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기행 - 나는 이런 여행을 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4월
절판


모든 사람의 현재는 결국 그 사람의 과거의 집대성이다. 그 사람이 일찍이 읽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모든 것, 누군가와 나눈 인상적인 대화의 전부, 마음속에서 자문자답한 모든 것이 그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현존재를 구성한다. 숙고한 끝에 했던, 혹은 깊은 생각 없이 했던 모든 행동, 그리고 그 행동들에서 얻은 결말에 반성과 성찰을 보탠 모든 것, 혹은 획득된 다양한 반사반응이 그 사람의 행동 패턴을 만들어 간다. 인간 존재를 이렇게 파악한다면,한 사람을 전반적으로 형성하는 요인으로서 여행이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상에 지배되는 패턴화된 행동(routine)의 반복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지성도 감성도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고 의욕적인 행동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지ㆍ정ㆍ의 모든 면에서, 일상화된 것은 의식 위로 올리지 않고 처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처리된 것은 기억도 되지 않게끔 되어 있다. 의식 위로 올라가 기억에 남는 것은 ‘색다름(novelty)’의 요소가 있는 것뿐이다. 여행은 일상성의 탈피 그 자체이므로 그 과정에서 얻은 모든 자극이 ‘색다름’의 요소를 가지며, 따라서 기억이 되는 동시에 그 사람의 개성과 지 ㆍ정ㆍ의 시스템에 독창적인 각인을 새겨 나간다. 그러므로 여행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그 사람을 바꾸어 나간다. 그 사람을 고쳐서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 여행 전과 여행 후의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일 수 없다. 여행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하여 우리의 일상행활조차 무수한 작은 여행의 집적으로 파악한다면, 사람은 무수한 작은 여행 혹은 ‘커다란 여행의 무수한 작은 구성요소’가 가져다주는 작은 변화의 집적체로서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존재라고 해도 좋다. -30페이지 앞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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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아내의 불안 범우문고 115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범우사 / 1994년 7월
평점 :
품절


슈테판 츠바이크하면 최고의 전기물 작가로 불리며 아직도 지상에 많은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수많은 사

람들이 그의 매혹적인 문체와 인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에 넋을 잃고 그의 펜이 되었다. 인간의 심리에 관한

그의 문제의 글들은 마치 프로이드 학문연구의 결과를 소설화 시켜 놓은 듯 탁월하다. 이 책 [체스, 아내의 불

안]은 츠바이크의 많지 않은 소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픽션임에도 주인공에 대한 섬세하고도 끈질긴 묘사

로 인하여 이 책도 츠바이크의 여타의 전기물처럼 읽혀지리라.  체스의 주인공인 법학자나 아내의 불안의 아

내,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 혹은 외부의 강압적인 힘에 의한 탄압으로 엄청난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적확하고도 명징한 비유를 통한 주인공들의 심리묘사는 츠바이크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장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소설로서의 한계가 있다고 굳이 꼬집는 다면 심리묘사에 너무 치중한 나머

지 이야기의 얼개가 너무 단조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단점을 덮어버릴만큼 내용은 재미있다. 특히 아내

의 불안의 마지막 반전은 독자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어찌됐든 양복 안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이

