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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돌이켜보면, 코로나 팬데믹의 서막은 전혀 요란스럽지 않았다. 2020년 설 연휴 동안 나는 가족들과 함께 미리 계획해 두었던 대만 여행을 떠났고, 현지에서도 1~2명 정도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만 간간이 들릴 뿐, 대만도 거의 사회적인 동요가 없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일상에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아 2월 중순에 이르자 코로나는 본 모습을 삽시간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31번째 환자가 발생한 이후부터 코로나의 공포는 유례없이 두드러졌고, 급기야는 학생들의 전면 개학이 취소되고 비대면 학습이 전격 도입되었다. 일부 회사 역시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행사는 취소되었고 거리는 텅텅 비었으며, 가게마다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큐아르 코드, 백신 같은 단어들이 곧 일상을 지배했다. 그것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활의 규범으로 자리를 잡아 새로운 행동과 모습의 기준으로 붙따랐다.
코로나의 횡횡은, 카뮈의 <페스트>처럼 정부와 국민의 당혹스러움, 일부의 이기적 또는 이타적인 행태, 고립과 회피, 망각과 원망, 저항과 패배, 성실과 과로, 희생과 작은 승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유다른 재앙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쨌든 총력을 다하여 2년여의 사투를 치러냈고, 마침내 코로나 확산의 저지선을 꺾은 듯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일상이 다시 회복된다는 설렘이 충만하기도 전에 감염력이 더 강력한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한다는 맥 빠지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편 형편을 추슬러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대비해야 한다는 각성이 일기도 한다. 누군가는 연대를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시스템 개선을 주장하며, 누군가는 비대면 온라인 사회로의 이행을 화두로 던지면서 코로나 사회의 출구 전략을 제시하지만, 무언가 핵심이 빠진 듯 공허한 울림처럼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문가들은 세련된 언어로 코로나를 설명했지만, 현장에서 경험한 실체는 미묘하게 달랐으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발언은 표출할 권리를 얻지 못하거나 종종 가볍게 무시되었다.
나름대로 끊임없이 마주하고, 항거하며, 이겨내려 노력했지만, 제 속성대로 신출귀몰하며 기어이 공포와 불안을 흩뿌린 코로나를 앞에 두고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코로나는 숨 고르듯 한 번의 파고를 넘자 다시 기지개를 켜니, 의지는 스멀스멀 해체되고 무참함은 전신으로 스며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최선을 다했으니 그뿐인가. 차라리 <페스트>에서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감염병이 다시 갑자기 사라질 것을 기대하며, 감염병은 잊고 될 대로 되어 가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 지혜일까. 걷잡을 수 없는 의문들 때문에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러므로 우연히 읽게 된 <다섯째 아이>의 메시지는, 골칫거리 코로나 앞에서 잔뜩 움츠러든 내게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신선하게 다가와,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참이나 어떤 울림이 가슴 깊은 곳에서 잘그랑대는 것 같았다.
소설의 줄거리는 꽤 단순한 편이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직장 파티에서 만나 결혼하는데, 이들은 당시의 개방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옛 신념을 고수하기라도 하듯 다소 보수적이다. 소박한 가정을 이루어 아이들을 낳아 단란하게 사는 것이 꿈인 이들 부부는 형편보다 무리해서 저택을 구입한다. 네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경제 또는 물리적인 버거움은 다소 있었지만, 데이비드의 이혼한 아버지, 어머니 가정, 해리엇의 어머니와 자매 등이 휴가 기간에 저택을 방문하고 교류하는 등 부부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더욱이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아들을 돕고, 육아를 위해서 해리엇의 어머니 도로시가 저택에 상주하면서, 이들 부부의 어려움은 좀처럼 절망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행운처럼 느껴질 정도다. 적어도 이들의 행복은 다섯째 아이 벤을 낳기 전까지는 어떤 근본적인 삶의 원리를 획득이라도 한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 벤의 등장은 일순간에 가정의 평온을 바스러뜨렸다.
