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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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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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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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치가 유시민의 가장 큰 장점은 수려한 글솜씨와 더불어, 자신의 생각을 활자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 아닐까 싶다.

 

  <죄와 벌>,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 선언>, <인구론>, <대위의 딸>, <맹자>, <광장>, <사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카타리나 불룸의 잃어버린 명예>, <역사란 무엇인가> 등 여러 저작을 빌어 역사와 세계의 지향점, 진보적 가치의 의미, 평등과 자유의 이면, 인간다움과 빈곤의 문제 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이란 부제가 담고 있듯이, 청춘들이 읽고,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과 의지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은 <맹자><카타리나 불룸의 잃어버린 명예>. 두 서적을 통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울분, 진짜 보수가 가져야할 가치와 태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에둘러 표현한 점.

 

   직설적인 화법이 아니면 청년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며, 정련되지 않은 훈계조로 참여와 관심 독려하는 대신, 먼저 앞선 지성인들의 활자와 주장을 빌어 생각 거리를 던진 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화두로 자연스럽게 견인하는 세련됨이 녹아있는 책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정치가란 저자의 신분 때문에 제시된 저작들이 저자의 정치적 의도대로 재구성되어 전달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68혁명에서 공산당의 배신은 극우 언론만큼 치명적이었지만, 지면의 한계 탓인지 언론의 병폐만 그려졌을 뿐 다른 지점은 부각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미덕은 청춘들에게, 바꾸고 싶은 세상에 대한 상을 그리는 밑그림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 아닐까 싶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그려나가고, 문제 삼아야할지 모를 때, 최소한의 문제 의식이라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독서 목록을 찾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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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뒷길을 걷다 - 김인숙의 북경 이야기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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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북경에 가기 전에 주요 명소와 역사적 배경을 알아두면 좋겠다 싶어 골랐던 책. 작가는 특유의 감성으로 소소한 이야기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세 살에 황제가 되어 쉰 네 살에 일반인이 된 푸이와 완룽의 삽화가 인상 깊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한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해 마약까지 손대다가 끝내는 생을 마감한 완룽. 사진 속의 그녀는 여리한 소녀 같다. 남 부러울 것이 없었으면서도 사랑 없는 인생은 그녀에게는 전혀 가치가 없었던 모양이다. 반면 아무 것도 없이 궁에 들어왔지만, 지독한 권력욕을 불태우며 기어이 권좌를 사수한 서태후는 사랑 없는 인생도 가능하다는 듯, 전권을 휘둘렀다.

 

   똑같은 궁이 누군가에게는 감옥이 되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지상 천국이었다니, 역사와 인생의 아이러니는 서태후와 완룽의 대비된 인생 속에서 더욱 교차되는 느낌이다.

 

   자금성, 스치하이, 이화원, 만리장성, 류리창, 성당과 사찰, 천단, 명십삼릉과 청 황릉 등을 가로지르며 역사적 배경과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를 적당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은 두 번 읽는 것이 좋은 듯 싶다.

 

   가기 전에 읽어 북경의 그 자리에서, 활자의 기억을 더듬으며 감상의 깊이를 더 하는 도구로서 한번, 다녀와서 북경의 그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느꼈던 것을 작가와 대화하듯이 상기하면서 읽는 것 한 번..북경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류리창과 명십삼릉 등을 못 둘러본 게 이내 아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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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열광 - 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
한재각.강양구.김병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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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태는 정치적 민주주의 이후 생활 속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 민족주의가 일방적으로 교차하고, 거기에 뿌리 깊은 성과지상주의가 중첩될 때, 전문가와 기득권의 강고한 동맹이 어떻게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한편의 드라마처럼 보여준다. 특히 비판과 성찰의 문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전문가의 폭주를 가로막을 사회적 방안이 거의 없다는 점을 뼈아프게 상기시키는 삽화이기도 하다.

