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의 발견]In the mood for love

데이비드 린 감독의 ‘밀회 (Brief Encounter, 1945)’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 차우(양조위)와 리춘(장만옥)의 로맨스를 더욱 아슬아슬하게 만들어버리는 건 두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항상 볼 수밖에 없는 이웃들의 존재다. 차우가 몸이 안 좋다는 소리에 죽을 만든 리춘은 그를 위한 음식이라는 말을 할 수 없어 이웃들 모두가 먹을 만큼의 양을 만든다. 두 사람은 각자 부인과 남편이 있는 몸.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파트너는 불륜 관계에 있는 상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그들의 애정은 그저 조심스럽게 끓이는 죽 한 그릇, 스테이크 옆에 무심히 덜어진 노란 겨자, 스쳐 지나면서 던지는 애매한 미소로 표현될 뿐이다. 왕가위는 두 사람이 각자 짊어져야 할 인생의 무게를 로맨스로 포장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로맨스는 각자의 배우자가 불륜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된 뼈아픈 순간들이 지난 후 찾아온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감히 쉽게 빠져들 수 있겠는가. 이미 배우자의 배신으로 인한 아픔을 맛본 그들이 말이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밀회’에는 짧은 시간 사랑을 불태우지만 그 불꽃으로 자신을 소진해버리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중년의 두 남녀가 등장한다. 평범한 가정주부 로라는 목요일마다 시내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탄다. 그녀는 우연히 목요일마다 그녀와 반대 방향의 기차를 타고 외래 진료를 나가는 의사 알렉을 만난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었던 것이, 사랑의 감정은 그들이 채 알지 못하는 사이 마치 폭풍처럼 두 사람의 마음을 휩쓸어버린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러니까 황홀한 고백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간 그 순간부터 그들은 앞으로 남은 것은 오로지 이별뿐임을 느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목요일 오후, 마지막 만남을 갖는다.
‘밀회’의 독특한 점은 이 영화가 두 사람의 이별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관객들은 무겁게 서로에게 다가앉은 두 남녀가 왜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로라의 친구가 갑자기 등장해 수다스럽게 합석할 때, 둘의 당황한 눈빛으로 인해 상황을 알아챌 뿐이다. 눈치 없는 친구의 영원히 계속될 듯한 수다를 앞에 두고 마침내 남자의 기차가 도착한다. 남자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여자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고는 역 바깥으로 나간다. 남자가 떠난 후 여자와 그녀의 친구는 함께 기차에 타서 마주보고 앉아있다. 쉴 새 없는 친구의 수다가 여자의 귀에 마치 화살처럼 고통스럽게 꽂힌다. 그녀는 속으로 뇌까린다. ‘아아, 저 여자가 죽어버렸으면…’ 데이비드 린은 주변인에 의해 훼방된 연인의 이별을 첫 장면으로 삼으면서 평범한 두 남녀의 사랑의 기승전결을 무서우리만치 정확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는 그가 사랑만으로 살기엔 너무나도 복잡한 것이 인생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은영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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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해석이 되나요]‘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키스(Living Out Loud)’의 쥬디스와 패티

쥬디스는 이혼한 남편의 사무실에 들어가 회의 중인 그의 얼굴에 머핀을 던집니다.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거라는 남자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해보지만 보이는 것은 끝, 허무하고 슬픈 풍경뿐입니다. 누군가 행복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행복한 것은 내 주변 사람들과 내가 ‘안녕히’ 사랑하며 지내고 있다는 증거라고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관계가 끝난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겠지요.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새로운 관계, 뭐라 판단하기 힘든 설렘의 유혹을 저버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쥬디스는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겪고 맙니다. 고독에 시달리던 어느 날, 어두운 재즈바에서 일어난 알 수 없는 이와의 키스는 그녀의 막혀있던 감정의 문을 활짝 열었고, 집에 돌아오는 길 마주치게 된 아파트 관리인 패티가 ‘마치 처음 마주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의 웃음이, 밤새도록 나눠도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가, 참 따뜻한 표정이, 힘들었던 쥬디스에게 어떻게 다가섰을지, 그녀의 가슴에 어떻게 남겨졌을지, 상상하실 수 있겠죠.
