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브리치 세계사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17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클리퍼드 하퍼 그림,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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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평가하는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을 통해 사고나 관점의 전환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허튼 생각을 즐겨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나는, 종종 현대인의 우울은 너무 세미한 들여다보기의 습관 내지는 문화가 일부 일조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볼  때가 있다. 온갖 미디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현재'의 모습을 뒤로 하고, 잠깐만 멀리서 또는 높이서 '지금'을 조망할 수 있다면 한결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한껏 우울하고 힘겨울 때 역사서를 읽으면 어떨까. 


이 책은 누가 뭐래도 그 허튼 생각을 뒷받침하는 굳건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줌 앤 아웃이 명확한 장점이 있다. 세세하게 시대를 구분하고, 특징을 비교하며 어떤 교훈을 끌어내는 방식의 역사서가 아니라 저자의 손녀가 저자의 서문을 인용한 대로, 학교에서 읽히는 교과서와는 전혀 다르다. 저자가 손자, 손녀들에게 들려주듯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 있어 이해하기 쉽다. 


그러므로 이야기 형식의 장점을 적절하게 살려낸다. 인위적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대신 시대 전환의 배경과 현상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화자의 재치 있는 평가가 이야기에 첨언되어 사뭇 진지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유쾌하게 전환한다. 역사는 암기로 기억해야할 학문이 아니며, 사람들이 살아가고, 싸워내고, 지켜냈던 이야기라는 점도 꽤 근사하게 인식시킨다. 


가령 왕과 교황의 다툼 이면에 놓인 토지 분배와 사제 임명의 권한 분쟁이라든지 오스트리아의 뒤늦은 제국 확장 의지와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제국을 세운 비스마르크의 분명한 목적 의식, 나폴레옹과 그 형제들의 지배 등 각 장마다 독서의 흥미를 유발하는 숱한 뒷 이야기가 숨어 있다. 


다만, 세계사라기 보다는 유럽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저자에게 조금만 더 풍성한 시간과 여유가 있어 한, 중, 일의 역사를 다루거나 동남아시아나 남미 역사 등을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상상도 하게 된다. 


역사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는 승패, 흥망의 어떤 원리가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우연한 기회와 뜻하지 않은 영웅의 출현으로 한순간에 뒤집히기도 한다. 게다가 100년도 못 사는 인간들이 얽히고 이어져 장구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어떤 힘에 압도되는 것 같은 전율도 느끼게 된다. 돌아보면 억울하고 원통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한 데 모여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들려줄 짜릿한 이야기가 될 것인데. 

이 책은 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 교과서를 대신할 의도로 집필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학교에서 읽히는 교과서와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나는 독자들이 필기를 하고 또 이름이나 연대를 외워야한다는 부담 없이 느슨한 마음으로 읽어 나가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꼬치꼬치 질문을 하지 않으리란 점도 약속하겠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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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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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보면, 코로나 팬데믹의 서막은 전혀 요란스럽지 않았다. 2020년 설 연휴 동안 나는 가족들과 함께 미리 계획해 두었던 대만 여행을 떠났고, 현지에서도 1~2명 정도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만 간간이 들릴 뿐, 대만도 거의 사회적인 동요가 없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일상에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아 2월 중순에 이르자 코로나는 본 모습을 삽시간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31번째 환자가 발생한 이후부터 코로나의 공포는 유례없이 두드러졌고, 급기야는 학생들의 전면 개학이 취소되고 비대면 학습이 전격 도입되었다. 일부 회사 역시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행사는 취소되었고 거리는 텅텅 비었으며, 가게마다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큐아르 코드, 백신 같은 단어들이 곧 일상을 지배했다. 그것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활의 규범으로 자리를 잡아 새로운 행동과 모습의 기준으로 붙따랐다. 


