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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하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6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백치>를 읽으면서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을 몇 번이고 다시 찾아보았다. 여행 중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그림 앞을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고, 일각에서는 발작 증세를 보였다는 설도 있다. 소설은 한스 홀바인의 작품을 문학으로 승화했다고 했도 과언이 아니다.
싸늘하고 피폐한 주검으로 무덤 속에 누워있는 한 남자, 그가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동시에 신의 구원과 믿음에 대한 태도를 가늠하는 시발점이 된다니. 못 자국에 피멍이 든 손과 발, 죽음에 질려 핏기가 가신 표정, 기괴할 정도로 말라 틀어진 시신을 두고, 어디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극형을 받은 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죽음에 압도되어 완전히 무너진 저 육체가 다시 부활하여 영생할 수 있다니 과연 믿을 수 있는 일인가. 권능의 영웅이 아니라 실패의 노예처럼 처참히 무너진 모습 속에서, 작가는 인간의 실존, 구원, 믿음의 문제를 포착해낸다.
<백치>는 일견 단순한 연애, 그것도 지지부진한 치정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나스따시야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고, 사회적인 명망가 또쯔끼의 눈에 띄어 그의 보호 아래 자라게 되지만, 순결을 잃고 타락을 추구한다.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순결을 더럽힌 또쯔끼와 세상을 향한 복수이자 삶의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끊임없이 또쯔끼를 희롱하고 돈과 소유욕에 붙들린 가브릴라, 로고진의 삶을 휘두른다. 그녀는 미쉬낀을 사랑하지만,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순결하고 아름다운 아글라야, 예빠친 장군의 딸과 맺어지기를 희구한다. 그녀는 로고진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예상하면서도 로고진과 떠난다.
주인공인 미쉬낀 공작은 지병으로 스위스에서 치료를 받고 러시아로 돌아온 청년으로, 티없이 맑고 꾸밀줄 모르는 진정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백치로 불리울 정도로 순진하지만, 나스따시야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가브릴라는 또쯔끼의 꾀임에 빠져 돈을 받을 목적으로 나스따시야에 접근하며, 로고진은 미쉬낀의 대척점에 선 인물로 나스따시야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에게 돌진하며 마침내 그녀와 결혼하지만, 결국 나스따시야를 살해하고 만다.
<백치>의 또 다른 축은 연애사를 관통하는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인데, 상황과 맥락에 따라 자신의 이기심만 충족시키며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레베제프와 죽음을 앞두고 무자비한 신에게 마지막 자유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다며 자살을 꿈꾸는 이뽈리뜨가 대표적이다. 특히 로고진이 끝없는 소유를 갈구하면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지만 마침내 파멸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한다면, 이뽈리뜨는 확고부동한 법칙처럼 굳건한 신에게 대항하며 죽는 순간까지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극대화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인간의 무한한 자기애를 대표한다.
미쉬낀 공작을 연모하면서 그가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리라 소망한 아글라야는, 미쉬낀 공작이 나스따시야를 찾으러 떠나자 외국인과 결혼하는 인물로, 미쉬낀 공작의 면모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졌지만 자신의 목적을 투사할 인물로써 그를 사랑한다.
<백치>에서 미쉬낀은 타락한 러시아 사회에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화신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순결을 잃었다며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나스따시야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독점욕에 사로잡힌 로고진의 살해로부터 그녀를 지켜내지 못한다. 그는 살인자 로고진이 의식을 잃고 열병을 앓자 그의 옆에서 머리와 뺨을 달래주듯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다. 결국 로고진은 법령에 따라 유형에 처해지고, 미쉬낀은 그야말로 지능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는 백치가 된다. 이로써 미쉬낀은 욕망에 사로잡힌 주변 인물들, 상황에 대한 기억, 해석..모든 것을 잃어갈 것이다. 이것은 죄과를 기억하지 않는 용서를 예표한다.
그야말로 한스 홀바인의 그리스도처럼 미쉬낀은 처절하게 실패했고,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누구하나 자신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다. 무엇 하나 성취된 것이 없고 어느 누구도 긍정적 결론의 화자가 되지 못한 결론은, 다시 한스 홀바인의 그리스도를 돌아보게 한다. 구원의 결과는 성취이며, 성공이고, 긍정이어야 하는가. 타락해가는 세상을 뒤엎는 권능의 군왕이 군림하므로 인간의 욕망이 뜻하는 바, 그 결실을 맺는 그것이야말로 구원인가. 왜 구원의 핵심은 죄의 용서인가. 나의 욕망을 올곧이 성취할 이가 메시야인가. 바보처럼 실패하고, 저능아처럼 순전한 미쉬낀 같은 이가 다시 메시야로 재림한다면, 우리는 그가 구세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백치>를 읽고 나면, 나약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포착하기를 질문하는 한스 홀바인의 그림 앞에서, 쉽게 떠나지 못한 작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것 같다.
그러나 슈나이더 교수는 갈 때마다 인상을 더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슈나이더는 환자의 지능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암시하며, 아직 불치라고 확정짓지는 않았지만 넌지시 가장 비관적인 암시를 해주었다 - P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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