자그마한 책에서 이 정도의 책 읽는 재미를 얻기가 그리 쉽겠는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솜씨는 소설에서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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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기행 - 나는 이런 여행을 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다치바나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났다. 그의 유명세에 비하면 한참 늦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첫인상은  이양반 대단하군 뭐 이런 것이었다. 여행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요소의 하나라는 생각이 보편적이 된 지 오래고 그에 따른 부산물로 무수히 많은 여행기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야말로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나의 정서에 맞는 여행기는 정말 드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을 만난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다시피 단순히 지도를 따라가면서 본 인상의 나열이라든지 아니면 자신이 겪은 모험이나 고통 따위의 회고 등은 여행을 인생에 대한 어떤 통찰이라고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다는 작가의 말에 우선 공감했다. 그러나 다치바나의 이 책을 여행기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다방면에 걸쳐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가진 그는 일단 프로다. 그리고 글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나)이라는 점에서 아무런 조건없이 일상이라는 겉옷을 훌훌 벗고 떠나는 단순한 여행자와는 우선 다르다. 처음에 놀랐던 것은 그가 찾은 새로운 것, 낮선 목표에 대한 탐욕스러울 정도의 탐구심 때문이었다. 그가 저널리스트이자 르포작가라는 점을 감안해도 정말 전문적이며 심층적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도 그렇고 뉴욕에 대한 인상기나 에이즈에 대한 보고서가 그렇다. 그는 어떤 대상에 대해 한번 호기심을 가지면 그 대상이 가지는 핵심까지 건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같다. 글쎄 이런 사람이 쓴 글을 여행기라고 해야 할지.........그러나 다른 르포기사를 다 제쳐놓고 ‘유럽으로 반핵 무전여행을 떠나다’편 하나만 읽더라도 여행기로서의 이 책의 값어치는 충분하다. 청춘의 시절, 젊음이 유일한 자산이자 담보물이던 때, 여행을 하기에는 자신을 둘러싼 여건들이 너무 막막한 상태에서 낮선 곳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하나하나 계획을 실현해 가고 드디어 장기간의 여행을 떠나는 다치바나. 나는 이제는 지나가버린 저 가여웠던 청춘의 시절을 회상하며 그에게 늦은 박수를 보낼 정도였다. 사람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다치바나는 책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을 여행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몸으로 느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생을 자신의 집 침대에 누워 지내면서 저 불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루스트나 집필하는 동안 한 번도 하동 땅 평사리를 가보지 않았다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 여사의 경우는? 물론 선험적인 지식을 글로서 풀어내는 천재들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다치바나의 말이다. ’이 세상은 가상인식장치를 통해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자기 육체에 부속된 ‘종합적인 감각장치’, 리얼한 현실을 인식하는 그 장치를 현장에 가져가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 인식이라는 것이 있다. 리얼한 체험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리얼한 현실이라는 것이 있다. 여행이란 바로 그 리얼한 현실인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절차인 것이다. 여행이라는 작업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 육체에 부속되어 있는 ‘전방위적 전감각적 리얼한 현실인식장치’를 현장에 가져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가을, 책을 통하여서 한층 뻑뻑해진 머리를 위하여 두 다리와 손을 통한 자유를 허락함이 어떠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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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경전
김욱동 엮음 / 범우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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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최근에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형성된 주거촌이다. 수천 수 만년 동안 그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해 왔을 산과 들, 나무와 숲들이 베어지고 뭉개진 자리에 이른바 대단위 주택단지가 들어선 것이다. 하루아침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뭉텅이로 베어져 나갔으며 짙푸른 숲은 그 형태가 사라져 버렸고 들판은 고르고 질서있게 정리되고 포장됐다. 뒤늦게 이런 무차별적인 난개발의 심각성에 눈을 뜬 시민단체와 각성한 일부 주민들은 개발자들의 횡포에 맞선 항의와 이에 따른 대안을 제시하고 나섰지만 이미 그 형태가 사라지고 없어져 버린 자연을 바라보며 허탈해 할 뿐이었다. 남은 산은 옛날의 산이 더 이상 아니었다. 산은 손발이 다 잘리고 몸통의 일부만 남아 마치 봉분처럼 기이한 형상으로 변했다. 숲에 살던 토끼며 다람쥐 청설모 오소리 등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는지 일시에 사라져 버렸고 얼마 남지 않은 새들만 목쉰 소리로 울어댈 뿐이었다. 개발도 결국 인간을 위한 일 일진데 이렇듯이 사람의 마음까지 황폐화 시키고 산과 숲의 주인인 동물들과 그들의 보금자리를 너무 쉽게 뭉개버리는 야만적인 행태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하기야 이런 일들이 어디 이 곳 뿐이겠는가. 오늘도 이 땅에서 아니 지구촌 각 곳에서 무수히 벌어지고 있는 일상적인 일의 하나일 것이다.