   코로나의 횡횡은, 카뮈의 <페스트>처럼 정부와 국민의 당혹스러움, 일부의 이기적 또는 이타적인 행태, 고립과 회피, 망각과 원망, 저항과 패배, 성실과 과로, 희생과 작은 승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유다른 재앙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쨌든 총력을 다하여 2년여의 사투를 치러냈고, 마침내 코로나 확산의 저지선을 꺾은 듯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일상이 다시 회복된다는 설렘이 충만하기도 전에 감염력이 더 강력한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한다는 맥 빠지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편 형편을 추슬러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대비해야 한다는 각성이 일기도 한다. 누군가는 연대를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시스템 개선을 주장하며, 누군가는 비대면 온라인 사회로의 이행을 화두로 던지면서 코로나 사회의 출구 전략을 제시하지만, 무언가 핵심이 빠진 듯 공허한 울림처럼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문가들은 세련된 언어로 코로나를 설명했지만, 현장에서 경험한 실체는 미묘하게 달랐으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발언은 표출할 권리를 얻지 못하거나 종종 가볍게 무시되었다. 


  나름대로 끊임없이 마주하고, 항거하며, 이겨내려 노력했지만, 제 속성대로 신출귀몰하며 기어이 공포와 불안을 흩뿌린 코로나를 앞에 두고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코로나는 숨 고르듯 한 번의 파고를 넘자 다시 기지개를 켜니, 의지는 스멀스멀 해체되고 무참함은 전신으로 스며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최선을 다했으니 그뿐인가. 차라리 <페스트>에서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감염병이 다시 갑자기 사라질 것을 기대하며, 감염병은 잊고 될 대로 되어 가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 지혜일까. 걷잡을 수 없는 의문들 때문에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러므로 우연히 읽게 된 <다섯째 아이>의 메시지는, 골칫거리 코로나 앞에서 잔뜩 움츠러든 내게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신선하게 다가와,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참이나 어떤 울림이 가슴 깊은 곳에서 잘그랑대는 것 같았다. 


  소설의 줄거리는 꽤 단순한 편이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직장 파티에서 만나 결혼하는데, 이들은 당시의 개방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옛 신념을 고수하기라도 하듯 다소 보수적이다. 소박한 가정을 이루어 아이들을 낳아 단란하게 사는 것이 꿈인 이들 부부는 형편보다 무리해서 저택을 구입한다.  네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경제 또는 물리적인 버거움은 다소 있었지만, 데이비드의 이혼한 아버지, 어머니 가정, 해리엇의 어머니와 자매 등이 휴가 기간에 저택을 방문하고 교류하는 등 부부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더욱이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아들을 돕고, 육아를 위해서 해리엇의 어머니 도로시가 저택에 상주하면서, 이들 부부의 어려움은 좀처럼 절망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행운처럼 느껴질 정도다.  적어도 이들의 행복은 다섯째 아이 벤을 낳기 전까지는 어떤 근본적인 삶의 원리를 획득이라도 한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 벤의 등장은 일순간에 가정의 평온을 바스러뜨렸다. 


  해리엇은 벤을 임신하면서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한다. 네 명의 아이를 낳았던 그녀는 예전과 다르다며 담당 의사에게 유도 분만을 요구하지만, 의사는 자신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해리엇은 “왜냐하면 선생님은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 않는다. 전문가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규정은 순식간에 그녀의 다르다는 절규를 압도한다.

 

  벤은 성장 과정 역시 남달랐다. 기괴한 모습의 아이는 여느 아이들과 달리 난폭했고, 고성을 질렀으며, 아이들과 부부, 나아가 친척들에게조차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의사는 여전히 벤은 신체적으로 정상이며, 말이 느릴 뿐이라고 판단했지만, 마침내 데이비드는 이전의 가정을 되찾기 위해 벤을 어딘가로 보낸다. 벤의 증발과 함께 가족은, 작가의 표현대로 잠시 물에 불린 꽃처럼 피어나지만, 해리엇은 이내 어떤 의무감처럼 벤을 찾아 나선다. 


  데이비드에게서 받아든 주소지를 무조건 찾아간 해리엇은 음산한 수용소 같은 곳에서 짐승처럼 방치된 벤을 집으로 다시 데려온다. 벤의 재입성은 가족을 천천히 와해시킨다. 데이비드는 점점 더 일에 몰두하고, 네 아이들은 제 삶을 찾아 제각각 집을 떠난다. 해리엇은 간간이 수용소에서의 기억을 끄집어내 가까스로 벤을 통제하는 시늉만 낼 뿐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돌봄에 지친 해리엇은 흉측해진 정원을 돌보기 위해 존이라는 청년을 고용하고 이후 빈둥거리며 떠돌아다니는 존과 무리에게 벤의 돌봄을 맡기는데, 유일하게 벤은 그들에게 마음을 붙인다.  이런 와중에 학교에 입학한 벤은, 학교로부터 거부 내지는 방출될 것이라는 해리엇의 예상과는 달리, 놀랍게도 느리지만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아이라며 무사히 진학까지 한다. 


