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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평점 :
유행을 따르지 않다 보니 나의 독서는 언제나 뒷북이 되곤 한다. 이게 독서보다도 서평에서, 특히 유명작을 리뷰할 때가 제일 문제이다. 기존 평이 많을수록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중복일 거란 말씀. 근데 또 내 성격상 남들과 겹치는 글쓰기를 싫어하거든. 하여 어쩔 수 없이 비평모드일 때가 더 많은 것이다. 내가 이유 없이 까칠한 게 아님을 이제라도 밝혀둔다. 매우 늦은 감이 있지만.
<동급생>도 꽤나 명성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번에도 비평 위주로 가려 했는데 이거 잘 될지 모르겠다. 나치즘으로 인해 멀어져 버린 두 친구의 이야기. 유대인과 독일인의 민족을 뛰어넘는 우정은, 커져가는 히틀러의 세력 앞에 조각나고 말았다. 유대인 친구는 왜 자꾸 거리를 두냐며 서운해하고, 독일인 친구는 감정만 앞세우지 말고 자기를 이해해달라 한다. 그렇게 숨겨두었던 본심은 유일한 친구관계를 원망으로 바꿔놓았다.
유대인 친구는 사랑을 공급할 대상이 필요했고, 독일인 친구는 가문까지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렇게 출발점부터 다른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착 달라붙어 지내는 동안에도 선을 긋던 독일인 친구는, 기꺼이 상처받을 준비가 됐다는 절친에게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경고한다. 아니, 귀족이라면서 그게 할 말인가? 안 그래도 계급 차이를 절감하는 친구한테? 유대인들을 경멸하는 모친을 방패 삼아 제 감정을 속였던 독일인 친구는 우정의 어디까지가 진심이었을까.
부모의 권유를 따라 유대인 친구는 미국으로 넘어간다. 이때 독일인 친구가 쓴 편지가 아주 가관이다. 히틀러가 조국을 구할 테니 훗날에 다시 돌아와도 좋단다. 이런 놈하고 우정을 맹세했었다니. 얼마나 실망스러웠으면 미국에서 30년이나 짱박혀 살았겠나. 아무튼 괜히 읽었다 할 정도로 평범했는데 마지막 챕터가 작품성을 확 끌어올려놨다. 솔직히 뻔한 반전이라 놀랍지는 않았고, 잘 살고 있는 주인공에게 추모비 기부 요청서를 날려서 겨우 묵혀둔 감정들을 끄집어내게 한 연출이 압권이었다. 대부분 친구와의 끊어지지 않은 우정을 주목하는 반면, 나는 부모의 자살 소식과 본인의 인종차별, 친구에 대한 실망을 떠올렸을 주인공의 아픔에 주목했다.
그리고 나는 좀 그렇다. 마지막 문장 한 줄로 수십 년간의 묵은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개연성이라곤 1도 없는 말 같은데, 여기에 많은 독자들이 펑펑 울었다니까 좀 어이없다. 주인공처럼 여리고 섬세한 성격들은 평생을 가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데 무슨 뷰티풀 엔딩 어쩌구 저쩌구. 이런 게 바로 유행 타는 독서의 단점이다. 아무튼 이만하면 중복은 아니겠지? 힘들다, 증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