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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ㅣ 이산의 책 1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평점 :
케이블 방송 한 다큐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원명원에 관한 이야기를 보게 됐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이야기에 한 순간에 시선을 빼앗겼다. 특히 강희제와 함께 생활했던 한 신부가 '하나님만 믿으면 완벽한 군주'라고 칭송했다는 장면을 보고 나자, 강희제에 대해서 꼭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욕심이 완벽하게 해갈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목이 축축해졌다.
이 책의 저자 조너선 스펜스가 이 책을 저술하면서 내린 가장 탁월한 결정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강희제의 자서전인양 읽혀지도록 기술한 문체가 아닐까 싶다. 생동감 있고, 구체적이며, 강직하다. 누군가가 되어 그의 시대를 살면서, 그의 성품과 그의 재능을 보듬어보는 것만큼 누군가를 더 깊이 이해하고, 표현해낼 수는 없을 것 같다.
강희제의 강점은 끊임없는 생각의 되새김질이다. 사냥을 할 때도, 다스릴 때도, 건강을 챙길 때도 그는 쉴 새 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며, 교훈을 되새기며 현실에 어떻게 강희제 식으로 적용할 것인지 연구했다. 보고된 자료를 정보로 바꾸고 통찰의 회로를 거쳐 치세의 법칙으로 바꾸어냈다.
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황제이므로 잠을 줄여가며 치세에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했고, 황제이므로 늘 지혜로움을 갈구해야한다고 다짐했고, 황제이므로 위엄과 존엄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했다. 교황과 신부들에 대한 강희제의 대응 전략은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황제가 그들 보다 우위라는 생각을 져버리지 않는 면모를 보인다. 바른 생각에 대한 열망은 원칙으로 굳혀졌다. 가령 범죄를 조사할 때의 원칙은 현대 법학의 법리와 다르지 않을 정도로 공평하고 정확을 기한다. 그는 반성하지 않으면 결코 용서하지 않으며 보고를 경솔히 믿거나 그 보고를 근거로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욕보이는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을 정도였다.
검소한 생활과 절제의 미덕 또한 그의 강점이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젊은 혈기를 아끼고, 성적 방종을 주의할 것, 검소하게 생활할 것을 강조하면서, 직접 자신이 생활로써 가르친 점이 존경스럽다. 또한 아이들은 뛰어놀아야한다는 그의 철학은 다큐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한 신부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방식으로 명암을 넣어 왕자의 얼굴을 그려 바치자 강희제는 아이의 얼굴에는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그늘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그 그림을 언짢아했다고 한다. 그 후 신부는 서양의 화풍을 버리고, 중국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었다.
대범함과 소탈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강희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무자비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확하게 원칙에 따라 상황을 압도하여 처리하는가 싶다가도, 시종들에게 가끔 농을 할 정도로 소탈한 면모는 황제의 위엄을 스스로 지켜내고, 생산하는 기폭제가 됐다.
자금성에서, 날마다 창검을 연마하는 강희제를 그려보았다가, 밤늦도록 독서한 후 달그림자에 스치는 바람결을 흠모하는 강희제를 떠올렸다가 서양의 수학에 빠져 원리를 신하들에게 가르치는 강희제를 상상해보며 슬며시 웃었었다.
문화적으로 깊이 있던 한족을 치리하려면, 더 깊게 공부해야하고, 더 넓게 생각해야한다고 다짐했던 그 속 깊은 군주가, 저자의 손길을 거치더니 마침내 생생하게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