황우석 사태의 이면에는 줄곧 정부의 꾸준한 비호와 언론의 지지가 있었다. 1999년 복제소 영롱이, 진이가 탄생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노고를 친히 치하했고, 이때부터 황우석 교수는 각종 정부 부처의 굵직한 위원회, 연구 지원 등을 두루 섭렵하는 물꼬를 트게 된다. 2000-2003년까지 이종간 배아복제, 복제돼지, 광우병 내성소 연구 등과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2004-2005년 <사이언스> 논문이 조작되고, 2005년 11월 <PD수첩>에서 의혹을 제기했을 때도,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 유수의 정치인이 ‘국익’의 이름으로 그를 지지했다. 물론 때마다 언론의 한결같은 찬사와 열화와 같은 보도가 함께 했다. IMF이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고민 속에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는, 정부의 21세기 신산업 정책의 핵심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동시에 교육과 의료의 개방을 끊임없이 요구했던 재계의 요구와도 맞물리면서 병원의 영리법인 도입, 민간 의료보험 등 의료 민영화를 정당화하는 촉매제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연구 외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원을 아낌없이 받으면서, 성과주의는 더욱 부채질 되었고, 민주화되지 않은 과학계의 이면은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윤리마저 무너뜨리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연구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정치인, 교수가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렸고, 연구에 매진한 대학원생들이 제외되는가 하면, 난자 확보를 위해 연구원의 난자를 사용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생명윤리의 관련 법률이 제대로 사회적으로 논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줄다리기 하는 동안 여성의 건강권에 대한 담론은 제대로 형성되지도 못한 채 난자가 연구에 마구잡이로 사용되었다.

연구노트의 부실, 연구 과정에서의 윤리적 기준 준수 미흡은, 오히려 연구 결과 조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디씨인사이드의 BRIC과 프레시안 등의 비판을 계기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애초에 줄기세포 복제는 이뤄진바 없고, 자료를 겹치고 늘려 조작한 것으로 판명됐다. 황우석 교수팀의 중요한 연구 결과가 논문이 아닌 주로 언론을 통해 발표됐다는 점도 황우석 사태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차분히 연구 논문을 검증하고 검토하는 대신, 여과 없는 찬사와 옹호 일색으로 언론까지 뒷받침되자, 과학기술과 기득권의 동맹은 철저히 은폐되었고, 난치병 치료에의 희망과 국익·민족애가 주된 국민적 정서로 굳혀졌다.

저자들의 진단 대로, 황우석 사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은 열광 아니면 침묵뿐이었다. 다양한 의견과 진실된 소통이 민주적인 절차와 과정을 거쳐 성찰의 담론으로 되새김질 되는 대신,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극단적인 도식 속에서 과학의료기술의 전문성, 경제적 부가가치, 애국심은 절대로 깰 수 없는 성역이 되었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고 구호만 난무하는 무기력한 민주주의는, 성찰과 비판을 가로막아 전문가와 기득권의 동맹을 더욱 강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황우석 사태가 남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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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탄생 - 해방 한국전쟁기 한국인의 질병과 위생 의료
전우용 지음 / 이순(웅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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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75만 여명의 일본인이 조선을 빠져나가고 정치, 경제 등 사회 전 분야가 대거 열리면서, 새로운 삶과 꿈에 부풀어 유랑하는 군중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추위, 굶주림, 비위생적인 생활환경 속에서 미생물의 번식도 활발해졌고, 두창, 티푸스, 콜레라 등은 물론, 결핵, 성병, 마약중독, 기생충 감염, 나병, 정신질환이 창궐했으며, 이념 대립, 사회 인프라 부족으로 각종 사고와 테러도 끊이지 않았다.  

  미군정기, 행정의 토대가 취약한 상황에서 치안과 위생 행정이 적발, 차단, 격리, 제거의 유사한 목표 아래 취급되었고, 초기에는 경찰이 위생 방역 등을 담당했으며, DDT세례가 수시로 이루어졌다. 미군은 자국 군인의 안전 보호를 위해 모든 사회 문제를 보건 문제로 취급한 데 비하여, 한국인들은 먹고 사는 것이 먼저였으므로, 보건위생을 부차적인 사안으로 취급했다.  

  해방 이후 좌익, 우익 모두 보건의료 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인 보건의료정책의 책임자였던 이용설은 제도나 시설보다는 인력에, 환자보다는 의사에, 의료 수요보다는 의료 공급에 관심을 쏟았다. 서양식 의료를 제공한 병원은 일본 제국 의료와 결합한 병원, 미국 선교회에 의해 설립된 병원, 조선과 대한 제국 정부가 설립한 국립 병원들이 있었는데, 미군정기, 미군은 의사가 부족한 상황이므로 병원을 늘릴 필요가 없다고 보고, 의사의 자질 향상을 우선 과제로 꼽았다.  