공강시간 구석진 카페에 모여 앉은 친구들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누군갈 만났는데 참 좋은 사람 같다고. 그 사람과 연애를 하면 이렇게 될 것 같고, 저렇게 될 것 같고…. 우리의 상상은 이미 저 너머에 가 있었습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샬롯이 중년의 밥을 향해 부르던 노래말에도 있잖아요. ‘상상 속에서 이미 그대는 내 연인이 되었죠.’ 쥬디스도 패티와 함께하는 삶을 상상했을 거예요.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갔던 순간들이 분명 있었을 거고요. 그 순간들을 붙잡고 날 좋은 어느 오후 통째를 흘려보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패티의 프로포즈를 거절합니다. 이혼 후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해 내린 결론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꾸리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2년이 흐르고, 다시 찾은 재즈바에서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또 다른 사랑에 빠진 패티를 발견합니다. 여전히 떨리는 마음, 번지는 미소를 고이 담아 뒤돌아선 쥬디스는 텅 빈 밤거리의 유일한 대화상대인 자신의 구두굽 소리에 조금 외로웠을지언정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와는 ‘거기까지, 그때까지만’이 현명한 것이었다는 걸 아니까요. 그녀에게서 끝이 보일 때까지 걷는 것만이 용기가 아님을, 행복과 미련에 대한 무게를 이끌며 뒤돌아서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배웁니다.

육진아 기자 yoo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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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음악처럼]우리가 자유를 꿈꾸는 이유

밴디트 Bandits
현실에 붙박이면 붙박일수록 현실이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날개가 있었더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극복할 무언가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죠.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어 납덩이같은 두 발을 땅에 철퍼덕 붙이고 있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유를 꿈꿀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카루스처럼 날아오를 수 없는 게 당연하니까 인간이 자유를 꿈꾸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경직되고 폐쇄적인 공간인 감옥에서 자유를 꿈꾸기 위해 노래하는 ‘밴디트’ 멤버들에게는 한 가지 교집합이 있습니다. 바로 ‘음악’이죠. 탁하고 흐릿한 영상을 수놓는 그녀들의 노래는 마치 암청색 겨울나무 같아요. 그 중 ‘퍼펫(puppet)’은 단연 압권입니다. 밝고 청아하다기보다는 멜랑꼴리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실의 쾌쾌한 냄새를 떠올리게 하거든요. 경찰의 밤 행사를 위해 후송되던 중 경찰이 저지른 추행으로 짓밟힌 그녀들은 급기야 탈주를 감행하는데, 그 긴박한 순간을 타고 흐르는 노래들 좀 보세요. ‘내가 신이라면(If I were God)’ 좋겠다고 소리치더니 급기야 자유에 ‘눈이 멀어(Blinded)’ 버리는군요. 하지만 카메라는 절대 도주의 분주함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갈대밭에서 통기타를 연주하는 우수어린 루나의 노래 ‘어나더 새드 송(Another Sad Song)’을 통해 한 박자 쉬어갈 틈을 주기도 하니까요. ‘나 잡아봐라’ 식의 두뇌싸움이 계속되는 그 순간에도 그녀들은 아주 여유만만이거든요. 경찰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이미 특종이 되어버린 그들은 어느 선술집에서 ‘에인트 노바디즈 비즈니스 이프 아이 두(Ain’t Nobody’s Buziness If I Do)’를 열창하며 화려한 육체의 향연을 펼칩니다. 전직 결혼 사기범 엔젤은 ‘크리스탈 카우보이(Crystal Cowboy)’로 인질을 자처한 매력남 웨스트를 유혹하기도 하고요. 열광하는 팬들이 많아지고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수록 도주로는 점점 좁혀져만 가는데, 가속도 붙은 자유에의 질주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안 하는군요. 결국 그들은 ‘죽음’으로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 생애 마지막 공연을 준비합니다. ‘제발, 제발 날 좀 잡아보라고(Catch Me)’.
완전한 자유는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리 삶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지속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자유를 열망하면 할수록 자기 갱신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게 될 테니까요. 그것이 음악이든, 의도된 일탈이든 저항이든 말입니다. 날개가 없으면 어때요. 이렇게 자유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일 텐데.
안희연 학생리포터 elliott19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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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뉴스]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카운트다운 外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카운트다운 ●

한국,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돋움하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다음달 12일 열한 번째를 맞는 개막을 앞두고 초청작을 비롯한 영화제 개요를 발표했다.
