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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라이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9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9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가마다 원픽 장르가 있을 텐데 내 경우는 스릴러소설이었다. 지금은 과거형이지만 그것만 미친 듯이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질리도록 보고 나니까 장르문학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에 공감해버렸다. 주인공의 직업도 한정돼있고, 기승전결도 비슷비슷하고, 범행 동기도 별게 없어서 어떤 감동, 감화를 기대할만한 장르는 못된다. 정크푸드만 먹으면 건강을 버리듯, 장르문학만 읽으면 정신건강에 해로우니 어쩌다 읽어주는 게 좋다. 이건 순수 내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둔다. 내 독서 패턴은 강약 중강약이라서 묵직한 작품 뒤에는 스릴러소설로 머리를 식혀주는데, 이런 식으로 슬럼프 없는 독서 생활을 꽤 오래 유지하고 있다. 여튼 기분전환을 위한 책도 나름 신중하게 골라야 하는데 그것마저 귀찮을 때는 이렇게 코넬리옹의 작품을 집어 든다.
1편에서 해리 보슈의 나이가 무려 마흔이었다. 시리즈물의 주인공이 마흔으로 시작하다니 좀 그렇다 싶던 기억이 난다. 어느덧 그의 나이는 오십 줄에 들어섰다. 28년의 형사 생활을 끝으로 은퇴한 보슈. 이제는 조용히 지내도 되겠고만 지독한 직업병이 그를 가만두질 않는다. 남는 게 시간뿐인 그는 수년 전의 미제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다. 아직까지도 발목이 붙잡혀있는 기분이라며 고뇌에 빠졌지만 이번 건 솔직히 그냥 몸이 근질근질한 걸로 밖에 안보인다.
당시 사건은 이러했다. 한 영화제작사가 은행에서 거액의 현찰을 빌렸고, 촬영 현장에서 강도들이 나타나 총격전을 벌이며 현찰 가방을 들고 튀었다. 원래는 보슈의 담당 사건이었지만 다른 곳으로 넘겨졌고, 끝내 풀지 못한 채 여태껏 방치되어왔다. 그 사건이 있기 전,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연출된 영화사 직원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보슈는 두 사건이 연결돼있다고 직감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수사를 해야 하는 보슈. 돈의 행방을 쫓던 중 미제 사건을 담당했던 FBI 요원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되고, 그 사건이 테러리스트와 연관돼있다는 사실도 알아낸다. 이것은 똥밭에서 지뢰 밟은 남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
형사 소설의 주인공을 은퇴시키고도 멀쩡히 시리즈를 이어나가는 작가의 능력이 사기급이다. 이번 작품은 제 맘대로 사건을 수사하려는 은퇴 형사와, 사건에서 손 떼라고 협박하는 경찰국과 FBI의 기싸움이라고 보면 된다. 경찰국의 경고를 무시한 보슈는 FBI에게 붙잡혀서 혼쭐이 난다. 그러나 FBI의 약점을 가지고 그들을 휘어잡는 보슈. 경찰 배지는 반납했어도 여전히 그는 만렙이다. 캐릭터가 코요테에서 능구렁이로 바뀌긴 했지만.
이 시리즈의 액기스는 역시 주인공의 고독과 심연에 있다. 경찰에서 빠져나온 보슈가 드디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현역 시절의 자만심을 인정했고, 공권력이 없는 현재의 초라함을 뼈져리게 느꼈다. 또 누군가의 말대로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행동했던 보슈는, 이제서야 피해자의 관점으로 사건을 볼 수 있게 변했다. 나이를 먹더니 드디어 철이 든 걸까, 아니면 경찰을 관둔 뒤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걸까. 여튼 지날수록 인간미는 숙성되고, 방황은 점점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물론 작가는 또 다른 고뇌를 보슈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히에로니머스 보슈란 이름은 곧 저주의 운명이니까. 마지막 장면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행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슈의 생애에서 가장 기쁘고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니었을지. 삶의 지표를 만났으니 은퇴하고도 열심히 사셔야겠군. 난 은퇴하면 흔들의자에서 느긋하게 독서와 커피를 즐길 겁니다. 내가 그때까지 과로사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