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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평점 :
누가 그러더라. 자기 연예인 시켜주면 정말 잘 할 자신 있다고. 글쎄, 과연 퍽이나 잘하겠다. 그런 말하는 사람치고 멀쩡한 사람을 본 적도 없지만 혹여 스타가 된다 해도 금방 떨어져 나갈걸. 연예계는 티비에서 보던 거랑 전혀 딴판이거든. 그러니 내 라이프스타일과 맞지도 않는 타인의 삶을 그만 좀 부러워하라고, 신세타령은 그만하고 영단어나 더 외우라고, 저 철없는 친구에게 누가 나 대신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쓰리잡을 뛰고, 누구는 범죄도 저지른다. 그렇게 해서 돈 많이 벌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거지는 거지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살기 힘들다니까 뭐. 자 그럼 본인의 그릇과 맞지 않는 신분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백인의 신체적 특징을 가진 흑인 여성 클레어. 인종을 속이고 백인과 결혼하여 신분 상승에 성공한 클레어. 옛 친구 아이린을 만나고부터 할렘가 죽순이가 된 클레어. 이제서야 본인에게 맞는 옷을 찾아 기뻐하는 클레어. 고삐 풀린 그녀는 개념 밥 말아먹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린의 몫이 되었다. 이제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으려면 클레어를 밀어내야만 한다.
복잡할 것도 없는 내용이지만 꽤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이 책은 패싱을 해온 클레어가 아니라 아이린이 주인공이며, 패싱에 관한 내용보다 아이린의 고군분투 내용에 더 가깝다. 클레어 먼저 말해보자. 백인 사회에서 정체를 감추고 사느라 지쳤던 클레어는 흑인들과 어울리면서 죽어있던 세포들이 눈을 뜬다. 제 정체성을 찾은 그녀는 가족이고 뭐고 최선을 다해 욜로를 즐긴다. 백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클레어의 이기심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그럼에도 세상 혼자 사는 외모와 매력 덕분에 주변이 다 그녀를 좋아한다. 클레어에게 빠진 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미움 살만한 짓을 해도 다 용서할 분위기이다. 이놈의 외모지상주의...
아이린도 살펴보자. 그녀는 클레어의 갖은 무례함에 얼른 선을 긋고 손절에 나선다. 하지만 클레어의 접근을 막을 수가 없었고, 원치 않게 그녀와 사사건건 엮이게 된다. 그녀에겐 클레어의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패싱에 성공하여 가난의 딱지를 떼어냈고, 패싱을 안 하는 흑인들이 이해 안 된다며 비아냥 거렸다. 그렇게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갑자기 흑인 행세를 하는데 납득이 안될 만도 하다. 백인으로 온갖 혜택을 누려놓고 이제 와 자신의 뿌리는 흑인이니까 흑인의 문화를 즐길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재수 없었을 테지. 그래서 클레어 남편에게 패싱을 폭로할까도 했지만 들키든 말든 상관없다는 그녀의 태도에 할 말을 잃고 만다. 클레어에게 그토록 망신을 당해도 화 한번 내지 못하고 이미지 관리하는 아이린은 전형적인 위선자이다.
그런 아이린과 성향이 정반대인 그녀의 남편이 등장한다. 남편은 미국을 떠나 브라질에 가서 자식들을 인종차별 없이 키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내는 지금 생활로도 충분하다며 이주를 거부했다. 남편은 아이들도 섹스나 린치 같은 문제들을 알아야 한다지만, 아내는 그런 조기교육은 필요 없다고 했다. 보다시피 아이린의 일 순위는 안정성인데 남편이 거기에 자꾸 반대를 하니 계속 부딪힐 수밖에. 때마침 나타난 오픈 마인드의 클레어가 남편한테는 거의 뭐 구원자였을 거다. 그래서 아내가 보든 말든 클레어와 꽁냥거렸고,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보며 가정의 평화가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한 아이린은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믿으며 쿨한 척을 한다. 참 가관이다.
클레어처럼 아이린도 이기적이다. 그녀는 클레어가 걱정된다 하면서도 정체가 들통나길 바랐다. 그런데 클레어가 자유의 몸이 되면 내 남편하고 바람이 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이린은 자기 가족만큼이나 클레어 가족의 평화도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클레어의 말들이 무례하다면 아이린의 말들은 온통 위선이다. 엮여서 좋을 게 없는 두 사람은 서로가 적인 셈이었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정체성을 위협했고, 클레어는 아이린의 가정을 위협했기 때문에.
사자는 고기를 뜯고, 소는 풀을 뜯어야 한다. 고기 맛이 궁금하다 해서 사냥을 하는 소는 없다. 따라서 클레어에게 백인의 삶은 환상일 뿐이었고, 아쉬울 게 없는 데도 흑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남부럽지 않게 살아봅시다. 근데 사실 이 책은 고전이면서도 딱히 메시지 같은 게 안 보여서 리뷰가 꽤 힘들었다. 그러니 아무 말이나 댓글 좀 달아주십쇼.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