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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0
에밀 졸라 지음, 김치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아무리 도서 리뷰라지만 시작부터 바로 작품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무슨 수학 문제집 풀듯이 정답만 써놓은 글에는 흥미가 없달까. 다른 건 몰라도 문학 리뷰만큼은 최소한의 스토리텔링이 들어가줘야 글이 매끄러워진다. 이 스토리텔링이란 게 사실 별거 없고, 그냥 내 생각과 사유의 꼬리를 물어만 주면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 대한 Tmi와 뻔한 코멘트와 상황 설명만을 나열하기 때문에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온통 매력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나님은 공장에서 단체로 찍어낸 듯한, 개성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결과물에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이런 말 백날 해봐야 듣는 이도 없고 내 얘기 하는구나 싶은 이는 더더욱 없는 현실이지만, 건강한 글쓰기와 서평 문화를 소망하며 또 한 번 끄적여봤다.
에밀 졸라의 작품 중 가장 재미없어 보였던 <나나>. 역시나 예상 적중해서 고생 좀 했다. 나나는 <목로주점>의 주인공인 제르베즈의 딸인데, 본 작품에서는 대중에게 사랑받는 극단 배우로 등장한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발연기의 달인이지만 그녀의 웅장한 피지컬과 과다한 페로몬이 그 어떤 논란도 잠재워버린다. 아무튼 수입도 짭짤하고 남자들도 잘 들러붙어 먹고 살 걱정 없는 그녀는, 단기간에 성공한 이들이 그렇듯 오만하고 경거망동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돈다발을 바치며 사랑을 갈구하는 남정네들. 그 정도로 나나의 아름다움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 간단한 줄거리에 비해 쓰잘데없는 장면 묘사로 지면을 꽉꽉 채운 참 괘씸한 작품이었다. 원래부터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작가이고 늘 해 오던 대로 썼겠지만, <나나>가 유독 지루하다 느꼈던 것은 흐름과는 무관한, 정말 안 해도 그만인 묘사들로 도배를 해놨기 때문이었다. <제르미날>이나 <목로주점>에서는 자잘한 묘사들도 테마의 분위기 조성에 일조하여 감탄했었던 반면, <나나>는 빈약한 내용을 최대한 있어 보이게 하려고 아주 그냥 발악한 걸로 보인다. 어떻게든 분량을 늘리고 싶어서 개똥, 새똥에 진드기 똥까지 긁어모으셨더만? 가장 불만이었던 극단 배경의 묘사부터 짚어보자. 나나의 직업도 그렇고, 초반에 대거 등장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그쪽 업계니까 과한 디테일에도 뭐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배경 묘사에 실컷 공들여놨더니 얼마 못 가서 나나가 극단을 때려치운 데에 있다. 사실 그전에도 나나의 활동이나 관련된 장면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차후의 내용이 앞의 장황했던 설명들과 크게 이어지지도 않는다. 후반부에 다시 배우로 복귀하지만 또다시 그만둬버리므로, 결국 극단과 배우의 설정이 썩 중요치도 않은 별개의 장치였던 셈이다. 에라이.
두 번째로 억지 분량을 짜낸 것이 사교계의 묘사다. 프랑스 문학에서는 상류층의 사교모임 장면이 흔하게 나오는데, 그것이 귀족들의 문화라 따분하고 올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같은 상황이라도 영국 문학은 한층 더 심플하고 위트 있게 풀어나가는 편이다. 그러니 비교를 안 할 수가 있나. 솔직히 큰 스캔들이 없는 이상 사교계가 거기서 거기인데, 여기서 재미와 분량을 뽑아낸들 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심지어 나나는 귀족 집안 출신도 아니고, 명성은 있었지만 명예를 가진 것은 아니었기에 아무리 남자들의 등골을 빼먹고 다녔어도 평판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인네들의 시샘과 질투를 받긴 했어도 남자들과의 썸씽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작가조차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하다. 근데 어째 리뷰가 점점 산으로 가는 기분일쎄?
연극으로 거액을 거머쥔 나나는 집을 사고 하인들을 거느리는 주인마님이 되어 신분 상승의 맛을 누린다. 일도 안 하고, 돈은 펑펑 쓰고, 알아서들 기어 대니 황후의 삶이 부럽지가 않은 그녀. 일상에 싫증 날 때면 남자들을 낚아다 돈을 타낸 뒤 영혼을 쥐락펴락하다가 걷어차버린다. 마치 악마에게 먹힌 것처럼 갈수록 심해지는 팜므파탈 플레이가 서서히 파멸을 노래하고 있었다. 보다시피 나나는 남자들을 타락시키는 걸 본능적으로 좋아했고, 남자의 수치심을 건드리면서 자극받기를 즐겨 했다. 도무지 해석 불가한 그녀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들이, 알 수 없는 증오의 화살들이 나중 가서야 겨우 납득이 되었는데, 불행을 몰고 다니는 루공-마카르 집안의 핏줄이, 사회를 향한 무의식적인 원한과 보복심으로 표출된 거였다. 잘 보면 나나에게 꼬이는 남자들은 백작, 사업가, 은행가 등등 죄다 상류층이었고, 이들의 부와 명예를 날려먹음으로써 저도 모르게 복수한다는 식이었다. 보통은 이 악물고 성공한 뒤 위에서 군림하는 정도로 그칠 텐데, 나나는 파산에다 풍비박산으로 사회에 매장하여 회생 불가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면서도 탕진과 섹스의 재미만은 꼭 챙겼으니, 이건 뭐 본인만의 무기를 흉기처럼 다뤘다고 해야겠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그러니까 이 작품의 메인 테마는 ‘성(性)‘이다. 에로티시즘을 강조하기보다 그 욕망에 깃든 기질을 다루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나는 자신의 육체가 지닌 매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 활용하여 원하는 바를 모두 이뤄낸다. 혹여 그 과정 또는 결과에서 현타라도 왔다면, 그녀의 ‘인간다움‘은 지켜냈을지언정 작품성은 떨어졌을 거다. 처음부터 나나는 ‘성‘으로 꽃피우고 진다는 결말이었을 테니까. 것보다 나나라는 인물의 개인사가 너무 없어서 투박한 캐릭터가 된 점이 아쉽다. <목로주점>에서 죽은 엄마를 떠나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나이를 먹어왔고, 어떻게 배우로 발탁되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많은데 전혀 언급이 없더라. 여하간 이번 작품은 졸라에게 실망한 점이 수두룩 빽빽하다. 그나마 재미없단 걸 알고 봐서 다행이었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