  그러나 의사들은, 점차 하는 일은 많으나 박봉인 관공립병원보다는, 의료 수요 증가에 따라 진료소를 차리는 것을 선호했고, 개업의사 전성시대를 열었다. 국공립병원의 공공성이 열악해지면서, 힘 있는 부서들이 운수병원, 국민보건병원, 경찰 병원 등 독자적으로 병원을 개설했다. 공공의료 와해에 대한 여론의 분노를 무마시킬 대안으로 보건소가 제시되어, 미군정이 주요도시 6곳에 국립 보건소를 설치했으나, 이 역시 미흡했으며, 보건소법이 제정되었으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문화되었다.  

  농어촌에서는 한지의사들이 비싼 치료비를 받고 효과가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치료를 시행했으며, 미군정이 주요 병원에 의약품을 원조했으나 통제가격으로 자유판매 한다는 원칙 하에서 오히려 약값이 치솟고, 가짜약이 판을 쳤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문명의 시혜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양의들에게 희소가치를 부여했고, 전통 의사들은 의생으로 이름을 붙이고 식민지 보건의료 행정의 말단에 배치했다.  

   의사의 자격은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 외국의사로 총독부의 인정을 받은 사람, 관 지정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 개인 병원에서 조수로 일하다 어깨 너머로 배워 의사가 된 사람 등이 뒤섞여 의사 자격이 달라 서로 차별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터, 이에 미군정은 의학교육을 미국식 기준으로 표준화하려 했다. 특히 전문학교와 대학을 통합하려는 시도 속에서 의학교육의 연한을 통일하겠다는 구상이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안으로 확정되면서, 논리적, 이념적, 물리적 충돌이 사회 전반을 휩쓸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유일의 의사 단체였던 조선의사회는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이 있었으나, 이념적 통합을 이룬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대한의학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분과 학회 구성에 주력했다.  

  한편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추위, 굶주림, 헐벗음이 시작됐고, 전염병이 더 창궐했으며, 나병, 결핵, 성병 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미군은 전쟁 중에 헬리콥터 후송과 이동외과병원을 운영하였고 후방에서는 대규모의 종합병원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국군은 여건은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모델을 따랐다. 

   1951년 이후 군 병원은 종합병원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병종별, 상태별 환자분리, 해당 전문의 배치, 협진, 치료 및 회복까지 책임지는 현대적 종합병원을 체험하게 됐다. 초기에는 절단 수술로 일관했던 한국의 의료 기술도 전쟁 중 많은 환자를 감당하면서, 휴전 무렵에는 상당한 수준의 의료 기술을 갖게 됐다. 전쟁을 치르면서 의료 수요가 급증하자 돌팔이 의사도 횡횡했다. 한편 1951년 국민의료법이 국회에 전격 상정되면서, 한의와 양의에게 같은 자격을 주는 것이 결정됐다.  

  한국인은 해방, 전시 동원 체제를 경험하면서, 청결과 위생의 담론을 내면화했다. 신체와 정신이 모두 군과 국가의 전력을 구성하는 상황에서, 감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감시를 시도했으며, 국가의 통제와 훈육에 순응하고, 국가가 요구할 때는 언제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익숙해졌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된 항생제들은 한국이라는 초대형 소비시장을 만났고, 일본은 의약품, 의료기기 제조·생산의 전초 기지가 됐다. 의약품은 부피가 작고 값이 비쌌기 때문에 현금처럼 유통되었고, 뇌물로도 사용됐다. 다치면, 일단 페니실린부터 맞은 군인들의 경험이 민간으로 전파되었고, 의사들도 완벽한 치료보다는 빠른 치료에 치중했으며, 항생제로 빠른 효험을 본 환자들은 약에 대한 자신들만의 “상식”을 만들어냈다. 즉 민간요법으로 약초를 쓰던 방식으로 의약품을 쓰기 시작하면서, 약은 한국인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는 품목이 되었다.  

  역사적 대혼란을 겪으면서, 한국인의 몸과 질병에 대한 담론은 철저하게 대상화된 측면이 있으며, 공공의료가 취약할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급격하게 시장 위주의 공급 구조가 구축되었고, 약에 의존하고, 약을 선호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임을 확인하게 됐다. 왜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논의할 때,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지,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상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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