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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통계와 확률이 내게 주는 안도감과 위로는 오랜 시간동안 커다랗게 부풀려져 왔다. 숫자 앞에 설 때마다, 다른 이들이 보일 틈이 없었다. 실업률, 최저임금, 적정 노동시간, 경제 성장률 등등 숫자로 표기되는 경제 지표들은 주변을 돌아보는 대신, 온전히 내 자신에게만 집중하도록 종용했고, 통계의 표본에서 살짝 비껴간 내 상황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통계에는 비루한 가난의 냄새도 실려 있지 않았고, 현장의 처절한 사투 역시 말끔한 진공상태로 억눌려 제시되었다. 깔끔하게 마감된 통계 치를 보면서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 지금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노라고 몸부림치는 이웃들의 모습을 읽어낸다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였을런지 모른다. 살로 부대끼고, 눈으로 마주해야 느끼는 삶, 그 자락의 애절한 이야기들을 숫자로 대신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4명의 기자들을 통해서, 식당 아주머니들의 쉴 틈 없는 노동 잔혹사를 보지 않았더라면, 극한의 피로를 무릎 쓰고 공장 일에 매달리는 직공의 일상을 엿보지 못했더라면, 거대 자본의 부품이라도 된 듯 하청의 연결 고리 가장 아래에서 오늘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마트의 유령 점원들을 눈여겨보지 못했더라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몰이해와 비인권적인 처우를 마주하지 못했더라면, 숫자들은 끝내 나를 울리지 못했을 것이다. 기자들은 숫자에 현실을 덧입혔고, 비딱해진 양심들 위로 지성의 환기를 주문했다.
단아한 숫자들을 떠받들고 있는 현실의 비참한 노동 현장, 굴레의 세습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기울어가는 사회, 대책은 난무하지만, 정답은 현장으로 진입조차 못하고 있다는 사실.. 읽는 내내 속이 아렸다. 가슴으로 새겨지고, 의식 속으로 거푸 거듭나는 활자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그 분들의 노동 가치에 비해 내가 하는 일들이 너무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내가 그 분들보다 개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가난한 노동의 순환선을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자평하는 것이 바른 판단인지, 동정어린 시선과 그럴싸한 대안으로 정답을 제시하면서 양심을 가볍게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무리 이상적인 사회라 하더라도, 사회 구조 속에서는 누군가는 그늘에 설 수 밖에 없다고, 그것이 마땅하다고 얕은 인식으로 비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활자들은 물음표가 됐다가 느낌표가 됐다가 말줄임표가 됐다가 점점 탄식으로 바뀌어갔다. 그 분들은 타인이 아니고, 내 오빠고, 누나고, 어머니이며, 동생의 얼굴을 닮았다. 6명을 거치면 대한민국 모든 사람을 안다는 데, 그들의 어려움과 절망감을 이렇게까지 모르고 살았다는 게 참 많이 부끄러웠다.
과연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 처절한 현장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공유하고, 나눌 수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진짜 길 찾기가 시작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답하고 싶다. 눈으로 본 사람들이, 들어서 가슴 아파본 사람들이, 그래서 함께 운 사람들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