  존이 떠나고, 상급학교에 진학까지 하면서 벤은 어떻게 아이들과 소통했는지 모르겠으나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려 저택을 점차 점거한다. 그들은 냉장고를 한껏 털어먹거나 어디선가 음식을 사 와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채 저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일쑤여서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저택을 팔고 단둘이 새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운다.  해리엇은 벤의 등장을 신의 형벌, 우주의 진화 등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해석해보려 하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소설은 그녀가 자신들이 저택을 떠나면, 벤은 무리와 함께 갱단처럼 지내다 대도시 지하 세계로 내몰려 거기에서 우두머리로 살아갈 것이라고 예상하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다복한 중산층 가정에 벤이라는 기묘한 아이가 출생하고 그로 인한 가정의 굴곡진 변화를 담담히 그려낸 소설의 단순한 줄거리와 달리 작가는 곳곳에서 허를 찌르면서도 대담한 시선과 질문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


  가장 파격적으로 느껴진 대목은 ‘벤’에 대한 규정과 인식의 문제였다. 벤을 직접 임신하고 양육하는 해리엇의 목소리는, 의학이나 교육의 공식적인 전문가의 규정 앞에서 무용지물로 여겨진다. 작가는 나의 오롯한 경험일지라도 전문적인 판단과 용어로 치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일지라도 인식되거나 인정되지 않는 현실의 좌표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실존이나 존재는 전문가적 식견으로 재구성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그의 인식 자체로 표출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질문한다. 


  이와 더불어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평행선을 달린 또 다른 질문은, 그렇다면 경험하는 것이 곧 올곧게 인식하는 방식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벤’이라는 유례없이 새로운 존재의 출몰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의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식된다. 데이비드는 유전자의 변화로, 해리엇은 우주의 진화까지 들먹이면서 벤을 이해하려고 하고, 아이들과 친척들도 나름의 생각대로 벤에게 접근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벤에 대한 ‘공포’, ‘적의’에만 머물러 있다. 놀랍게도 소설에서 각자의 인식은 대화나 만남 등에서 소통되는 것 같지만, 전적으로 각자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따라서 해석도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지금껏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험, 지식, 인격 등을 총동원하여 벤을 바로 보려 하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보기에’ 번번이 좌초한다. 


  오히려 벤은 허랑방탕한 존과 무리, 개념 없이 들떠 있는 불량한 녀석들 속에서 어울려 다니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그들이 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자세히 그려지고 있지 않지만, 그 어울림 속에서는 벤에 관한 규정과 인식이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언뜻 벤과 함께하는 것 같지만, 벤은 일종의 사물처럼 하필 그들과 함께 동일한 시공간을 동시에 점유한 것일 뿐 과연 함께 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또 눈여겨본 대목은, 다양한 시선의 교차 속에서 정작 벤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벤은 숱한 규정과 인식 속에 머물러 있거나, 어떤 물리적 존재로서 사물인 양 함께 하는 것으로 관찰되고 있을 뿐, 벤 자체의 목소리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몸짓, 소리, 행동은 소설 곳곳에서 내내 특유의 일관성을 갖지만, 그 누구도 그를 ‘바로 보지 않기에’ 각각의 공동체와 대비되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겨우 괴성이나 단답형의 응답만 가능한 것으로 묘사되는 벤을 보면서, 전지적 시점에서 전말을 이끌어온 작가가 의도적으로 벤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배제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장치는 독자마저 겉도는 관찰자로 머물게 하면서 벤의 행동, 모습, 소리 등을 더욱 생경함으로 점철하는 효과로 나타나, 한껏 이상하고 기괴하며 섬찟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으므로.


   벤은 분명히 자신으로부터 배태되었지만, 그 새로운 존재는 내 통념과 상식, 예측을 벗어나므로 타도와 통제의 대상이며, 그러므로 아웃사이더들과 어울리며 내가 머물러 온 안온 너머의 지대에만 머물기를, 그리하여 내가 꿈꾸던 화평과 행복을 더 이상 침습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해리엇의 간절함은 과연 그녀만의 소망일까. 