먼저, 개막작에는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로 독특한 스토리와 풍부한 감정의 조율을 선보였던 김대승 감독의 신작 ‘가을로’가 선정됐다. 홍콩과 중국본토에서 대중과 평단의 동시만족을 이끈 블랙코미디 ‘크래이지 스톤’을 폐막작으로, 총 63개국 245편의 화려한 축제가 벌어질 예정. ‘한국영화 파노라마’ 섹션이 이번해부터 ‘한국영화의 오늘’로 이름을 바꾸고 완성도 있는 저예산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소섹션 ‘비전’을 선보여 관심을 끌고, 라스 폰 트리에, 난니 모레티 같은 거장들의 신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와 동시대 프랑스 작가들의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특별기획 ‘동시대 프랑스 작가들’도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영화제와 함께 열리는 ‘아시안 필름마켓 2006’은 필름 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배우들을 대상으로 하는 ‘스타 서밋 아시아’를 타 필름마켓과의 차별점으로 내세우며, 실질적인 비즈니스 마켓이라는 목표를 위한 첫 발을 내딛는다.

남미의 주옥같은 영화들이 한자리에 ●

서울아트시네마는 오는 20일까지 제7회 멕시코 영화제, 9월 28일부터 10월 4일까지 ‘Sounds of Brazil, Brazilian Film Festival’를 열고 국내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멕시코, 브라질 영화를 상영한다.
1936년에서 2002년까지 제작된 작품들을 소개하는 멕시코 영화제를 통해 백년이 넘는 멕시코 영화역사를 한눈에 훑으며 최초의 혁명 서사극으로 불리는 페르난도 데 푸엔테스 감독의 ‘가자, 판초 비야와 함께’를 비롯한 거장 루이스 부뉴엘, 카를로스 카레라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이어지는 ‘Sounds of Brazil, Brazilian Film Festival’은 브라질의 음악다큐, 코미디, 드라마 등 브라질 영화의 다양한 모습을 담았다. 정치적 영화혁명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네마 누보’가 군부독재의 검열로 쇠퇴하며 암흑기를 맞아야했던 브라질 영화가 각고의 노력 끝에 90년대 부활하기까지의 역사를 시네마 누보 시대의 수작, 조아낑 뻬드로 데 안드라데 감독의 마꾸나이마 (1969)’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화제 기간 동안 브라질의 감독과 배우 등이 참석할 예정이며, 자세한 일정은 홈페이지 www.cinematheque. seoul.kr을 참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보러가자!●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시사회 이벤트에 대학내일 회원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신청자 중 추첨을 통해 150명(2인 입장가능)께 메일스트립, 앤 헤서웨이 주연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시사회 이벤트 ’를 보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는 악명높은 패션계 최고의 권력자 패션잡지 '보그'의 편집장 애나 윈터의 개인 어시스턴트 와 인즈버그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해 화제를 모은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응모기간: 9월 11일 (월)~ 9월 21일(목)
당첨발표: 9월 22일(금), 공지 및 당첨자 개인메일 통지
초대날짜: 9월 26일 (화) 저녁 9시, 서울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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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스페셜]스물 하고도 하나 둘 셋 영화제에 가다

제7회 서울영화제
스무 살의 선택. 이제 너무 식상한 말이 됐나요. 그렇지만 10년짜리 사춘기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 30개국 140편 안에 던져진 스무 살이 있습니다. 지난 8일부터 17일까지 펼쳐졌던 서울영화제에서 이들이 택한 것은 성장, 사랑, 미래, 방황, 불안…. 또 무엇이 있을까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기후 Climates
‘눈빛만 봐도 통해요’라고 했던가. 오래된 사이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별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첫 장면에서 바하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유적지에서 사진을 찍는 이사를 보며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고통과 슬픔의 눈물이다. ‘사랑’은 느끼는 것으론 만족하지 못하고 물질로, 말로 재차 확인해도 반신반의하지만 ‘이별’은 사소한 예감의 가설조차 사실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설이 틀릴 때가 없다는 것. 이사가 바하에게 이별을 고하는 순간도 다소 난데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사가 변하고 있었다는 걸. 영화는 시적인 풍광이 인물들의 감정을 실어 전달해 준다. 그것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다.
