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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상황 1] 테이크아웃 커피를 다 먹은 당신은 일회용 컵을 버리고 싶다. 때마침 쓰레기가 쌓인 곳이 있는데 ‘쓰레기 투척 금지‘라는 경고가 붙어있다. 당신이라면 일회용 컵을 버릴 것인가, 가져갈 것인가?
[상황 2] 놀이터에서 돈을 주운 당신은 자리를 뜨며 신나게 배달음식을 주문한다. 그런데 누군가 뛰어와서 여기에 돈 떨어진 거 못 봤냐고 물어온다. 당신이라면 모른 척할 것인가, 사실대로 말하고 돌려줄 것인가?
[상황 3] 좁은 공간에서 주차를 하다가 옆 차를 긁어버린 당신. 주변에는 카메라가 없고, 긁힌 차는 블랙박스도 안 달려있다. 당신이라면 조용히 차를 끌고 떠날 것인가, 차주에게 연락할 것인가?
위 상황들은 모두 양심을 저울질하게 만드는 내용들이다. 재밌는 점은 양심을 지키면 손해를 보고 양심을 버리면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도덕과 윤리를 배우며 착하고 바른 사람으로 자라도록 교육을 받지만 현실은 양심껏 살면 바보 소리를 듣는다. 사회의 질서를 잡아주는 이 양심이 개인에게는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이런 아이러니도 다 있는가. 실제로 양심 없는 인간들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도 요지경 세상이라고 봐야 할까. 이 같은 양심의 갈등을 종교 문제로 다룬 고전작을 읽었다. 어려운 내용은 아닌데 리뷰 쓰기 참 난해한, 내가 싫어하는 케이스지만 그래도 써보겠다.
이 대위는 유엔이 점령한 평양으로 파견대를 간다. 이후 북한의 기독교 목사들이 공산당에게 잡혀가 총살을 당한다. 거기서 빠져나온 두 목사를 통해 파견대는 사건의 정황을 알고자 한다. 하지만 한 명은 정신이 나갔고, 한 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북한의 교인들은 죽은 목사들을 거룩한 순교자로 보는 반면 생존한 두 목사를 곱게 보지 않는다. 모두의 비난을 받고도 가만히 있는 신 목사에게 뭔가가 있음을 감지한 이 대위. 마침내 신 목사가 사건의 진실을 밝히지만 변함없는 교인들의 태도에 이 대위는 할 말을 잃는다. 정녕 그들의 신은 백성들이 겪는 고통과 수난을 알고는 있는가.
알고 보니 동료 목사의 생일 축하를 위한 자리에 공산당이 습격해서 마구 쏴 죽인 거였다. 이들 가운에 불순한 사람이 섞여있었고, 그래서 체포되었던 것이지만 사건의 진실과 상관없이 장 대령은 희생자들을 고귀한 순교자들로 못 박아 공표하고 싶어 했고, 교인들도 그렇게 바라며 믿었다. 희생자들이 모두 순교자라는 타이틀을 받아선 안되었지만 이런 추악한 진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신 목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희생자들이 받게 될 비난을 자신에게 돌리고 끝까지 중립을 고집한 신 목사가 염려했던 건 아무도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신도들의 신앙과 믿음을 꺾지 않으려 진실 아닌 진실을 믿게끔 놔두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은 신 앞에서 감추질 못했다. 진실을 밝히자니 신도들이 무너질 테고, 거짓을 그대로 놔두자니 신을 모독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양심을 외면하면서 괴로워하는 그의 수난은 한참 동안 이어진다.
장 대령은 사정을 다 듣고도 목사들이 순교자라고 주장했다. 비록 잘못한 게 있어도 그들은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무교인 주인공은 죄지은 자도 순교자가 된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이렇게 진실을 원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로 여겼고, 신 목사는 이것을 통찰했던 거였다. 제 양심을 버리면서까지 교인들의 믿음이 붕괴되는 것을 막았지만 교인들은 신 목사를 유다라고 욕한다. 그렇게 신 목사는 빨갱이한테 굴복하고 동료를 팔아서 살아남은 죄인 중에 죄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날의 진실을 드러냈고, 예상했던 대로 진실을 원하지 않았던 신도들의 맹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다른 목사들은 오히려 신 목사를 용서하고 위로해주는 등 예상 못 한 모습을 보여준다. 거짓으로 헛된 희망을 주는 성직자가 되기보다 진실로 모두의 미움을 사고 죄를 신 앞에 자백하는 그의 뜻을 이해한 것이다. 드디어 신 목사는 신앙적 양심을 따라 기나긴 고통에서 겨우 해방되었다.
중공군이 평양까지 밀고 내려오자 파견대는 철수하고 신도들은 남한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몸이 불편해 못 떠나는 신도들이 있어 신 목사는 같이 남기로 한다. 이제야 신 목사도 순교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위는 도망치지 않는 신 목사를 볼 때마다 복장이 터진다. 고난에 신음하는 신도들이 바라는 것을 해주는 것. 그들이 믿고 싶은 것을 계속 믿을 수 있게 해주는 것. 내키지 않으면 그런 척 만이라도 해서 신도들을 구해주는 것. 이것이 이 대위가 바라본 기독교인의 진실이고 신앙의 방향이었다. 자신을 속여서라도 교인들의 소망과 화평을 주려는 신 목사를 끝까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시스템에 환멸을 느낀 이 대위는 더 이상 신은 없다고 판단하며 신 목사, 친구 박 대위, 고 군목에게서 등을 돌린다.
갈 곳 없고 기댈 곳 없는 시민들에게 신을 의지할 수 있다는 건 유일한 희망인데, 그 빛줄기를 차단해버리는 진실을 아무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신도들도 신 목사의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지만 살기 위해서 끝까지 부정했던 것일 테다.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며 신을 따르는 신도들도 양심을 속여서 신을 모독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어린 영혼들을 대신해 신 목사는 그들의 죄를 담당했다. 마치 인생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본래 순교란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죽는, 종교인의 거룩한 희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뜻이 교인뿐 아니라 전시 중에 죽는 군인에게도 해당된다고 본다. 신을 위해 죽임을 받드는 목사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인이나, 소명을 따라 양심껏 행동하고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 무교의 주인공이 신 목사와 통하였던 건 두 사람의 처지가 비슷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튼 이 작품을 무교인이 소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온전히 알아야만 신자와 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양심의 줄다리기를 이해할 수가 있으므로. 다루지 못한 박 군이나 고 군목의 내용도 리뷰하고 싶지만 글이 길어져 생략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