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적당히 따스한 가을 햇살이 버스 안으로 들어온다. 쳐다보는 나무마다 얼굴을 붉혔고, 붕어빵은 어느새 차갑게 식었다. 피곤한 두 눈을 감고 들려오는 안내방송에만 집중한다. 갈색 재킷을 입은 엄마는 통화 중이고, 옆자리 아이는 장난감 로봇을 가지고 떠들어댄다. 반복되는 소음에 다시 두통이 찾아와 가방을 열어보니 약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따라 버스기사는 느긋하고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는 작동하지 않는다. 열차가 멈추자 앉아있던 승객들이 우산을 들고 내린다. 오후에 비가 올 것을 알고 있었는데 또 생각 없이 집을 나섰다. 점점 목소리를 높이는 두 노인 때문에 두통이 심해진다. 그냥 오후 반차를 낼까.


내 나름대로 이 책의 분위기를 따라 써봤다. 언뜻 보면 차분한 일상의 감성으로 충만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내용은 없을 거다. 이 책이 딱 그랬는데, 생략된 주어나 문장으로 글의 연결은 부자연스럽고, 그래서 핀트가 안 맞다 보니 묘하게 심기가 불편했다. 이것이 정녕 오리지널 아일랜드 감성입네까? 그렇다면 나는 아일랜드 문학보단 아일랜드 주방 쪽하고 더 잘 맞는가봅네다.


아내와 사별한 남자는 새로 온 하녀와 결혼한다. 형편이 나아진 그녀였지만 여자로서 사랑받지는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타지의 남자와 가까워지면서 설레는 감정을 느끼지만,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며 방황한다. 남자를 따라 아일랜드를 떠난다면 행복할지는 몰라도 평생 범죄한 신앙인이 될 것이다. 반대로 남편 곁에 남는다면 안정된 삶을 살겠지만 평생 사랑은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여자의 고민을 눈치챈 남자의 가슴 시린 혼잣말.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어휴. 중반까지는 내용 파악이 안되어서 애 좀 먹었다. 문단 안에서 자꾸 시점이 바뀌는 데다 이야기에 어떤 알맹이가 없어서 영 집중이 안 된다. 이런 알듯 말듯 아리송한 내용이 몇 가지 시점으로 교차하다 중간에 야금야금 합쳐진다. 그전까지는 여러 단편들을 번갈아가며 읽는 기분이었는데 가독성마저 좋지 않아 나 같은 타입에게는 인내심 테스트에 그만인 작품이었다. 이야기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사건 발생과 인물 갈등이 필수 조건인데, 이 책은 한참 뒤에 가서 숨을 쉬기 시작한다. 게다가 5분이면 될 얘기를 1시간으로 늘려 말하듯 느린 전개이다. 스토리가 안되면 글맛이라도 있던가, 주제가 없으면 재미라도 있던가. 이중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으면서 이상하게 건들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왜인지 읽는 내내 <전원일기>가 떠올랐는데, 그 케케묵은 작품이 모든 면에서 이 책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된다. 


후반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글이 매끄러워지고 알맹이가 생기면서 제법 소설다워진다. 진작 이렇게 해줬음 얼마나 좋았답니까. 일단 세 명 다 가족으로 인해 생긴 상처로 과거 어딘가에 갇혀있다. 남편은 자신의 실수로 아내와 자식을 숨지게 했고, 아내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 출신이었으며, 남자는 죽은 부모에게서 많은 빚과 소송을 물려받았다. 이들의 문제는 극복을 할 수 있고 없고의 무게가 아니었다. 작가는 인물들을 그냥 그렇게 쭉 방치해두는 길을 택했다. 소설이라 해서 어떤 특별함을 부여하기보다 비교적 현실적인, 또 지극히 인간적인 선택과 책임을 쥐여주었다. 반전 없는 결말이 싱거워 보일 수 있겠으나 긴 시간 유지해온 적막과 감정선을 깰 바에야 이 같은 엔딩이 더 어울리기는 하다. 여하튼 상실과 슬픔을 극복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한다는 점에서 독자의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때로는 우는 사람을 곁에서 달래주기보다 멀리서 지켜봐 줄 때도 있음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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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11-01 07:01   좋아요 2 | URL
이 책도 <펠리시아> 읽고 나서
보려고 쟁여 두었는데 여기 갔
는지 모르겠네요.

읽을 적에 리뷰 잘 참고하겠습니다.

물감 2021-11-01 13:23   좋아요 1 | URL
독자들의 취향 존중을 떠나서 문법이 영 거슬려서 혼났어요. 번역이 별로라는 평도 좀 있던데 제가 보기엔 번역만의 문제는 아닌듯 합니다. 그래도 <펠리시아의 여정>은 기대해보겠습니다.

- 2021-11-01 08:48   좋아요 3 | URL
어쩐지 ㅋㅋㅋ 앞 문단 너무 서정적인데다 남 한테 관심많아 (이런 캐릭터였나?) 했는 데… ‘제법 소설다워 진다’는 표현에서 (아 이런 글 쓰는 사람이었지ㅋㅋㅋㅋ) 안도 하고 갑니다~
월요일 화이링~~~

물감 2021-11-01 11:51   좋아요 3 | URL
사람은 갑자기 바뀌면 안된다죠 ㅋㅋㅋ 아무도 못믿겠지만 저는 옥구슬 감성의 소유자라서 얼마든지 서정적인 글도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창피함은 읽는 이의 몫이라는ㅋㅋㅋㅋㅋ 출근하면서 이어폰 케이스를 잃어버렸네요... 하아... 월요일 화이링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11-01 13:20   좋아요 2 | URL
옥구슬 감성의 서정적인 글도 아주 좋은데요? 자주 써주세요~ ㅎㅎㅎㅎ

물감 2021-11-01 20:11   좋아요 1 | URL
잠깐 흔들렸지만 전 이웃님들을 눈물 글썽이게 만들고 싶지 않으므로 캐릭터 유지하겠습니다ㅎㅎㅎㅎ

- 2021-11-01 18:48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옥구슬 낭창한 글을 읽은지 너무 오래됐네요? 까마득함 ㅋㅋ (가장 최근 읽은 소설은 동네에 숨어든 뱀파이어 찢어발기는 내용이었…)
아니다 엊그제 청춘의 문장들 새삼 읽는데 항마력 딸립디다. 안되겠어 감성을 촉촉하게 하기 위해 다른걸… 좀…

물감 2021-11-01 20:13   좋아요 1 | URL
쟝쟝님, 이제 세상은 아포칼립스라서 촉촉한 감성 같은 건 없어도 된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장르물 즐기셔요ㅋㅋㅋ

붕붕툐툐 2021-11-01 19:57   좋아요 2 | URL
전 지금 배고파서 붕어빵은 어느새 차갑게 식었다에 꽂혔어요. 붕어빵을 식을 때까지 두다니,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ㅎㅎ
트레버옹 작품이라 읽어보고 싶었는데 심히 고민이 되네요~ 너무 서정서정한 걸 어려워하는 섬세하지 못한 사람이라서요~~ㅎㅎㅎ

물감 2021-11-01 21:01   좋아요 2 | URL
그것은 붕어빵에 묻어있을 미세먼지 생각에 차마 씹지 못하고 있다가 식어버렸다는 비하인드가 있습니다 ㅋㅋㅋ이제 길거리 음식들은 정말 손이 가질 않아요...
툐툐님의 섬세함 정도면 트레버옹 작품은 문제없을듯요! 냉큼 도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