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의 발견]관음의 시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 1974)
관음증은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들이 대중적 반향을 얻기 위해 필요한 쾌락의 중추다.지나치면 사생활 침해라는 범죄와 연결되는 이러한 관음의 욕망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무감각할 정도로 만연해 있다. 이러한 관음의 욕망이 넘쳐나던 시기는 사실 과거에도 존재했다. 미국의 70년대는 관음의 시대였다. 대통령 후보에 대한 도청 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이 있었고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침해가 사회문제화된 시기였다.
소리를 훔친다는 청각적 관음증을 다룬 영화 ‘컨버세이션’에서 도청전문가 해리는 공원에서 채록한 흐릿한 소리 하나를 통해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의 배후를 쫓는다. ‘컨버세이션’의 도청과 감시라는 모티프는 후에 국가적 감시체계의 공포를 다룬 토니 스콧의 스릴러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로 이어지기도 했다.
‘컨버세이션’의 오프닝 장면은 ‘소리의 도둑질’이라는 영화의 테마를 완벽하게 형상화한 명장면이다. 시선의 위계와 정교한 사운드 편집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도청’이라는 영화의 관심사를 전달한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원을 보여주는 버즈 아이 뷰 쇼트(하늘로부터 내려다본 시점화면)로 시작하는 이 장면에서 사운드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첫 소리는 지나치게 작은 볼륨으로 맞춰져 정체가 분간이 안 된다. 카메라가 천천히 줌인 하면서 볼륨은 커지고 소리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이 이 영화의 중심 플롯이 될 것임을 직감하게 만든다. 카메라는 도청전문가인 해리 컬(진 해크먼)을 따라가면서 도청의 희생자인 남녀의 대화내용을 관음적으로 잡아낸다. 실은 대화 내용보다 더 상징적인 것은 이 시퀀스의 끄트머리에 나오는 장면이다. 해리가 도청에 열중하고 있는 도청차량 앞에 두 명의 젊은 여자가 선다. 잔뜩 멋을 낸 그녀들은 바깥에서는 안을 볼 수 없고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는, 특수유리로 제작된 도청 차량의 창문에 얼굴을 비추고 화장을 고친다. 해리와 또 한 명의 도청 전문가는 유리 앞에서 섹시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그녀들을 훔쳐본다. 안온한 상태에서 관음의 쾌락을 즐기는 것이다. 관음의 욕망은‘컨버세이션’을 추동하는 극적 모티프다. 이 영화에서 해리는 도청이라는 청각적 관음증에 중독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숨기며 살아가지만 타인의 사생활을 도둑질하는 데는 익숙하다. 위에 언급한 장면에서처럼 창문 안의 남자들은 창문 바깥의 여자들을 맘껏 훔쳐볼 수 있고 심리적으로 유린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여자들은 관음증에 무방비로 노출된 희생자들이다. ‘컨버세이션’은 청각적 관음증을 통해 인간에게 내재한 음험한 욕망과 대면하게 만든다. 시대와 개인의 병리적 관계에 대한 이처럼 치밀한 메타포는 일찍이 없었던 듯 싶다.
최은영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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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해석이 되나요]좋으면 그냥 좋다고 그래

