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여성학 강의 - 한국사회.여성.젠더, 학술총서 22(개정판)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 동녘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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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과연 약자인가라는 질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많겠지만, 여성의 사회문화적, 역사정치적 좌표를 확인하다보면 사회적 약자의  현주소를 이해하는 데 통찰력을 제공하리라는 주장에는 모두가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해부하고 따져보면 비로소 보이는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발견해내고 도울 것인가, 이 책은 작은 파문처럼 주제들이 맞닿고 간섭하며 커다란 동심원으로 나아간다.

 

일종의 여성학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데, 2005년에 발간되어 시대, 사회적으로 낡은 쟁점으로 퇴보한 일부 주제도 있지만, 페미니즘의 이론, 여성사, 여성성과 젠더 정체성, 소비주의 사회와 여성의 몸, 여성의 관점에서 본 영화, 여성과 성문화, 가족과 여성의 지위, 여성노동의 현실, 여성과 법, 국가 여성 정책의 변화,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 북한 여성의 삶, 세계 여성운동의 발전사 등을 각각의 전문가들이 나누어 기술함으로써 학술적 결과를 망라하고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아무래도 페미니즘 이론이었다. 일부에서 성별 혐오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드리워지고 있는데, 그 이면의 동적 바탕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저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등을 소개하고 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도 동등한 인간이라는 이념 아래 여성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하며 사회 구조보다는 제도나 관행을 바꾸는 데 힘을 쏟았다. 여성의 시민권,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여권 신장에 기여한 반면, 주변부 여성보다는 중산층 이상, 백인 여성 등 우월한 지위의 여성들에 대한 권익 향상에 그칠 수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마르크스 페미니즘은 노동 계급 여성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는데, 여성문제는 결국 경제적 억압구조, 자본주의 제도의 문제라고 인식한다. 여성이 근본적으로 수행하는 노동, 같은 사회 안에서도 여성들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차별과 억압이 나타나는 방식이 다르다는 발상은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가령 엥겔스는 최초의 분업은 남녀 성별 분업인데, 사회경제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바깥일이 중요해지면서 이를 담당하던 남성이 지배권을 획득하고 이것이 여성 억압의 기원이라고 설명한다. 자본주의 체계는 원활한 노동력 수급을 위해 노동자의 차이와 차별을 필연적으로 수행하는데, 여기에서 성의 범주에 따른 차별이 나타난다고도 해석한다.  또한 여성에게 본령은 가정이며 직업은 부차적이라는 통념을 주입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여성을 생산자로 끌어당기고 한편으로는 가사노동자로 규정함으로써 자본은 이중의 이득을 보면서 여성 노동자의 가치를 낮춘다는 분석도 눈길을 끈다. 문제는 여성 문제를 산업 노동자의 문제로만 환원한다거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탓하는 데서 오는 확장성의 빈곤.

 

급진적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은 그것이 곧 체제라고 인식한다. 여성 집단을 억압하면서 얻는 이득은 자본이나 사회구조가 아니라 남성 자체라고 보는 관점이다. 임신과 출산을 하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생물학적 가족 자체가 여성을 억압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본다. 한편으로는 심리사회적으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성적 지위에 있어서 차별을 가져오는 근간이라고 해석한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공론화했듯이 이성끼리의 사랑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이성애주의가 남성중심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이성애를 평등한 관계로 또 레즈비언이 아니더라도 자매애를 강조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현상을 남녀대립의 틀로 설명함으로써 문제를 단순화하고 결정론에 빠지게 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 한계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적 페미니즘을 통합한 데서 출발한다. 현재 여성의 문제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결합에서 기인한다고 진단한다. 가사노동이나 출산을 재생산으로 개념화하거나 여성이 여성으로 겪는 문제를 더 구체화해 논의를 활성화하고자 하지만, 이론적 기술방식이나 결과가 보다 정교해질 필요성이 있다.  

 

한편 페미니즘 이론 외에 흑인 여성들과 포스트 모더니즘적 문제 의식과 같은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흑인 여성들처럼 실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여성들의 문제가 있는데, 이것이 남녀차별의 문제보다 덜 중요한가 하는 것이고, 여성과 남성을 하나의 일반화된 집단으로 상정하고 대립시키는 것이 특정한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그 자체로 여성인 한 인간을 억압하는 또 하나의 기제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실천이나 운동에 있어서 다양한 요소가 섞일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면서 각 요소의 특성을 살피고 다양한 입장을 포괄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라고 마무리한다.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는 하나의 수단일뿐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겸허히 수용해야하며, 이론적 지평을 확장해나가면서 생태적 사유, 사회적 약자로의 정진을 이야기한다. 대립과 반목, 대결과 비난이 지펴진 현장에서 새겨들어야할 권고가 아닐까.

여성학은 여성이라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편파적이고 배타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여 온 기존 학문과 전통적 지식의 많은 부분에는 여성 차별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인종 차별적, 계급 차별적인 편견과 오류가 있다. 여성학은 이 모든 차별적인 편견과 오류에 도전하는 비판적인 학문을 추구한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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