해리엇은 벤을 임신하면서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한다. 네 명의 아이를 낳았던 그녀는 예전과 다르다며 담당 의사에게 유도 분만을 요구하지만, 의사는 자신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해리엇은 “왜냐하면 선생님은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 않는다. 전문가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규정은 순식간에 그녀의 다르다는 절규를 압도한다.
벤은 성장 과정 역시 남달랐다. 기괴한 모습의 아이는 여느 아이들과 달리 난폭했고, 고성을 질렀으며, 아이들과 부부, 나아가 친척들에게조차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의사는 여전히 벤은 신체적으로 정상이며, 말이 느릴 뿐이라고 판단했지만, 마침내 데이비드는 이전의 가정을 되찾기 위해 벤을 어딘가로 보낸다. 벤의 증발과 함께 가족은, 작가의 표현대로 잠시 물에 불린 꽃처럼 피어나지만, 해리엇은 이내 어떤 의무감처럼 벤을 찾아 나선다.
데이비드에게서 받아든 주소지를 무조건 찾아간 해리엇은 음산한 수용소 같은 곳에서 짐승처럼 방치된 벤을 집으로 다시 데려온다. 벤의 재입성은 가족을 천천히 와해시킨다. 데이비드는 점점 더 일에 몰두하고, 네 아이들은 제 삶을 찾아 제각각 집을 떠난다. 해리엇은 간간이 수용소에서의 기억을 끄집어내 가까스로 벤을 통제하는 시늉만 낼 뿐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돌봄에 지친 해리엇은 흉측해진 정원을 돌보기 위해 존이라는 청년을 고용하고 이후 빈둥거리며 떠돌아다니는 존과 무리에게 벤의 돌봄을 맡기는데, 유일하게 벤은 그들에게 마음을 붙인다. 이런 와중에 학교에 입학한 벤은, 학교로부터 거부 내지는 방출될 것이라는 해리엇의 예상과는 달리, 놀랍게도 느리지만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아이라며 무사히 진학까지 한다.
존이 떠나고, 상급학교에 진학까지 하면서 벤은 어떻게 아이들과 소통했는지 모르겠으나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려 저택을 점차 점거한다. 그들은 냉장고를 한껏 털어먹거나 어디선가 음식을 사 와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채 저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일쑤여서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저택을 팔고 단둘이 새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운다. 해리엇은 벤의 등장을 신의 형벌, 우주의 진화 등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해석해보려 하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소설은 그녀가 자신들이 저택을 떠나면, 벤은 무리와 함께 갱단처럼 지내다 대도시 지하 세계로 내몰려 거기에서 우두머리로 살아갈 것이라고 예상하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다복한 중산층 가정에 벤이라는 기묘한 아이가 출생하고 그로 인한 가정의 굴곡진 변화를 담담히 그려낸 소설의 단순한 줄거리와 달리 작가는 곳곳에서 허를 찌르면서도 대담한 시선과 질문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
가장 파격적으로 느껴진 대목은 ‘벤’에 대한 규정과 인식의 문제였다. 벤을 직접 임신하고 양육하는 해리엇의 목소리는, 의학이나 교육의 공식적인 전문가의 규정 앞에서 무용지물로 여겨진다. 작가는 나의 오롯한 경험일지라도 전문적인 판단과 용어로 치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일지라도 인식되거나 인정되지 않는 현실의 좌표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실존이나 존재는 전문가적 식견으로 재구성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그의 인식 자체로 표출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질문한다.
이와 더불어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평행선을 달린 또 다른 질문은, 그렇다면 경험하는 것이 곧 올곧게 인식하는 방식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벤’이라는 유례없이 새로운 존재의 출몰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의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식된다. 데이비드는 유전자의 변화로, 해리엇은 우주의 진화까지 들먹이면서 벤을 이해하려고 하고, 아이들과 친척들도 나름의 생각대로 벤에게 접근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벤에 대한 ‘공포’, ‘적의’에만 머물러 있다. 놀랍게도 소설에서 각자의 인식은 대화나 만남 등에서 소통되는 것 같지만, 전적으로 각자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따라서 해석도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지금껏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험, 지식, 인격 등을 총동원하여 벤을 바로 보려 하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보기에’ 번번이 좌초한다.