‘팡팡(Fanfan)’의 팡팡과 알렉상드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까 거리는 환한 불빛으로 반짝거리고, 애정을 과시하는 커플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이질 않는군요.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작년처럼 TV앞에 멀뚱멀뚱 앉아서 스토리 줄줄 외는 ‘나 홀로 집에’와 데이트할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 사람들에겐 서러움의 시작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겠지만요.
예전에 ‘늘 사랑에 실패하는 여자들의 열 가지 타입’에 관한 내용의 소설책을 읽었던 적이 있어요. 정말 비참하게도 열 가지 항목 중 상당수가 현재의 저의 모습과 일치하더군요. 이를테면 ‘늘 들어주는 역할이다’ ‘실수하고 싶지 않다’ ‘밤의 버스를 좋아 한다’ 같은 것들에서요. 사실 연애를 못하는 사람들은 열이면 열 주변에 남자가 없다는 핑계를 대요. 아니면 눈이 높기 때문에 적당한 사람을 못 찾았다면서 알량한 자존심 챙기거나, 시간도 없고, 연애 하면서 밀고 당기는 거 피곤해서 못해먹겠다는 맘에도 없는 말로 위안을 삼죠.
그런데 영화 ‘팡팡’을 보면서 문득 사랑이라는 게 때론 참 피곤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그만인 것을, 뭘 그리 재고 따지고 계산하고 복잡하게 머리 굴려야 하는 건가 싶어서요. 팡팡과 알렉상드르는 분명 서로에게 끌리고 있어요. 그런데도 알렉상드르는 팡팡과 데이트할 때 키스는 커녕 그녀의 손조차 잡을 생각을 안 해요.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인 팡팡이 섹시한 몸매를 무기삼아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유혹하는데도 ‘우린 아름다운 우정을 가진 친구 사이’라는 말로 와장창 산통을 깨죠.
그러면서 뒤로는 안절부절 못 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몰라요. 팡팡이 세 들어 살 집에 무단 침입해서 수상한 동거를 시작하지 않나, 팡팡에게 눈멀어 약혼녀까지 버렸으면서도 팡팡은 ‘우정’이라고 허벅지 꼬집어가며 세뇌를 시키지 않나.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팡팡은 급기야 결혼한다는 연극까지 해대며 알렉상드르의 질투심 유발 작전에 돌입하잖아요. 오, 가련한 여인이여!
이 모든 영화 속 장면들을 아우르는(이 영화 최고의 매력이기도 한) 오프닝 시퀀스를 보면 새빨간 배경에 검은 실루엣의 남녀가 등장해서 껌 같은 것을 입에 물고 가까이 다가왔다 저 만치 멀어졌다를 수차례 반복하거든요. ‘밀고 당기기’의 상징이랄까. 아무리 연애가 기술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 프로페셔널한 게임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골치 아프지 않아요? 우리 좋으면 그냥 좋다고 말하자고요. 그건 헤픈 게 아니에요. 다만 솔직할 뿐이죠. 아무리 사랑이 우리를 미화시키고 왜곡시키는,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라고 해도 우린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 지겨운 밀고 당기기나 눈치작전 따위는 이제 그만!

안희연 학생리포터 elliott19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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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음악처럼]빛 좋은 개살구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

얼마 전, 취업한 선배를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요즘 삶에 낙이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남들이 부러워 할 만 한 직장을 가지고 그런 얘기를 하다니 배부른 소리로 들렸지요.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그럴 만 하다 싶어요. ‘취업’이 목표일 때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받지만 뭔가를 이루기 위해 열중하니까요. 취직을 하고, 일을 배우고, 적응을 하고 나면 다음엔 뭔가요? 통장잔고가 늘어나고 성과가 쌓인 후에는요?
돈도 충분하고 여자친구도 있고 좋은 직장도 있는데,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네요. 명함에 사용된 글씨체와 재질 따위나 따지며 잰 체 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자신보다 잘 나가고 세련된 명함을 가진 녀석이 참을 수 없어서 죽이는 그는 패트릭 베이트만, 27살, ‘아메리칸 사이코’라고 불리죠. 피 맛을 본 그는 이제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고상한 척은 혼자 다해서 살인을 하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반들을 설명하는데, 대중적인 곡을 희귀음반이라도 되는 양 고양되어 떠들어대죠. 영화에서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uston)의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Greatest love of all)’이나 필 콜린스(Phil Collins)의 ‘수수디오(Sussudia)’같은 곡들이 흐르지만 사운드트랙앨범엔 실려 있지 않습니다. 실린 음악들은 뉴오더(New Order), 데이빗 보위, 톰 톰 클럽(Tom Tom Club), 도웁(Dope)등의 곡이죠.
그럼, 영화 속 패트릭의 설명 중 하나를 들어볼까요?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Huey Lewis & The News)’는 처음엔 너무 뉴웨이브 적이더니 83년 ‘스포츠(Sports)에선 자기들 색깔을 찾았어.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앨범전체가 완전한 프로의 세계에 오른 거야. 엘비스 코스텔로와 비교되어 왔지만 휴이가 유머도 있고 훨씬 시니컬하지. 최고 명곡은 ‘힙 투 비 스퀘어(Hip to be square)야. 곡이 너무 쉬워서 가사도 안 들리겠지만 들어 줘야돼. 왜냐면 가벼운 느낌이 중요한 게 아니라 트렌드 자체가 중요하거든.’
패트릭은 오로지 껍데기에만 신경 쓰기 때문에 인기 많은 곡들을 따라서 좋아하는 것 뿐 입니다. 그래야 있어 보이거든요. 허영이란 항상 필요 이상의 것을 먹도록 만들지만 아무리 삼켜도 포만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비대해진 정신적 공허함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한 입에 집어삼킬지도 모릅니다. 그러기 전에 하루 빨리 인생의 낙을 찾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빈 껍데기만 남은 채 트렌드만 쫓는 사람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건 안돼죠. 아무렴.