   작가는 지독하고도 집요한 추적을 통해 중산층 가정에의 희구가 주는 환상 또는 신념을 순간 깨뜨리면서, 돌발 상황이나 뜻밖의 존재를 마주할 때 동시에 저마다 다른 인식, 규정을 쏟아내기에 앞서 있는 그대로를 편견 없이 보며, 올곧게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만 같았다. 


  낯설고 새로운 존재를 그대로 관찰하고 이를 토대로 인식하되, 편벽진 의식에 기댄 개별적인 인식이나 규정의 고립을 넘어서서, 진정한 소통과 교류를 통해 불완전하더라도 어떤 공통의 상을 확립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독서를 끝내고 죽비 같은 작가의 일침에 코로나를 마주하며 표류했던 마음이 바스스 다시 일어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설을 읽은 후 전율했던 까닭은 벤과 코로나가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는 벤처럼 어느 순간 일상의 평온을 파고들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처럼 코로나를 마주하며 당혹했고, 어떻게든 제어하며 떼내려 했다. 곳곳에서 각자 다른 감성과 평가로 경험한 코로나의 인식은 공포와 불안을 증폭시켜 제대로 공유되지 못했고, 전문가의 규정만이 꽤 그럴듯한 해석인양 덥석 수용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롭고 낯선 모습으로 등장한 코로나를 다시 앞에 두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개별의 인식, 전문가의 규정, 치우친 해석과 예측으로 제각각 섣부르게 나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코로나의 존재를 그 자체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누구랄 것 없이 평등하고 자율적으로 소통하는 토대 위에서 모두의 철저한 관찰을 함께 모아, 제3의 인식으로 도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신념이나 경험으로 재단하여 삶을 통제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생의 여정을 사는 방식에 대하여, 작가가 던지는 해법의 실마리가 아닐까. 

벤이 살해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여자, 그녀는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격렬하게 자신을 옹호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그녀는 벤을 그 장소에서 데려오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파괴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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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 아퀴나스 : 신앙과 이성사이에서 지식인마을 26
신재식 지음 / 김영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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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모태 신앙의 강점은, 개인이 처한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판단 기준 없이 어려서부터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다 보니, 신앙의 경로가 전체적으로 흔들림이 적다는 데 있을 것이다. 반면, 어떤 계기가 있어 각성하여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의 특성, 즉 치열한 반추나 감격적인 영적 경험이 부족할 수 있어 오히려 믿음의 성장이 더딜 수 있다. 어느 순간 저절로 주어진 교리를 그대로 체화하는 과정에서 이도 저도 아닌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이해'보다는 '믿음'을 우선하다 보니, 자칫 이성과 신앙이 배척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교리를 깊이 있게 생각해보고, 그 의미를 추적하는 것은 무언가 불필요한 절차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분명 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믿지 않다니, 얼마나 불손한 신앙의 태도인가. 


그러나 바울은 세상을 꼼꼼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깨닫지 않을 수 없다고 단언했을 뿐 아니라, 첫번째 인간인 아담의 죽음과 의미, 두번째 인간으로 오신 예수그리수도의 부활로 영생을 획득하는 교리를 가르치면서 사고의 힘,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단순히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신앙을 공고히 하는데도, 저자의 주장처럼 어떤 믿음의 논리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기독교 교리를 해석하고 주요 각주를 만들어낸 주요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사상적 차이를 비교할 수 있고, 기독교인들은 말씀의 정수를 더 깊이 있고 올곧게 이해하는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방랑의 세월을 보내다 암브로시우스를 만나면서 사상적 성장을 하게 되고,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유사성을 발견하면서 이를 기독교에 접목하고 발전시킨다. 신플라톤주의는 최상의 존재인 일자가 있으며, 정신인 누스, 영혼인 프시케의 3중 구조를 주장하는데, 아우구스티누는 이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일체와  비슷하며, 인간은 일자와 연합할 때 최고의 행복을 얻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이 인간 구원의 본질이라고 정리한다. 