오히려 벤은 허랑방탕한 존과 무리, 개념 없이 들떠 있는 불량한 녀석들 속에서 어울려 다니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그들이 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자세히 그려지고 있지 않지만, 그 어울림 속에서는 벤에 관한 규정과 인식이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언뜻 벤과 함께하는 것 같지만, 벤은 일종의 사물처럼 하필 그들과 함께 동일한 시공간을 동시에 점유한 것일 뿐 과연 함께 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또 눈여겨본 대목은, 다양한 시선의 교차 속에서 정작 벤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벤은 숱한 규정과 인식 속에 머물러 있거나, 어떤 물리적 존재로서 사물인 양 함께 하는 것으로 관찰되고 있을 뿐, 벤 자체의 목소리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몸짓, 소리, 행동은 소설 곳곳에서 내내 특유의 일관성을 갖지만, 그 누구도 그를 ‘바로 보지 않기에’ 각각의 공동체와 대비되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겨우 괴성이나 단답형의 응답만 가능한 것으로 묘사되는 벤을 보면서, 전지적 시점에서 전말을 이끌어온 작가가 의도적으로 벤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배제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장치는 독자마저 겉도는 관찰자로 머물게 하면서 벤의 행동, 모습, 소리 등을 더욱 생경함으로 점철하는 효과로 나타나, 한껏 이상하고 기괴하며 섬찟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으므로.
벤은 분명히 자신으로부터 배태되었지만, 그 새로운 존재는 내 통념과 상식, 예측을 벗어나므로 타도와 통제의 대상이며, 그러므로 아웃사이더들과 어울리며 내가 머물러 온 안온 너머의 지대에만 머물기를, 그리하여 내가 꿈꾸던 화평과 행복을 더 이상 침습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해리엇의 간절함은 과연 그녀만의 소망일까.
작가는 지독하고도 집요한 추적을 통해 중산층 가정에의 희구가 주는 환상 또는 신념을 순간 깨뜨리면서, 돌발 상황이나 뜻밖의 존재를 마주할 때 동시에 저마다 다른 인식, 규정을 쏟아내기에 앞서 있는 그대로를 편견 없이 보며, 올곧게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만 같았다.
낯설고 새로운 존재를 그대로 관찰하고 이를 토대로 인식하되, 편벽진 의식에 기댄 개별적인 인식이나 규정의 고립을 넘어서서, 진정한 소통과 교류를 통해 불완전하더라도 어떤 공통의 상을 확립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독서를 끝내고 죽비 같은 작가의 일침에 코로나를 마주하며 표류했던 마음이 바스스 다시 일어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설을 읽은 후 전율했던 까닭은 벤과 코로나가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는 벤처럼 어느 순간 일상의 평온을 파고들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처럼 코로나를 마주하며 당혹했고, 어떻게든 제어하며 떼내려 했다. 곳곳에서 각자 다른 감성과 평가로 경험한 코로나의 인식은 공포와 불안을 증폭시켜 제대로 공유되지 못했고, 전문가의 규정만이 꽤 그럴듯한 해석인양 덥석 수용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롭고 낯선 모습으로 등장한 코로나를 다시 앞에 두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개별의 인식, 전문가의 규정, 치우친 해석과 예측으로 제각각 섣부르게 나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코로나의 존재를 그 자체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누구랄 것 없이 평등하고 자율적으로 소통하는 토대 위에서 모두의 철저한 관찰을 함께 모아, 제3의 인식으로 도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신념이나 경험으로 재단하여 삶을 통제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생의 여정을 사는 방식에 대하여, 작가가 던지는 해법의 실마리가 아닐까.
벤이 살해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여자, 그녀는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격렬하게 자신을 옹호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그녀는 벤을 그 장소에서 데려오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파괴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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