정재은 학생리포터 jmandu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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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뉴스]지PD와 미자가 다시 만났을 때 外

지PD와 미자가 다시 만났을 때●

인기 시트콤 ‘올드 미스다이어리’가 영화로 변신, 후반작업을 앞두고 제작보고회를 가졌다. 이 작품은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주인공 엉뚱한 노처녀 미자와 연하남 지PD와의 연애담을 중심으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시트콤을 연출하기도 했던 김석윤 감독은 시트콤의 이름만 가져왔을 뿐 “전혀 다른 얘기가 될 것”이라며 “작위적이지 않은 코믹과 감동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미자 역의 예지원은 “미자의 속내가 드라마보다 더 풍성하게 표현됐다”며 기대감을 표현했고, 지PD역의 지현우는 “나를 많이 알게 된 작품”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 작품은 오는 12월 21일 게봉예정이다.

영화사 백두대간의 2007년 영화를 꽁짜로!●
예술영화 배급 전문 영화사 백두대간이 오는 14일 거장 키에슬로프스키 각본의 영화 ‘랑페르’개봉을 앞두고 ‘레드-블루-그린 3색 이벤트’를 진행한다.
레드는 개봉 첫 주말 관객에게 제공되는 무료 타롯점이고, 블루는 영화평론가 이상용과 함께하는 ‘랑페르’ 작품론과 키에슬로프스키 감독론 영화강좌 다. 마지막으로 그린은 2007년에 개봉하는 영화사 백두대간의 영화시사회! 백두대간의 전용관 시네큐브 홈페이지 www.cinecube.net를 참고.
세기의 미남 알랭 들롱 회고전●
세기의 미남, 세계적 배우, 프랑스 남성배우의 대명사 알랭 들롱의 회고전이 ‘신화로의 귀환’이라는 부제아래 오는 15일부터 2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는 한불수교 12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자리로 알랭 들롱이 걸어온 40여 년간의 영화인생을 담았다. 그의 초기작이자 맷 데이먼 주연의 리메이크 작 ‘리플리’로도 잘 알려져 있는 ‘태양은 가득히(사진)’부터 장 뤽 고다르, 조셉 로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루키노 비스콘티 등 대가들의 작품에서 활약한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www.cinematheque.seoul.kr를 참고.
하이퍼텍 나다의 일곱 번째 프로포즈●
예술영화 전용관 하이퍼텍 나다가 그해의 최고작을 선별해 매년 12월 선보이는 ‘나다의 마지막 프로포즈’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국내작품으로는 무속인의 삶을 따뜻하게 그려낸 ‘사이에서’,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 멜로 ‘후회하지 않아’ 가 있고, 국외작품으로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크래쉬’ 선댄스의 호평을 받은 ‘미앤유앤에브리원’ ‘스테이션 에이전트(사진)’, 등 현재 17편이 상영 확정됐다. 이번 행사는 오는 22일부터 열리며,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www.dsartcenter.co.kr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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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스페셜]저 이제 독립할래요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세계, 저의 세계, 영화의 세계 모두 시간과 공간을 읽다보면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죠. 오늘은 그 중에서도 영화 속 공간을 파고들었습니다. 이번 방학엔 영화를 따라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의 새로운 경험 어떠세요? 그 계획을 응원할 겸 대학내일 문화팀이 먼저 떠나봤습니다.
오늘만큼은 연약한 날 용서해줄래요
‘니라이카나이로부터 온 편지’의 후키
ニライカナイからの手紙
나,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동경에 있어도 말야 왠지 시간만이 ‘앗!’ 하는 순간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고, 종종 나 뭘 하고 있는 걸까 싶기도 하고, 왜 여기에 있나 싶기도 해.

할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문 사진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도쿄 행 열차에 몸을 실었어요. 힘든 어시스턴트 일을 시작한지도 벌써 수개월 째. 이제 어지간한 잔심부름에는 도가 텄고, 웬만한 잔소리들에는 무신경하게 반응할 만큼 적응도 됐죠. 그래요. 내가 원해서 왔어요. 가라고 등 떠민 사람도 없는데 내 발로 내가 왔어요.
처음엔 모든 게 완벽할 줄 알았단 말예요. 왜냐면 나에겐 절대적인 신념이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철썩 같이 믿었으니까. 짐을 꾸려 정든 집을 떠나면서 처음 느꼈던 흥분, 기대와 떨림, 과열된 용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갔어요. 현실은 무거웠죠. 하루하루가 고된 일상이었어요. 세상이 내 맘처럼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그럴 때마다 내가 꿈꿔왔던 모든 것들이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처럼 희미해져만 갔죠. 내 꿈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거라고, 잘 하고 있다고 칭찬하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어요. 그렇게 악착같이 눈물을 참았어요. 하지만 고단한 몸과 외로운 마음이 날 자꾸 연약하게 만드는 걸 어떻게 해요? 연락도 없이 찾아온 고향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동안 감춰왔던 여린 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미네요. 내일이면 사그라질 마음이고 취기 어린 앙탈이라는 걸 잘 알아요. 그래도 오늘 만큼은 날 용서해 줄래요.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일일까’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고민하면서 충분히 힘들어할 수 있게.