문제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렸다
잃어버린 시간 Sheng Si Jie
사랑은 롤러코스터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룬 후엔 레일이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처음의 강렬함은 느낄 수 없다. 타성이 붙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인니는 대학 입학식 날 트럭운전사 무위를 만난다. 같은 모자를 쓰고 있던 둘은 외로움도 비슷했다.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무위를 사랑하게 된 인니는 무위에게 부인과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사랑도 죄라면 죄일까? 희생과 노동은 체벌처럼 따라오고 아이를 빼앗긴 후에야 진실을 알게 된다. 무위의 사랑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그녀의 ‘첫’사랑은 끝이 났다. 그녀처럼 잔인한 첫 경험을 한 사람에게 타성이 붙는 것은 다행이다. 사랑이 끝남과 동시에 상처도 끝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면 스스로 상처주기를 지금 당장 끝내자. 사랑은 이미 끝났다.
예수와 다른 삶, 당신의 선택은
예수의 삶 The Life of Jesus
사방은 가로막혀 사는 게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한 가지 믿을 구석이 있어서 살아갈 만하다. 하지만 그것마저 자신에게서 돌아앉게 된다면 어떨까. 브루노 뒤몽 감독의 ‘예수의 삶’은 그 상황에서 이성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에게 파멸을 안겨준다. 일도 하지 않고 오토바이나 타면서 그저 친구와 지루하게 시간만 죽이는 프레디에게는 마리라는 여자친구가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웬 아랍인이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때부터 프레디는 분노를 가리지 않고 드러낸다. 뚱뚱한 소녀를 추행하고, 아랍인이 싫다며 멸시하고 심지어 그를 처참하게 죽인다. 오토바이를 타는 프레디를 가까이 바라보다가 점점 뒤로 물러서서 그를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점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영화의 시선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를 차갑게 버려둘 것인지, 따뜻하게 끌어안을 것인지.
낯선이가 가져 온 익숙한 것들
방문자
나이를 먹을수록 참다운 인간관계를 찾기는 어렵게만 느껴진다. 자신을 드러낼수록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신동일 감독의 ‘방문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서 따뜻한 시선을 던진다. 대학 시간강사 호준은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 목욕을 하다가 욕실에서 갇혀버린 호준은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방문 전도하던 계상은 호준의 집을 지나다 ‘우연히’ 그를 구출한다. 세상을 불신으로써 적대시하는 호준과 믿음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계상은 상극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부족한 면을 이해하면서 강한 유대를 만들어간다. ‘방문자’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희망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이나 양심적 병역거부 같은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사려 깊은 시선도 담고 있어 더욱 반갑다.
당신의 가족, 괜찮아요?
성스러운 가족 The Sacred Family
이런 류의 제목이 늘 그러하듯, ‘성스러운 가족’ 역시 역설법의 원칙에 매우 충실한 영화다. 한 중산층 가족의 허위의식을 꼬집기 위해 그들은 반대로 ‘성스러운 가족’이 되었다. 성공했지만 늘 자기중심적인 아버지와 신경질적인 어머니, 아버지에게 억압당하는 아들. 이들의 관계는 가족이라는 형식적인 울타리 안에서 불안하게 흔들린다. 게다가 어김없이 등장하는 팜므 파탈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더욱 격렬하게 만들고, 그들의 갈등은 극단을 향해 위태롭게 치닫는다. 자, 이쯤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한 가지 의문을 던진다. 당신의 ‘행복한 가족’은 역설법의 원칙에 잘 포장되어있는가, 아니면 진실인가. 진심어린 소통이 부재한 가족은 결국 위선일 뿐이다. 부모에게서 벗어나 독립된 자아를 형성해야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는 이십 대의 우리들에게, 이 영화는 진심어린 충고를 하고 있다. 세상에 맞서 싸우다 처참하게 부서지고 깨진 뒤에도 편히 기댈 곳이 없다면 우리 삶이 너무 초라해지지 않겠느냐고.
