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의 인류학 - 몸-마음-자연을 연결하는 사유와 치유
김태우 지음 / 돌베개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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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서든 'AI',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섭섭할 정도로 반복, 중첩되는 데다 나아가 인간 능력 밖의 효율성과 정확성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는 장담을 듣다보니, 평소 잘 동조하다가 어깃장을 놓는 데 어느 정도 일가견을 갖춘 나로서는 일종의 반항심이 치밀었다. 


더구나 의료 분야처럼 정밀성과 정합성을 추구하는 학문은 AI를 힘입어 그야말로 날개를 달아 치료 성적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리라는 포부가 기정 사실인것처럼 확고해 보이기까지 해, 불편한 마음이 일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데, 정말 인간의 건강, 질병, 몸과 마음이 그렇게 계산되고 분석될 수 있는 대상인가,에 생각이 이르니 무언가 중요한 전제를 놓친 채 부나방처럼 열풍에 올라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직관적으로 뭔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 때, 이 책을 읽게 되었으니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가. 


저자는 의료는 인간들의 집단은 예외 없이 의료를 가져왔고 이 의료는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고 공언하면서, 몸에 대한 이해 방식은 몸 밖 세계에 대한 이해 방식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서구 의료가 데카르트 이후 정신과 육체의 분리, 주체 중심의 세계 이해가 도드라지면서 발달해 온 반면, 동아시아의학, 특히 한의학은 기, 음양, 사상 등의 체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의료'가 아니라 '의료들'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 존재의 다차원적인 양태를 어느 하나의 의료로만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상호보완하면서 인간의 생로병사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의학에서의 진단 과정은 서구 의료와 사뭇 다른다. 서양 의학에서는 데이터 중심의 검사 결과가 이미 주어진 상태에서 환자를 만나지만, 한의학에서는 맥진부터 환자의 현상을 한의사가 직접 탐색하는 방식으로 진단이 이루어지기에 자세, 태도, 습관은 물론 질병의 서사까지 모두 포함하여 진단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의학에서는 무엇보다 '병'의 독립성 보다는 '흐름'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고정적인 질병 독립체 너머, 그것을 일으키게 하는 흐름의 양태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그 예가 "기"로, 기는 양상이며 물질적인 기반은 있으나, 물질 자체는 아니라면서 주먹을 쥐고 허공에 휘두를 때의 그 양상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기'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전제는 인간의 공통된 특성을 고려는 하지만, 이를 분류하고 합치하여 독립된 질병체를 만들어 표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특질이 더욱 고려되기 때문에 계산되거나 일률화 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대신, 환자의 서사와 양태, 습생, 자세를 포함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진단과 치료로 나아가기에 한의사마다 처방이 달라지고, 다른 진단도 내려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내가 흥미를 가진 점은, 인공지능으로 해석하거나 판별할 수 없는 사유 체계, 그리고 수많은 자료와 정보 속에서 서사를 잃어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환자의 지위가 다시금 정립된다는 것이었다. 즉, 서양 의료에서 질병의 하위로 전락하는 환자의 존재가, 한의학에서는 질병 위로 서는 존재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병의 이름 역시 몸의 한 공간을 차지한 독립체로서의 개체가 아니라, 몸의 전체와 연결된 흐름 속에서 일탈을 의미한다는 것도 새겨볼 만한다. 몸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이 연결망을 흔드는 침 치료의 특성도 의미가 있다. 


생장수장(生長收藏), 풍화조한(風火燥寒), 혈자리, 경락, 부(腑, 담, 소장, 대장, 방광), 장(臟, 간, 심, 폐, 신)의 각 층위는 겹겹의 층을 이루어 가로와 세로를 넘나들며 연결망을 이루고 있고, 침은 이 연결망을 흔들어 기운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약 역시 서구 의료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화학식으로 이해하는 성분이 아니라, 성분을 넘어서서 약성으로 이해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약성은 본초와 사람이 만나는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므로, 가령 단순히 사포닌이 인삼의 주요 효능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전 물리학과 양자역학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고전 물리학이 입자를 분석하고, 하나씩 독립된 개체로써 이해했다면, 양자 역학은 입자를 관측이나 상호작용, 확률 등 전체 속에서 고려하는 대상으로 이해하며 고정된 실체이면서도 동시에 파동의 흐름으로 인식한다.


이와 같이 서양 의학이 장기, 세포, 병 등을 독립된 개채로서 구분하여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하는 데 강점을 가진다면, 한의학은 기, 혈, 장부, 경락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인간 밖의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흐름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몸을 상정하기에, 단독 질병으로 포획되지 못하는 다양한 증상을 이해하고, 환자의 서사는 배제한 채 질병 중심의 동일화 과정으로 견인하는 의과학의 강포에 대항함으로써, 환자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가장 마음에 드는 단어를 꼽으라면, 무엇보다 "의료들"일 것이다. 다양한 차원과 복합적인 관점을 보다 더 허용하도록 개방하는 포용이 필요한 의료가  AI, 인공지능의 시대가 아닐까. 어쩌면 AI가 최정점에 다다른 거기에서야 '의료'만으로 돋아둔 무지를 깨달을 지 모르겠다. 인공지능이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질병을 더욱 정교하게 진단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의 삶과 경험, 서사와 관계를 이해하는 다양한 의료의 관점이 오히려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만물은 이치를 공유하며 함께 호흡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고무적인 상태를 말하기 위한 이치는 단지 생리에 관한 것이 아니고, 몸 밖 더 넓은 세계의 이치와 맞닿아 있다. 육체의 힘을 강조하는 건강이나 체력과 같은 말로는 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중략..동아시아의 관점은 건강에만 매몰될 수 없는 광의의 건강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존재의 좋은 상태를 말하기 위해 경계 지어진 몸 너모를 함께 포괄해야 하는 존재 이해의 방식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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