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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전원교향곡 / 배덕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6
앙드레 지드 지음, 동성식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평점 :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숨은 묘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교리와 강령을 통해 성경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정립되고, 어리석음이 지혜로 교의된다고 배우고 있지만, 분명 이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다. 성경의 숱한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된다. 수많은 지류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줄기로 통합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해설에 따르면 기독교 배경 하에 자란 지드는 신화를 읽듯 성경을 읽었다고 하는데, 그는 천재적 감수성과 꼼꼼한 성격, 그리고 끊임없는 궁리로, 자신이 마주한 삶의 일단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풀어낸다. 때로는 너무 밀착된 나머지 엉뚱하게도 신에게로의 포섭을 내세우며 삶을 비극으로 몰아넣는가 하면, 냉담하고 범연해져 둘레 밖 세상을 무조건 동경하기도 한다. 마치 돋보기로 번득대며 생을 들여다보다 날카로운 반사점을 발견하면 그것을 모티브로 성경 구절과 엮어 소설로 써 내려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위험천만한 독단을 발휘하면서도 누구보다 신앙적 고뇌를 보여준 까닭에, 소설 읽기의 재미는 독자에게 쏠쏠한 선물이 된다.
<좁은 문>운 외사촌 알리사와 사랑에 빠진 소년의 성장기로 신에 대한 사랑에 과몰입된 알리사의 신앙에 대해 다룬다. 주인공 제롬은, 어머니의 외도를 알고도 침묵하며 슬퍼하는 알리사를 사랑하게 되고, 알리사 역시 제롬을 사랑하지만, 결혼을 향해 가는 길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다. 알리사는 동생 쥘리에트가 제롬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제롬과의 관계를 멀리하기도 하고, 자신과 제롬이 결혼하면 앞길이 창창한 제롬을 막는 것이 아닐까 염려한다.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야 할 제롬을 자신이 방해하는 것 같다는 막연한 심정 탓에, 제롬을 향한 마음을 막아내다 죽어간다. 외도에 대한 배척과 성결에 대한 집착,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동시에 양립 불가능하다는 도착된 고집은 알리사를 죽음으로 이끄는데, 소설가는 치우친 신앙의 모순을 드러낸다.
<전원교향곡>은 늙은 목사와 그가 거둬들인 눈 먼 소녀의 사랑을 통해 "눈을 뜬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는다. 주인공은 어느 날 죽어가는 노파의 임종 예배를 갔다가 아무런 연고가 없는 눈 먼 소녀 제르튀르드를 집으로 데려온다. 빈한한 가정 형편이었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제르튀르드를 돌보기 시작한 그는, 그녀의 영특함과 성실함 등을 보면서 점점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부성애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아들과 제르튀르드가 가까워진 것을 보면서 자신 안의 질투를 대면하게 되고, 제르튀르드 역시 아들이 아니라 목사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목사의 친구에게 눈 수술을 받고 눈을 뜨게 된 제르튀르드는 눈을 뜨고서야 자신은 목사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의 아들을 사랑했다고 단언하며 절규한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그녀와 그의 아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인데, 성경 말씀을 각각의 목사님이 자율적으로 전하는 개신교와 달리 모든 성당에서 동일한 말씀으로 선포되는 카톨릭교의 특성과 맞물려, 주인공들에 대한 지드의 관점을 엿본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배덕자>는 지적이며 정적인 삶의 굴레에 살던 미셸의 이야기다. 풍족한 명문가의 엘리트로 살던 미셸은 오직 죽음이 임박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일념으로 마르슬린과 결혼한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마침 떠난 신혼여행에서 병이 도진다. 식단을 바꾸고 산책을 시키는 등 마르슬린의 극진한 간호 속에서 그는 점점 기력을 회복하게 되고 여행지를 바꾸어가면서 염소를 모는 소년들, 생경한 아랍인들을 만나게 되고 육체의 단련에 힘을 쏟는다. 산책의 범위가 점점 확장되면서 마침내 남몰래 바위에 올라가 처음으로 벌거숭이가 되어보기도 하고, 수염을 밀며 머리를 기르면서 점점 '새로운 존재'로 변모해간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건강이 회복된 그는 아버지의 유산이 있는 라모리니에르에 도착해 농장 운영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샌님같던 그는 차차 농장의 운영에 대해 배우고 하인과 소작인을 다루는 데 익숙해진다. 특히 늙은 마름 보카쥬의 아들 샤를과 교제하면서 그의 젊음과 생기를 흠모한다. 강의와 저서 출간을 위해 파리로 돌아온 미셸은 마르슬린과 함께 파리의 고급 주택지에 자리를 잡고 사교 모임에 집중한다. 미셸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고고학과 언어학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기쁨을 추구하지만 사전을 펼치는 것 이상의 삶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구할 수 없다며 실망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메날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미셸의 가위를 훔쳤던 목티르와의 일화를 꺼내면서 목티르는 자신의 절도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 미셸에 대해 알아차리고 있었다면서 목티르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목티르가 미셸을 쥐고 있었던 것이라면서, 미셸은 이제까지 신이 숭상하던 것, 소유의식이 없다고 칭찬한다. 당혹해하는 미셸과 이후 다시 만난 메날크는 사람들이 삶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흉내만 내고 있다고 단언하면서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남을 모방하면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쏟아 붓는다. 메날크는 사람들은 소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소유당하고 있으며 모든 기쁨은 날마다 썩어가는 사막의 만나와 같은 것이라면서 떠나간다.
메날크의 파렴치한 기쁨에 대한 증오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것에 대해 화가 났던 미셸은 그제서야 아이를 임신하고 시름시름 앓던 마르슬린과의 현실을 급작스레 조우한다. 그는 마르슬린의 회복을 위해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곳곳에서 야성의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르슬린이 조금씩 회복하자 계절과 고장의 특성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열과 빛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서 여행지를 옮겼고, 마침내 목티르를 만났던 비스크라로 가게 된다. 거기에서 감옥에 다녀온 목티르를 만난 미셸은 마르슬린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투구르에 함께 가자며 약속을 한다. 마침내 투구르에 도착한 미셸은 마르슬린의 상태를 염려하면서도 한참을 무어인 카페에 머무르다 호텔로 돌아가고 마침내 마르슬린은 사망한다. 미셸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지금은 네가 허리띠를 두르고 원하는 곳으로 가려니와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씀에 천착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확고하고 고정된 사고가 진정한 인간을 만드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항상 푸른 하늘만큼 그 사고를 꺾어버리는 것은 없다고 도파한다.
지성에 갇힌 굴레를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로 변모했던 미셸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지던 거짓된 삶을 팽하고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겠다며 거리와 여행지를 헤매지만 결국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이와 마르슬린을 잃게 된다. 변함 없이 푸른 하늘-어쩌면 신의 모습일런지 모른다- 아래서 결국 할 말을 잃어버린 미셸의 이야기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가 대한 의문을 던진다.
지드의 화두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전제로 한 인간의 존재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지드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죄인이라는 존재적 위치에서 출발하지 않는, 삶의 의미에 대한 치열한 구색이 어떤 배리의 현상으로 이어지는지 들추어 내는 것 같기도 하다.
만약에 문제를 드라마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 작품이 말하는 것은, 내 주인공의 영혼 속에서 연출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의 기이한 모험 속에 가둬 버리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내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 작품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 미셸이 이기든 지든, 그 문제는 계속 존재할 것이며 작가는 승리도 패배도 기정사실로 제시하지는 않는다...후략 <앙드레 지드>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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