청지기적 정체성에서 비롯된 충성, 즉 신실함입니다. 그리고 이 신실함은 노동 현장에서 성실함이라는 행동으로 피어납니다. 일을 하면서도 그 사람의 성실한 태도와 말씨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여과없이 보이기도 한다. 함께 노동현장에서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지 아니면 이기적이게 행동하며 자기자신의 이득만 취하려 하는가도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돈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되고, 경쟁으로 여겨서는 더더욱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리는 도구로써 신실함으로 그리고 성실과 분별로 돈을 대해야 할 것이다. 치기어리게 돈에 눈이 멀어 힘든시기에 역경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생각하다가 정말 큰코를 다쳤었다. 결과는 안타깝게도 돈을 벌었던게 아니라 큰 빚을 지고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던 때가 있었다. 저자는 말한다. 돈으로 사랑하라고! 돈을 손아귀에 쥐고 묶어놓는 것이 아닌 물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기를 바란다. 공감이 많이 됐던 부분은 상대에게 돈이건 물질이건 나눈 후에는 베푼만큼 받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표현을 안하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에게 베풀지만 심리적 부채를 안기지 말아야 한다. 돈으로는 절대로 행복을 살 수 없다. 특히 돈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게 될때는 더욱 삶에 있어서 공허함만 남을것이다. P.171 수입이 아니라 지출에, 그리고 '얼마나 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방점을 둡니다. 어떻게 보면 나는 미련스럽게도 돈을 모으기는 하지만 깐깐하고 악착하게 모으지는 못한다. 가족에게 필요한 적금은 따로 들고 또 한켠으로는 흘려보낼 수 있는 돈은 한달에 한정되게 사용하여 비율을 맞추고 모으기도 한다. 아마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흘려보낸 돈만 모아도 어느정도 큰 돈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정말 정작 애절하게 필요할때가 있는데 그때는 또 그때 상황에 맞게 돈이 주어지기도 한다. 흘려보내는 만큼은 아니지만 적절히 필요한 시기에 채워지기에 흘려보낸것에 크게 의의를 두지 않았다. 살아감에 있어서 돈은 뗄레야 뗄 수 없는데 어떻게 돈을 벌고 쓸것인가. 뜬구름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공감가는 이야기로 돈을 어떻게 벌고 써야하는가를 성경적관점에서 이해하기 쉽게 풀었다. #돈을선의도구로 #분별
#소설읽는그리스도인 #이정일지음 #샘솟는기쁨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오히려 좁은 식견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문학을 앎으로써 넓은 시야를 가져다준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다채로운 삶의 눈을 보는 시각을 보게해주기도 한다. 소설은 많은 생각을 던져주며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저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하고 주인공마냥 감정이입이 될때가 있다. 그러면서 상황을 추론해보고 유추하며 소설읽는 재미가 배가 되기도 한다. 1부에서는 삶의 의미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2부에서는 내면의 변화는 나이테같은 흔적을 남긴다, 3부에서는 어떻게 소설이 묵상을 힘 있게 만드는가로 되어있다. 소설은 자기계발서나 지식을 전달해주는 책과 다르게 보는이에 따라 다른 시각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땠을까하며 여러 생각들을 끄집어내며 재독을 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듯 소설은 재독을 할때마다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한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건 문해력이다. 나도 그렇게 많은 책을 읽지만 간혹 다 아는 내용이라며 스윽 지나간 글을 오독하는 경우도 있기때문에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계속적인 훈련이 되야한다. 책과 안친하고 깊이가 없이 주일에는 교회를 다니기만 한 나였을때에는 성경책을 가까이해도 설교를 들어도 텍스트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기에 생각의 깊이가 깊지않고 사고능력과 문해력이 없으니 깨달음이 없었음을 고백한다. 내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니 삶에 있어서의 변화는 없었던 것이다. 문해력을 키우는데는 소설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나는 책의 비율을 신앙서적반 일반서적반으로 하려고 한다. 아직은 나에게 이 비율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리고 일반서적의 비율중에 소설이 차지하는 비율을 늘려야겠다.P.77 책을 가까이하면 겉모습은 노화되어도 뇌와 속사람은 새로워지게 되어 있고, 뇌가 새로워지면 우리는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 상상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게 그리스도인에게 소설이 필요한 이유다. 어떤 책이든 꼼꼼히 세밀히 읽으려고 하지만 디테일한 감정선이 있는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메마른 감정에 단비를 내려주어 그냥 지나치던 것들도 지나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며 감정이 풍부해짐을 느낀다. 꾸준히 고전소설이던 현대소설이던 어렵지만 도전하려는 이유도 수동적인 생각의 힘을 키우기 위해 읽으려 한다. 소설은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보여주며 다른 삶을 이해하고 이입하게 해준다. 자아를 확장하여 성찰하게 하는 것이 소설의 장점이다. 나라는 한사람의 변화로 인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시야도 넓어지며 유연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소설의 묘미는 읽어내는 독자의 시선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이 되어보며 나를 인식하고 변화를 꾀한다. 소설을 읽은 후에 나는 다르다. 저자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안에서 단단해지고 나를 위한 시간을 갖으며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내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