빛나는 거짓, 그리고…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윌리엄
Almost Famous
그래도
재밌었어요.

널 멋진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니까. 하지만 내가 봐서 아는데 넌 안 멋져. 잘 생긴 사람들은 알맹이가 없고 그들의 예술은 오래 못가. 그들은 여자를 얻겠지만 우리는 똑똑하지. 네가 그들을 친구로 생각하는 건 알지만,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다면 정직하고 잔인해야해.
록큰롤에 심취한 15세 소년 윌리엄은 우연한 기회에 록 매거진의 편집장이자 저명한 록 비평가 레스터를 알게 되었고, 신인 뮤지션 ‘스틸워터’의 투어에 동행하면서 롤링스톤지의 특집기사를 작성할 것을 명 받습니다. 록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뮤지션에 대한 일방적인 동경은 술, 마약, 여자로 들끓는 그 둔탁한 세계를 꿈과 환상의 나라로 왜곡시켰죠. 엄마의 암묵적인 허락 아래 투어가 시작됐지만 윌리엄은 엄마의 전화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라는 훈계와 강요가 계속됐죠.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지금 윌리엄은 ‘때 묻은 가치와 썩은 뇌세포가 판치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으니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윌리엄은 그들과 매우 가까워지지만, 동시에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진실과 마주하게 되면서 심각한 혼란에 휩싸입니다. 유명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보다 더 슬픈 건, 비행기가 난파되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아주 위급한 순간, 그런 막다른 삶의 모서리에 다다라서야 진실을 쏟아 붓는 거짓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이었으니까요. 비로소 그는 깨닫습니다. 자신은 롤링스톤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유명밴드가 아니라 ‘음악의 어떤 점을 사랑 하는가’라는 물음에 “To begin with…, everything”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한 뮤지션을 원했다는 것을. 윌리엄은 평범한 15세 소년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엄마로부터,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한 뼘 더 성장했음이 분명해요.
Bittersweet Young
‘길버트 그레이프’의 길버트
What’s Eating Gilbert Grape
스물한 살 길버트의 삶은 별 볼 일 없습니다. 지루한 일상에서 처박혀 사는 길버트는 그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캠핑족들을 부러워하며 일탈을 바랄 뿐이죠.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짐은 바로 가족이에요. 자살한 아버지, 그로 인해 걸식증에 걸린 거구의 어머니, 열여덟살 생일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르는 정신박약 남동생 어니, 집안일은 쳐다보지도 않는 철부지 여동생 엘렌 등. 점차 무너져가는 집처럼 길버트에게 가족은 이토록 버거운 짐인데, 그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전국을 자유롭게 떠도는 소녀 베키를 만나면서 길버트의 삶도 희망으로 점차 변화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살아계시면서 사랑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가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나고, 무너질 것만 같던 집도 불태워버립니다. 이제 길버트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요. 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어쩌면 긍정을 꿈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상실이 비로소 그에게 자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향할 수 있는 건강한 희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죠. 길버트는 열아홉 살이 된 어니, 사랑하는 베키와 함께 ‘웃으며’ 떠납니다. 마을을 떠나는 그들의 모습은 영화의 처음 시작과 같은 구도로 보여집니다. 길버트는 희망의 세계로 떠나고 있는 것이겠지요.
엄마에게 말해요!
‘워터보이’의 바비
The Waterboy

풋볼이 좋아요! 난 풋볼을 할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예요! 그녀도 만날 거예요!

바비 부쉐! 지금 엄마한테 말대답 하는 거야?