12월이 끝난 후에 남은 것들
12월이 끝나다 December Ends
각자에게는 중요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존재한다. 그 시점을 기준으로 삶은 더욱 강렬한 의미를 되찾는다. 물론 그 과정에는 수많은 눈물과 어려운 감정들이 내재되어있어 우리의 삶을 더욱 굴곡지게 만든다. 하지만 혹독한 추위 뒤에 어김없이 봄이 오듯, 어려운 시간을 이겨낸 후엔 반드시 새 살이 돋는다. 흔히 우린 그것을 ‘성장통’이라 부른다. ‘12월이 끝나다’의 크리스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터닝 포인트는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아내를 잃었다는 슬픔에 스스로를 서서히 파괴시키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크리스는 한 줌의 희망조차도 고스란히 잃어버린다. 결국 크리스는 ‘마약’이라는 새로운 세계, 혹은 혹독한 겨울 속으로 뛰어든다. 크리스는 그곳에서 온 맘과 몸이 시리도록 아픈 경험을 한다. 잃어버리지 말아야 했던 것들을 모두 잃었고, 지켜내야 했던 것들을 모조리 잊었다. 그에게 12월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그 해 겨울, 그는 ‘살아있음에 대한 생생한 열망’을 되찾았다. 자, 봐라. 결국 신은 공평하지 않은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말라 노체 Mala Noche
리버 피닉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아이다호’를 출발점으로 ‘굿 윌 헌팅’ ‘엘리펀트’를 지나 얼마 전 ‘라스트 데이즈’로 돌아온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시간이 지나도 늙을 것 같지 않은 작가 중 한명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 ‘말라 노체’를 만나는 것은 그리하여 가슴 뛰는 설렘이고, 이 작품이 지독히도 쓸쓸했던 ‘아이다호’의 모태라니 가슴 요동치는 갈망이기까지 하다. 감독은 이 갈망을 알아챈 듯 거친 흑백의 화면에 불안한 청년들의 눈빛을 교차 편집하고 ‘황소와 섹스를 하면 뿔을 얻게 된다’는 한 문구를 흘려 넣는다. ‘나쁜 밤 (bad night)’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포틀랜드의 작가 월트 커티스의 자전적인 단편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것으로, 멕시코계 불법 이민자 청년 쟈니를 향한 젊은 동성애자 월트의 끊임없는 구애와 돌봄이 펼쳐진다. 월트가 돈으로 사려했던 가난한 쟈니의 하룻밤과, 또 다른 방식으로 월트와 사랑을 나눈 쟈니의 친구가 출입국관리사무소 관계자가 쏜 총에 힘겹게 살아낸 삶을 끝내야 했던 그날 밤이 겹쳐지고, 과연 무엇이 나쁜 밤인가에 대한 감독 특유의 반어법이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정말 (우리의 삶을) 사랑했을까’
돌아가라, 당신이 있던 그 곳으로
블러쉬 Blush
이번 서울영화제 ‘이미지독’ 섹션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예술을 필름에 담아낸 작품들이 상영됐다. 예술에 대한 기록이자 그 기록을 뛰어넘는 영화, 또 영화와는 다른 영화적 풍경인 필름과의 만남은 새로웠다. 그 중 최근 유럽에서 상영된 최고의 댄스필름을 모았다는 소섹션 ‘풍경의 안과 밖’ 속에 ‘댄스 스크린 2005 베스트 카메라’에 노미네이트 됐던 벨기에의 대표적인 현대무용가 빔 반데케이버스의 ‘블러쉬’가 있었으니, 제목의 뜻대로 얼굴을 붉힐만한 작품이다. 무용수들은 언어 대신 몸을 사용해 완벽한 내러티브를 완성한다. 한 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사랑을 논하고, 한 남자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고, 그 아내는 다른 남자를 유혹하는 게임에 돌입하지만 그 남자는 이 신물나는 상황에 치를 떨며 옷을 모두 벗어버린 채 숲으로, 호수로, 동굴로, 바다로 도망을 간다. 무용수들은 서로 어긋난 상대를 갈구하며 야수처럼 바닥을 기거나 고래처럼 호수를 헤엄치고, 자신의 머리로 상대의 머리를 무참히 들이받는 집단무를 선보인다. 여기에 데이비드 유진 에드워즈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가세하면 사랑 끝 가슴 언저리에 매달려 있던 욕망의 말간 얼굴이 당신을 돌아보니, 돌아가라. 당신이 있던 그 곳으로.
대학내일 문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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