동시에 신플라톤주의는 일자에서 유출되어 이 세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고 주장한 반면, 그는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스스로 존재하는 그 자체임을 강조했다. 또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주의 보편적 질서와 원리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야말로 이성의 끝에서 신앙의 차원으로 도약하는 특별한 계시라고 주장한다. 즉 이성을 넘어서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라며 데카르트와 유사한 주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기도 한다. 인간의 감각은 불완전하지만, 지식으로 나아가도록 연결되는 매개체로써 현실의 세계를 인식하도록 도와주며,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도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인간을 알기 위하여 가시적인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을 초월하는 단계를 거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제안기도 한다. 또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확고히 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알기 위해 믿는다'고 주장했다면,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목하여 이성을 토대로 한 신앙, 합리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은총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주장을 통해 신앙과 이성을 분리했으며 신학과 철학을 구분하는 데 생각의 기초를 제공한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창조의 결과인 세상을 통해서, 인간의 경험적인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최초에 움직이지 않는 부동자가 있는데 이가 하나님이며, 모든 원인의 제 1원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또 우연적 존재를 있도록 하는 필연적 존재가 하나님이며 사물의 가치와 완전성의 계층 속에서 최고의 완전성을 유추할 수 있는데 이가 하나님이고, 만물이 존재 목적이 있는데, 이러한 목적 지향성을 부여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의 사상적 비교뿐만  아니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 사유의 최극단에 이르러 하나님이나 이상적 세계를 인식하고 유추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감각과 이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그 무언가를 지향했던 고대 또는 중세보다 현재의 철학과 논의가 더 풍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무엇이며,참 지식은 어떻게 인식하며 신이 있다면 인간과의 관계는 어떠한가와 같은 질문은 단지 고답적인 체 하는 허세일 뿐일까. 





 


흔히 종교와 과학을 두 개의 다른 지식으로 나누어서 생각하지만 반드시 분리된다고 할 수 없다...중략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단 한 가지로만 파악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는 것이다. 과학만이 진리라는 과학만능주의 또는 과학적 제국주의와 종교만이 진리라는 성서문자주의나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일은 우리를 광기와 무지로 몰아간다. 종교나 과학은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설명하는 각각 독특한 은유로서 이해해야 한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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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김민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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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름다움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문장의 수려함, 서사의 짜릿함, 매력적인 주인공 등 그 기원은 작품마다 특색 있고, 작가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감동은 매번 새롭고 다채롭게 변주되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 


<투르게네프 단편집>이 주는 감동은, 사냥꾼인 주인공이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서정적인 자연과 소박한 삶의 풍광, 인간의 한계와 고뇌, 불행과 아픔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내는 사람들의 강인함을 담백하게 표현하는 작가의 역량에서 기인한다. 철학적 문제 의식을 점화해 문학적 장치로 고양하는 대신, 수기를 쓰듯 차분하고 평온하게 기록함으로써 더 큰 울림을 준다. 


이 책에는 <가수들>, <만남>, <베진 초원>, <산송장>, <숲으로의 여행> 등 총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각각의 작품은 모두 별개의 작품이지만, 사냥꾼인 주인공이 모두 겪은 내용으로 묶여 있어 실상은 하나의 장편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가수들>은 음악적 재능을 뽐내는 시골 주막 안의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다. 허름한 시골 주막 안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노래를 뽐내고 긴장하면서 모두가 함께 즐기는 모습이 그려진다. 


<만남>은 순진한 시골 아가씨인 아쿨리나와 귀족의 시종이면서,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빅토르 알렉산드리치의 이야기다. 이별의 선물로 아쿨리나가 수레국화를 엮어 가져오지만, 그는 그녀가 원하는 친절한 작별 인사도 없이 상관을 따라 도시로 가야한다면서 어깨 으쓱 한번 하고는 매정하게 떠나간다. 


<베진 초원>은 주인공이 길을 잘못 들었다가 만난 다섯 아이들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밤새 말을 지키는 아이들은 귀신, 물의 요정, 익사한 사람, 괴물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고단한 소임을 다한다. 안타깝게도 이 중 한 소년이 후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소식도 전한다. 