서른 한 살 먹은 바비 부쉐는 미식 축구 선수들에게 양질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까다로운 수질 검사도 마다하지 않는 프로페셔널 워터 보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시하는 괴물같은 선수들과 거만한 감독은 급기야 바비를 해고하기에 이르는데, 이게 웬걸! 그의 엄마는 이 슬픈 사실을 무척이나 환영합니다. “바비, 이제 워터 보이는 그만두렴. 하루 종일 엄마와 있자.” 그의 엄마는 오래 전 남편에게 버림받고 세상이 무서워 아들과 함께 숲 속에 숨어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아들이 학교에 가는 것도, 직장을 갖는 것도, 여자친구를 만나는 것도 모두 무섭습니다. 착한 아들 바비에게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지는데, 어느 실패한 미식축구감독이 바비에게 뛰어난 능력을 발견, 선수로 뛸 것을 권유합니다. 이 팀은 대학소속이어서 대학생이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죠. 영화는 이때부터 ‘루저들의 합창’을 보여주려 애쓰는데 여전히 그의 엄마가 문제군요. 집착은 분노, 협박으로 이어집니다.
타고난 코미디언 아담 샌들러 주연의 이 영화는 웃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부모로부터 어떻게 정신적인 독립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예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엄마의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던 바비는 오랜 시간동안 엄마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만,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이 생기자 드디어 반항을 감행합니다. 엄마는 한동안 소리를 지르지만 결국 그런 아들을 응원하게 됩니다. 바비의 용기가 스스로의 정신적 독립과 동시에 엄마의 정신적 독립을 이뤄낸 것이죠.
떠나볼 만 하지 않나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의 자비에
L’Auberge Espagnole

그 뒤에 난 1년 여정으로 스페인에 가기로 결심했다. 전엔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젠 그 점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고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스페인으로!

요즘 같은 불경기에 안정된 미래를 보장 받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거칠고 혹독한 훈련을 해야 되지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많은 친구들이 태평양 건너 머나먼 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드디어 이 친구가 오는 구나 싶으면 이번엔 또 저 친구가 간답니다. 다들 취업준비에 졸업준비에 너무 너무 바빠요. 프랑스 대학생 자비에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오면 재경부에 취직시켜주겠다는 아버지 친구 분의 권유에 스페인 행 비행기를 탑니다. 사실 그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지만 ‘미래보장형 직장’을 위해서 현실적인 선택을 한거죠.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한 서류 작업에만 3개월이 걸렸고, 사랑하는 여자친구 마르틴도 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을 가장 겁에 질리게 하는 것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언어, 문화, 생활방식, 모든 게 다른 곳에서 혼자 일궈나가야 하는 나날들인걸요.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있는 이유는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우리와 같은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날아온 친구들 웬디, 알렉산드르, 토비아스, 라스, 이자벨, 솔레다드와 함께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하고 싸우고 웃다보면 어느 새 알게 될 거에요. 그곳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밝은 미래’를 위한 조건적 여정이 아닌, 스스로를 시험하고 더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성숙의 과정이라는 것을요. 덧붙이자면, 우리의 주인공 ‘자비에’에게는 진정 원하는 일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네요. 어때요, 떠나볼 만 하지 않은가요?
“이참에 싹 정리하자고”
‘애니씽 엘스’의 제리
Anything Else
어떻게 살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많지. 이래라 저래라 말들도 많아. 그럴 땐 맞장구만 쳐주고 너 내키는 대로 해. 독창적인 글을 쓰려고 애쓰되 표절해야 한다면 최고를 따와. 인간들과의 관계보다는 언제나처럼 나 자신을 믿고 사는 게 안전해.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어서 어떤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는 게 과연 있나 싶어요.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더 그럴 듯하게 설득시키느냐에 달려있는데, 풍자의 대가 우디 알렌의 접근 방식은 조금 특이해요. 비이성적이고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네요. 그가 영화 속에서 늙은 코미디 작가 도벨로 변신해 젊은 작가 제리에게 하는 말을 들어볼까요? 황당 그 자체 입니다. 자기방어를 해야 한다면서 총을 사라고 권하고, 매니저와 결별 할 것을 종용하고, 여자친구와도 헤어지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모든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자기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가서 일하자고 하네요. 그래서 다 정리했는데 정작 도벨은 일을 저질러서 같이 떠나지도 못해요. 그런데 더 우스운 건 말 많고, 말썽 많은 도벨의 말을 듣고 싶다는 거예요. 원래 사람을 떠나지 못하는 성격인 제리가 설득을 당한거죠. 그가 어리버리한 면이 있어서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험난한 세상, 자기 자신을 믿고 행동하라는 말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많잖아요. ‘나’를 믿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주위사람들에게 의지하는 건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어요. 누구에게나 홀로서기를 하는 건 어렵고 두려워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사는 게 다 그렇죠, 뭐’라는 이 한마디에 숨어서 힘내는 수밖에요.

대학내일 문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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