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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2
보에티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평점 :
단테의 <신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책 표지의 소개보다 더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데 영향을 끼친 것은,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한 차동엽 신부님의 답변이었다. 스치듯 지면에 짧게 인용되었지만 느낌만큼은 강렬해서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저자인 보에티우스는 귀족 가문인 아니키우스 가문에서 태어났고, 당대 유력자였던 심마쿠스의 입양자였다가 그의 딸 루스티키아나와 결혼한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로마의 인문학과 연계하려고 노력했던 심마쿠스의 영향을 받았고, 신학적 논의에 익숙했다. 명민한 명문가 출신답게 승승장구하여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 격에 해당하는 마기스테르 오피키오룸 직까지 역임했고 그의 두 아들은 10대에 집정관에 임명받을 정도로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지나친 정의로움 때문에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파비아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된다.
그는 유배지에서 죽음을 앞두고 이 책을 쓰면서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을 통해 철학에서 신학으로 인도되는 여정을 그려내면서, 죽음의 운명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탐색한다. 이 책은 보에티우스와 철학의 여신, 운명의 여신과 참된 행복, 참된 행복과 최고선, 신의 섭리와 운명,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 등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은 시와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매우 흥미롭게 시작한다. 갑작스럽게 감옥에 갇힌 보에티우스의 비참함을 시와 음악의 여신들이 달래주는데, 탄식의 말을 끊임없이 넣어주는 시의 여신을 질책면서 어느날 철학의 여신이 그에게 찾아온다. 그녀는 시의 여신들은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지 않고 감정을 질식시켜, 냉철한 이성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힐난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도 무고로 죽었지만 끝까지 철학을 붙들고 승리를 거두었다면서, 보에티우스만 억울한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면서 어리광을 부릴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녀는 이 세상의 바다에서 온갖 풍파를 겪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이 무분별함과 어리석음에 맞서는 이성적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것이라고 규정한다.
보에티우스는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숙청파들의 음모와 기만을 있는 그대로 적었고 억울하게 유배왔다고 항변하지만, 철학의 여신은 인간은 그 누구도 다른 이들을 유배시킬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 때문에 유배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라며 다그친다. 그리고 만유가 무작위가 아니라 신적인 이성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는 믿음을 되찾아야 하며, 그를 속이는 비탄, 슬픔, 무기력함 등이 소용돌이치는 어둠에서 벗어나도록 약을 처방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녀가 처방한 첫 번째 약은 운명의 여신이 가진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그가 운명의 여신에 기대 거짓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닫게 하는 데 집중한다. 철학의 여신에 따르면, 운명의 여신은 누구에게나 온갖 선물 보따리를 풀어 혹하게 한 후 안심하고 지내면 어느 순간 등을 돌려 떠나므로 고통을 안겨주는데 이런 식의 행보가 운명의 여신의 속성인데도, 유한한 인간은 운명의 여신이 주었던 생의 조건이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착각한다고 일갈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태어났기에 어떤 권리도 없다는 것이 자명하므로, 운명의 여신이 주는 조건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요동치는 어리석음을 직시하고, 오히려 모든 운명의 순간을 당연하게 여기며 마음의 평안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추구하는 참된 행복의 본질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물질, 권력, 명성, 육체적 쾌락 등 운명이 주는 것들이 참된 행복이라면 육체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은 끝이 나지만, 참된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나 물질, 권력, 명성에 있지 않다는 점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녀는, 참된 행복은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 중에서 최고의 것이어서 그 자신 속에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다 담고 있으며 완전하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에 반해 부, 권력, 명성, 육신의 쾌락 등은 채우면 채울 수록 더 갈망하게 하는 불완전한 행복, 즉 거짓된 행복임을 설명해 나간다. 불완전한 선과 대비하여 완전한 선, 즉 최고선이 존재하며, 그 존재가 바로 신이라는 데 논리적 귀결의 방점을 찍는다. 사람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은 찬찬히 살펴보면, 결국 만족과 연결되어 있고, 만족은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결과에 따른 것이므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의 정수는 결국 선과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은 서로 다르고 그 추구하는 각각의 것들은 완벽한 선을 가져다 줄 수 없으므로, 최고의 선이라면 각각의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선이어야 하며 단일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설득해 나간다. 선을 이루는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떨어져 나가면 완전성을 잃어버리기에 하나로 존재하는 단일성이 그 속성일 수 밖에 없으며, 만물이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 선이기에 만물의 목적은 선이라는 점도 유추한다. 이를 통해 만유는 선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추리하고, 그러므로 하나의 선, 완전한 선이자 최고의 선인 신이 만유를 다스린다는 데까지 보에티우스의 인식을 견인한다.
신의 존재를 증명한 철학의 여신은 억울한 보에티우스에게 신이 과연 정의를 베푸는 것인지 가르친다. 보에티우슨는 만유를 다스리는 선한 신이 존재하는데 악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 의문을 품는데, 철학의 여신은 힘의 관점에서 그의 의문을 풀이해 나간다. 인간의 행위를 이루는 의지와 능력을 예로 들어 행복은 선이므로, 선을 추구하고 선을 얻어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악은 선을 추구하는 본성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여 선을 얻지 못한 채 흉내만 내고 있으므로 참된 함이 없다는 점을 간파한다. 선을 추구하고 선을 얻을 수 있는 미덕을 갖는 것이 참된 힘이며, 그러므로 오히려 악은 악을 실행에 옮겨 실제로 이룰 수 있을 때 선에서 더 멀어져 더 불행해지고 비참해지는 역설에 놓여 있다는 점도 가르친다.
또한 철학의 여신은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에 갇힌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평면의 도면을 걸으면서 조건적 필연성으로서 자유의지를 얼마든지 펼칠 수 있으나, 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삼차원의 세계 밖에 있으므로 평면에 놓인 인간의 모든 행보를, 순수한 필연성의 관점에서 언제나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영원'의 개념은 미래가 계속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반면, 신에게는 영원이 언제나 '현재'로써 인식된다는 점을 들어, 낮은 차원의 우리는 더 높은 차원의 신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가는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일러준다.
죽음을 앞둔 보에티우스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신의 존재를 확신하면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얻어야 할 참된 행복의 본질을 깨닫고 흔들림 없는 평안함으로 자신을 다잡는다. 정적에 의해 육신은 유배되었지만, 정신과 영혼은 자유로워 세기의 걸작을 집필한 그의 지성과 집념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또 지면이었지만 차동엽 신부님께 좋은 책을 추천 받은 것 같아 감사하다.
이렇게 그것은 본질상 하나이고 동일해서 여러 부분들로 나뉠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에 의거해서 그것을 구분하고 나누어서 그 중의 한 부분을 얻으려고 애쓰지만, 그 부분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서 결국에는 그 부분도 얻지도 못하고, 그 전체를 얻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 자체도 얻지 못하게 된다..중략..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권력을 얻으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이 모은 돈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많은 즐거움들, 심지어 자연스러운 본성적인 즐거움들조차 포기하고서 이름 없이 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살면, 그 사람은 비록 부를 지녔다고 해도 만족을 얻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권력도 없고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며 명예도 없어서 멸시받고 명성도 없이 비천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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