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테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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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방식으로 관조하는 방법을 터득할 때의 충격을 가히 상상할 수 있을까.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소회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세밀한 붓 터치를 문자로 더듬듯이 따라가며 인상파 작품을 읽은 것 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시간과 공간, 기승전결의 단계를 따르며 흘러가는 스토리를 훑는 것이 소설 읽기의 일반이라면, <말테의 수기>는 빛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는 순간을 묘사하려는 인상파 화가들의 일념을, 인간의 존재 방식에 투영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면, 인간 그 자체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얽힌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는 이야기를 엮어갈 수 있지만, 순간의 의식들이 관통되는 일련의 흐름 속에 선 인간은 결코 물갈 수 없다. 항상 현재에 있으며 과거와 미래는 얼마든지 오늘에 맞닿아 재구성된다. 더구나, 인상의 조각들은 맞물려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 내고 합쳐지다 다시 갈래를 만들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언제나 동일하게 변하지 않는 "존재"로 인간은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의식의 흐름 속에서 표류하는 것이 인간의 본체라면 동일한 인간들의 조우는 신기루일 뿐이며, 한 인간의 사라짐은 한 의식의 세계가 사라지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이 겪는 인생은 과연 무엇인가. 죽음을 감추고 있다가 마침내 죽음에 몰수당하는 미미한 존재의 의미없는 사투, 그것 뿐인까. 주인공의 질문은 끊임없는 사유로 이어진다. 


질문에 답하듯이 주인공은 답을 찾는 방식을 소설의 서두에서 분명하게 드러내는데, 보는 법을 새롭게 배우고 있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에 더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 끝났던 곳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고 있다면서 사람들의 얼굴이 많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한다. 얼굴을 바꾸는 사람들을 생각하다 마침에 얼굴이 비어버린 여자를 보고 공포에 휩싸이기도 한다. 


시종관이었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감추고 있다가 마침내 스스로 알아서 지금껏 살아온 것과 앞으로 있게 될 것을 합쳐서 죽어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죽어가는 것들의 숱한 부딪힘 속에서 불안을 더 깊이 체감한 주인공은, 인간이 많은 발명과 진보, 문화, 종교, 세계에 대한 예지력을 지녔음에도 인생의 표면에 머물러 있고, 사람이 죽어가는 데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둘러선 대중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며, 모든 현실의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어떤 것과도 연관 없이 흘러가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데 체념하듯 긍정한다.


정형화된 인간, 무엇이든 다 정확히 인식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더욱이 함께하면서도 개별적인 인간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피상적 인식에 대해 넌더리를 내기도 한다. 더욱이 죽음을 배태한 생의 순간들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진부함으로 뒤섞여 불안과 공포로 표출된다고 진단한다. 


깊은 내면을 뒤솟구며 주인공은 외할아버지 댁에서의 기억을 더듬기도 한다, 오래전 죽은 크리스티네 브라에의 등장과 정적 속에서의 그녀의 표표한 궤적은 어른들의 긴장과 대비되는데, 그의 의식은 더욱 확장되면서, 존재하지만 간과되고 있는, 거리의 허물어가는 집과 사람들을 응시하기도 한다.인식되지 않는 그들은 존재하는 것인가. 


그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타이르면서도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차단하는 그 무언가가 자신의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면서,죽음과 연관지어 과거에 알고 있던 것을 찾고,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것을 찾지만 아무것도 거기 없음을 알게 되는 고독한 얼굴을 상상한다 


그의 방황과 초조, 걱정은 문학과 연극을 거치면서 마침내 신에 대한 인식까지 이르게 되고, 성서 속 탕자의 이야기를 반추하면서 사랑에 대한 주제로 승화한다. 죽음을 마주한 인간이 황폐할 수록 신의 은택과 사랑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데 그의 궁리가 다다른다.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면서 방대한 생각의 조각들을 대어 꿰맞추어야 해 결코 쉽지 않은 독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표현처럼 인생이란 서로 싸우며 발버둥치다가 끝판에는 한 삼태기의 흙을 뒤집어 쓰는 것으로 끝나게 마련이라는 상투적 완결이 아니라, 불안한 존재로서의 개별적인 인간이 하묘할 인식의 종착점은 신이라는 데 공감하게 된다. 

운명은 여러 무늬와 형상을 고안해 내기를 좋아한다. 그 어려움은 복잡한 데에 있다. 하지만 인생 그 자체는 단순함으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생명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크기를 지닌 몇 가지밖에 우리에게서 얻지 못한다. 성자는 운명을 거부하면서 신을 대하여 이 위대한 것을 선택한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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