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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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체로 동의하는 쪽이다. 그렇지만 나도 두 번이나 큰 변화를 겪은 사람이라 쉽게 단정 짓지는 못하겠다. 나를 포함해 눈에 띌 정도로 달라진 사람들은 대개 어떤 사고로 인해 정신세계가 뒤집힌 경우였다. 설령 그 일을 계기로 좀 더 나은 모습이 되었다 해도 본연의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슬프기 그지없다. 인생의 베스트를 살고 있는 요즘에도 과거의 순수했던 시절로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성숙해진 만큼 본래의 내 모습은 얼마나 많이 부정당했을지.


나이 듦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린다면 얘기가 다르다. 마침 몇 년째 연락 두절이던 동창의 소식을 들었는데, 이상한 무리와 어울리더니 되지도 않는 허세남 흉내를 내며 지낸다고 했다.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니었었기에 너무 의외였고, 결국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지만 그에게도 어떤 계기가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애석하게도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기대는 물론이고 설명할 이유 또한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생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나니.


서머싯 몸은 <면도날>을 통해서 개인의 변화와 이해관계의 충돌을 이야기한다. 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돌아온 래리에게는 이전의 쾌활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약혼녀 이사벨은 전혀 구직할 마음이 없는 래리와의 혼사를 무르고 다른 부잣집 아들과 가정을 이룬다. 이사벨의 물질만능주의는 사교계를 주름 잡는 엘리엇 삼촌의 영향이 컸다. 엘리엇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는 시늉도 마다않는 집념의 끝을 보여준다. 이토록 자기주장이 강한 인물들을 통해 저자는 삶의 의미가 어디에 달렸는지를 논하고 있다. 어쩐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냄새가 풍기는데 일단 무시하기로 한다.


경제 대공황으로 이사벨 부부는 완전히 파산하기에 이른다. 다행히 삼촌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더 이상 예전의 호사는 무리였다. 이때 화자는 이사벨을 찔러본다. 래리와 결혼했어도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후회는 없냐면서. 래리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호화로운 삶을 택하겠다는 이사벨. 세월이 갈수록 더해져 가는 성숙함과 비례하는 욕망의 민낯을 본 화자는, 래리가 그녀의 먼 훗날을 내다본 것은 아니었나 짐작해 본다.


정작 래리는 이사벨 가문의 속물근성을 문제 삼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인생의 진리를 찾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각국의 종교, 학문, 철학, 예술, 사상을 피곤한 줄도 모르고 탐구하러 다녔다. 여전히 주변인들은 래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딘가 여유로워진 그 모습에 존중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엘리엇과 이사벨 부부는 존중과 점점 멀어진다. 나이 든 엘리엇 삼촌은 상류사회에서 점점 밀려났고, 이사벨의 고상함은 효력이 다했고, 그녀의 남편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 망가져만 갔다. 열심히들 살았지만 현실은 이들을 배반해버렸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욕구가 머문 곳으로 달려가 골인한다. 엘리엇 삼촌은 끝내 사교계에 죽음을 바쳤고, 이사벨 부부는 신사업을 계획하여 부를 계속 쫓았고, 재산마저 포기한 래리는 겨우 해방되기에 이른다. 저자는 이 책으로 답을 찾기 보다 질문을 남기고 싶어 했다. 본인이 만족한다면 어떤 식으로 살았든지 간에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게 내 의견이다. 사실 지금도 제목이 상징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서문에 인용 글을 보아선 면도날의 날카로움을, 구원받기 힘든 인생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구원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함을 느꼈을 테다. 다만 그 종이를 뒤집을 줄 몰라서 다들 막연하게 살아갈 뿐이다.