<산송장>은 권정생 선생님이 극찬한 작품으로, 어느날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침대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루케리아의 이야기다. 그녀는 7년 동안 누워 지내면서도 자신은 눈과 귀가 멀쩡한 데다, 죄도 짓지 않게 된다면서 온종일 여러 생각을 하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고백한다.주인공인 사냥꾼이 병원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면서 속으로든, 소리를 내든 노래도 부른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그녀는 꿈에서 부모님도, 죽음도 만나는 환영을 보게 되는데, 몆 주 후 죽게 된다. 사람들은 그녀가 모든 것에 고마워한다고 전하면서 그녀가 죽은 날 5킬로미터가 넘는 교회에서 평일인데도 종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숲으로의 여행>은 사냥꾼이 혼자서 숲에 떨어져 있으면서 인간이 사라져도 그대로일 자연 앞에서  인간의 고독함, 나약함, 우연성 등을 느끼게 되는 과정과 콘드라트, 예고르와 함께 사냥을 떠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특히 예고르는 근동에서 제일 가는 사냥꾼으로 다부진 체격의, 말수가 적은 이로, 아내가 계속 아프고, 아이들은 죽어갔으며, 소설 말미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암소마저 죽었지만, 이 모든 사정을 자신의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사냥꾼은 동물도 혼자 죽어가듯 인간도 생의 불행을 겪게 되더라도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예고르의 모습을 모면서 불행을 감출 줄 아는구나, 라며 감탄한다. 


작품을 다 읽고 나면, 평론가들의 주장대로 마치 수채화 연작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다. 산뜻하고 청명하지만, 그 안에서 쓸쓸함과 애잔함, 동시에 소박함과 웅장함을 동시에 맛본 것 같은 느낌.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 생생한 소리가 나를 놀라게 했고 나의 모든 존재를 기쁨에 들뜨게 했다. 실상 나는 알 수 없는 어두운 심연에 빠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사방이 적막했고 그 어떤 영원한 슬픔의 신음만이 나직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왔다...정신이 아찔해졌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친근한 부름 소리가 내게 들려왔다. 그 누군가 힘찬 손길이 단 한번에 나를 신의 세계로 끌어내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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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 - 텍스트로 콘텍스트를 사는 사람들에게
박양규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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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성경은 단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때로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고리타분한 옛 기록에 갇힌 문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성경 말씀을, 내가 사는 현실에 적용해 믿음으로 사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에 당연한 단견일런지 모르겠다. 더구나 저자의 진단대로 성경 속 영웅의 활약과 믿음, 그들의 위대한 신앙에 주눅이 든 탓에 때때로 현실의 초라한 믿음과 대비되어 더더욱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의 강점은 두드러진다. 첫째, 한 축으로는 성경 전반을 훑으면서, 현대 성도들의 주된 고민 12가지를 대비시킴으로써 어떤 신앙의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둘째, 성경의 주된 인물들 또는 영웅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아무개, 소수자 등에 집중하면서 직접 계시를 받지 않은 그들의 놀라운 믿음을 돌아보게 한다. 셋째, 직접 계시를 받은 영웅들과 달리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함께 했던 아무개들의 신앙처럼 우리도 해석하고 고민하며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넷째, 이러한 해석, 고민, 판단은 결국 말씀의 텍스트가 이루어지고 있는 콘텍스트를 이해해야한다는 점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다섯째, 신앙이 결국은 시대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짐을 자각할 수 있도록 여러 인문학적 장치, 예술, 사회학, 정치학, 문학 등을 접목시킴으로써 '인문학과 성경의 조우'라는 저작의 목표를 명확하게 달성한다. 


저자는 인문학으로 성경을 읽는 방법론으로 세 가지 방법을 차례대로 제시하고 있는데, 먼저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구조를 이해할 것, 그리고 벤치마킹을 할 것, 마지막으로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언어 간극을 좁히기 위해 공감사전의 코너를 제시하면서 공감하기를 시도한다. 


방법론에 따른 구조적 체계를 갖추고, 아담의 시대로부터 초대 교회 바울까지 12장의 각각의 내용에 인문학적 장치들이 드리워지면서, 당시 이름 없는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 성도들이 느꼈을 갈등, 고민, 감정 등이 매우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되살아난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 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조망하기에 어떤 믿음의 선택, 결단이 필요한지 현실적인 각성으로 이끈다. 


말씀을 어떻게 읽고,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그것도 제대로 배운 것 같아 감사하다. 

고대 시대에도, 조선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텍스트는 우리의 콘텍스트에 근간이 된다. 수많은 아무개가 그것을 의지해서 살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현실을 극복해 나갔다면 우리도 아무개들처럼 하루를 사라 낼 것이다. 그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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