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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ㅣ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평점 :
당연한 것에 대한 부정, 진부한 것에 대한 도전, 획일화된 감성에 대한 반성. 책 표지의 도발적인 문구는 일자포수라도 된 듯 들뢰즈와 데리다에 대한 호기심을 삽시간에 심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에 대해 얼핏 주워들은 내용은 있었지만, 제대로 정리된 내용을 알았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기본 지식이 일천하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간만에 성하고 알찬 독서를 한 것 같아 뿌듯하다.
책 서두에서 저자는 피카소, 마네, 폴 세잔, 루치노 라우라나와 야코프 판 라이스달 등 회화의 발전과 비교를 통해 유일하며 변함없는 객관적 진리라는 표상을 근거로 세계를 개념화하여 이해하는 방식은 완전한가, 이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들뢰즈와 데리다의 철학이 출발했다는 점을 설명한다.
먼저 들뢰즈는 칸트가 제시한 도식의 용성을 포착하여 도식화를 통해 개념이 만들어지고 진부함이 일상화되는 실례를 파악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차이 자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차이를 드러내고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동일성의 억업과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확언한다.
반면 데리다는 차이의 개념과 유사하지만 자신의 철학을 대표하는 차연을 내세운다. 차연은 두 가지 관점에서 고안한 것인데, 첫째 말과 문자의 위계를 파고드는 데서 시작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서양 철학은 말을 숭상하면서 문자를 폄하했는데, 말은 말을 하는 사람의 현전을 드러내지만 문자는 독자가 읽는 시점에서 볼 때 글쓴이의 부재를 전제하므로 항상 왜곡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문자가 말을 보조하고 대신하는 대리보충에 불과하여, 말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소크로테스와 플라톤이 죽고 없는 현재 그들의 생각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남긴 기록으로, 사람들은 텍스트를 믿고 신뢰한다는 것이다. 글은 익명성을 통해 속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지만, 말은 오히려 은폐할 수 있으므로 문자를 통해서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리보충의 대리보충을 주장한다. 발음으로 들리는 말로서는 구분되지 않는 것들도 문자의 음절을 바꾸는 것으로 새로운 의미를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차이는 항상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처음부터 차이가 결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과 맥락 속에서 차이가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가령 '의협심'이라는 단어 하나로 어떤 인물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며, 어느 순간에는 '의협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다른 경우에는 '의협심'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차이는 진행되는 것으로 완전한 차이 또는 완전한 의미는 영원히 완결될 수 없다고 인식하면서, 차이는 공간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사과라는 기호가 사과라는 개념으로 연결되면 그 체계 안에서 기호의 변경은 절대 있을 수 없고, 시간의 변화 가능성도 배제된다는 것. 그러나 그의 사유를 확장하면 존재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며 절대 선과 절대 악의 개념 등도 모호해질 수 밖에 없다. 다만 기호는 상황적 전제 안에서 일시적으로 관찰되고 규정되는 것이기에 훨씬 많은 자유와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
저자는 칸트의 개념과 이념에 빗대어 들뢰즈를 설명하면서, 사물 본래의 모습인 물자체는 우리의 지각이나 사고 능력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듯이, 가령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도'는 '도' 자체가 지닌 무한한 잠재적 소리 중 하나를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기에 잠재적인 수많은 소리들은 실재하며 다만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해설한다. 또한 들뢰즈는 사람의 시각 구조를 닮은 카메라는 개념이나 관습 등에서 자유롭기에 우리의 진부한 사고를 소스치어 뛰어넘을 수 있다고 본다.
데리다는 선을 예로 들어 선은 선일 뿐인데, 관습에 의해서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경계 자체가 관습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면 안과 밖이 실재하며 구분 가능한 것인지 묻는다. 그러면서 이 틀로부터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파고든다.
예술작품이 에르곤이라면 액자 틀처럼 예술작품의 주변적인 것이 파레르곤으로, 에르곤과 파레르곤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예술작품 자체가 틀 안의 실체가 아니며 안과 밖을 구분하는 틀 자체라고 인식한다. 칸트가 주장하는 무관심성, 보편성, 합목적성, 필연성 중 합목적성에 주목하면서 목적없는 합목적성,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로서의 미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액자영화에 주목하면서 실제 공간과 영화 속 영화가 서로 반영하는 구조를 통해 원본과 복사본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공허한 것일 수 있으며 이것이 기호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인식한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변화되는 의미를 담지 않는, 그러므로 무의미한 기호에의 천착, 이것이 현대 미술 작품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은 무의미의 찌꺼기가 가득하며 의미와 무의미가 중첩되며, 무의미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편 들뢰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기계로 규정하는데, 다만 기계론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을 구분한다. 그는 기계론적인 것은 미리 설계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형성된 체계이며, 기계적인 것은 엄밀한 체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어떤 존재든 나름대로의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절단에 근거하여 단절과 흐름의 연결을 통해 기관이 만들어지며 이를 근거로 기계는 단절과 연결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제라고 소개한다.
들뢰즈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의 단일한 체계로 규정할 수 없으며, 이러한 다양체는 어떤 다른 것과 관계를 맺어야만 체계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기계는 다른 기계와 접속을 하는데, 이러한 통접은, 연결이 곧 단절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 다른 기능을 억제하는 분리의 과정, 즉 이접이 이루어지는 데 통접이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이접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설명한다. 이를 종합하면 기계는 연접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체계로써 이해된다.
그는 기계론적이고 개념적인 체계를 수목, 기계적이고 이념적인 체계를 리좀이라고 명명하면서 강제적이고 경직된 구분 체계는 수목, 일탈을 허용하는 유연한 절단의 체계는 리좀으로 구분하고, 엄격한 체계로서의 존재를 강제하는 사상들에 반기를 든다.
제한된 지면 안에서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상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루기 위하여 다양한 철학자를 배치하고, 그들의 철학과 비교하면서 전개해 가는 과정이 탁월하다. 다만, 물리적인 한계 탓에 어느 정도 선행 지식이 있어야 비교나 계승, 반박의 과정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다양성,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전위, 고정과 단일에서의 퇴영 및 역동과 변화의 진취 등을 고양하는 철학으로서의 들뢰즈, 데리다가 왜 다양한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는지 이해하기에는 충분하다.
나는 다른 사람과 어떤 면에서 구별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과 나와의 차이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번 자신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차이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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