래리가 인생의 해답을 찾았느냐 못 찾았느냐는 중요치 않다. 그 길을 걷는 과정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보상받았을 테니까. 삶의 의미를 영적인 데에서 찾는 사람들은 <데미안>에서 말한,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와 같다. 그러니 일찍부터 바깥세상의 존재를 감지한 이들은 진정 복받은 사람이라 하겠다. 부와 명예가 전부이던 엘리엇도 죽을 때가 다가오니 종교부터 찾고 본다. 이렇게 현실 세계가 전부인 양 살던 사람도 공허해진 세월 앞에서 영적 세계를 그려보곤 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이런 방황들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앞서 말했듯 본인이 만족하면 그만이지만, 속세의 삶이 가져다주는 안락과 행복은 일시적이라 말하고 싶다. 과연 영원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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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26 12: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면도날 리뷰 반가워서 달려왔습니다. 래리가 지금까지는 제 최애 남자 캐릭터거든요. 래리랑 결혼하고 싶진 않지만 래리 너무 섹시해.........
저는 서머싯 몸 소설 읽을 때마다 좋았고 면도날 읽으면서 특히 좋았던게 서머셋 몸이 모든 인물들을 미워할 수 없게 그린다는 점이었어요. 저는 그래서 이사벨도 엘리엇도 마지막까지 연민과 애정을 갖고 지켜봤습니다. 이사벨.. 래리 좋지만 결혼상대로는 아니긴 해. 난 널 이해한다.. ㅋㅋㅋㅋㅋ

물감 2023-07-26 13:07   좋아요 3 | URL
저도 나름 유니콘인데 래리는 어나더 레벨이군요 ㅋㅋㅋ
서머싯 몸 작품은 이게 처음인데 되게 재미있네요. 왜 어렵다고만 느꼈을까나...
인물마다 서사를 부여한 점은 정말 좋았어요. 특히 엘리엇이 너무 괜찮았거든요. 제가 애정하는 헤세랑 비슷한 결을 가진 양반같아보여서 좀 더 관심을 가져볼까 합니다 ㅋ

은오 2023-07-26 13:17   좋아요 3 | URL
맞아요, 인물들마다 서사가 있고 굉장히 입체적!! 독자가 서머싯몸한테 “당신 덕에 처음으로 사전 없이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 고맙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을 만큼 쉽게 쓰고, 서머싯몸이 소설 쓰면서 재미를 가장 중시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어렵지 않음과 재미를 둘 다 보장하지만 결코 얕지는 않음. 저는 그래서 누가 소설에 재미 붙이고 싶은데 고전중에 추천해달라고 하면 달과6펜스 읽으라고 합니다 ㅋㅋㅋ 물감님도 달과6펜스 드셔보세요. 개인적으로 달과6펜스>면도날>>인생의베일이었습니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사놓고 아직 안읽음ㅋㅋ

물감 2023-07-26 14:44   좋아요 1 | URL
은오님 서머싯 몸에 진심이시네요 ㅋㅋㅋ 다른 작품도 차차 읽어보겠어요 🙂🙂🙂

coolcat329 2023-07-26 17: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 서머셋 읽어야 하는데...면도날 저도 반갑네요. 안 읽었지만 제목이 넘 맘에 들거든요~~
인생의 굴레에서를 먼저 읽으려고 했는데 면도날로 바꿀까봐요 ㅎㅎ

물감 2023-07-26 17:39   좋아요 1 | URL
전 작품의 평이 좋던데요, 끌리는 거 먼저 읽으세요ㅋㅋ 저는 <케이크와 맥주>가 끌립니다😀

coolcat329 2023-07-26 17:40   좋아요 1 | URL
그 책도 있어요 ㅎㅎ 좋다는 책은 다 준비해놨네요 😅

물감 2023-07-26 17:42   좋아요 1 | URL
ㅋㅋㅋ저랑 서머싯 몸 작품깨기 하시죠

coolcat329 2023-07-26 17:43   좋아요 1 | URL
ㅋㅋ 네 제가 물감님 쫓아갈게요!

물감 2023-07-26 17:48   좋아요 1 | URL
👍👍👍

페넬로페 2023-07-26 2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래리라는 인물이 넘 궁금하네요.
저는 케이크와 맥주보다 달과 6펜스를 더 선호해요 ㅎㅎ

물감 2023-07-26 21:44   좋아요 2 | URL
<달과6펜스>가 메인 반찬이로군요. 참고해두겠습니다 ㅎㅎ
아직 이 책을 안보셨다면 요즘 같이 비 내릴 때에 읽어보세요. 분위기와 제법 잘 맞습니다. 윗쪽에 은오님 호들갑 보이시죠? ㅎㅎㅎㅎ

잠자냥 2023-08-08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독서 슬럼프에 빠지면 서머싯 몸을 읽습니다.
그만큼 재미 보장 몸!

물감 2023-08-08 17:00   좋아요 1 | URL
오호... 메모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