위의 내용은 내가 근년에 구체적인 체험으로 겪은 반생태주의의 실상이었지만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하게 대두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래의 우리 삶의 화두가 환경과 생태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넘어서 이제 상식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인 것이다.

다소 장황한 설명으로 글을 시작한 것은 최근에 읽은 책인 [녹색경전]얘기를 하기 위함이다. 이 책 [녹색경전]은 이런 환경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깃발을 들고 자연보호를 소리 높이 외치거나 생태운동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경전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인류의 자연적이고 생명있는 삶에 보다 확실한 가르침을 주는 울림있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담담한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읽어 가다 보면 동 서양 인류의 생활과 마음에 자리해 있던 자연주의와 생태주의 정신의 그 시원성에 우선 놀라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 시대 우리가 나아 가야할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해준다.

삶이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쓰리고 때론 각박하지 않았으랴.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스스로를 경쟁속으로 몰입시키고 서로 반목하고 건설하고 파괴하고 또 개발하고 허무는 무수한 시행착오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였다. 이 책에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놓치지 않고 소중하게 품어왔던 생명과 자연의 소중함에 대한 수많은 현자들의 글을 모아 놓았다. 현대를 사는 시인으로부터 다수 민중이 공동의 작자라고 할 수 있는 고대 무가에 이르기까지..........

사실 나는 생태주의나 환경보호라는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자연파괴의 심각성을 비로소 느끼고 나서부터가 아니었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오류였던가 하는 점을 이 책을 읽어보고 알게 되었다. 선조들의 자연에 대한 인식체계야 말로 오늘날의 환경과 생태운동의 든든한 뿌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책을 읽고 난 후의 소감이다.

이 책은 삼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자연과 생명을 노래한 우리나라 글모음 편 그리고 제2부는 동양, 3부는 서양의 자연주의와 생태주의에 관한 글들로 그 편가름이 돼있다. 고대의 경전으로부터 현대 시인의 아포리즘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글 중에서 엮은이가 환경과 생태에 대한 애정과 안목을 가지고 가려 뽑은 글과 여기에 엮은이의 신선한 해설을 잇대어 놓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 서구의 문명이 성경 창세기의 한 구절인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라는 말처럼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사상적 토대위에 형성되었다면 동양의 정신세계는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아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는 문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서구는 자신들이 건설해온 문명이 가져다준 폐해를 일찌기 깨닫고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문명의 방향을 설정해서 이를 실행해온지 오래됐다. 반대로 서구의 자본주의가 늦게 침투되어 물질문명에서 뒤쳐져 있다가 뒤늦게 경제적인 풍요를 향해 매진하기 시작한 동양이나 제3세계는 어떤가. 어설픈 자본주의화 산업화로 인하여 무참히 환경을 파괴하고 반생태적인 개발에 뒤늦게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동양이 소중히 품어 간직해온 인류의 경탄할만한 지혜인 자연생태주의 사상이 거꾸로 서양에서 대접받고 오히려 동양에서는 윗목차지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예를 보더라도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하던 6-70년대에는 환경이라는 말만 언급해도 반국가적인 단체나 인물로 낙인찍어 불온시 하였다. 그러나 정치사회적인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생계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뒤늦게나마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해서 이제는 정부에도 환경부서가 만들어져 활동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 환경문제라든지 생태주의 문제는 개별국가는 물론 양의 동서를 떠나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중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오염물질이 모래바람을 타고 한국이나 일본 아니 미국까지 날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환경문제는 더 이상 개별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그 심각성에 대처하고 노력해야하는 문제로 그 질과 양이 커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인류가 지속적으로 환경과 생태문제에 천착해야할 문화적인 토양을 이 책은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첫 부분에 우리나라의 고대 무가라는 다소 생소한 노래 중에 ‘천지로 장막 삼고’라는 제목의 글은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하여 얼마나 흥미로운지 모른다.


         천지(天地)로 장막 삼고, 등칙(등나무와 칙)으로 베개 삼고

         잔디로 요를 삼고, 떼구름으로 차일 삼고

         샛별로 등촉을 삼어


이 무가를 보면 저자의 설명처럼 인간과 자연은 마치 손등과 손바닥처럼 서로 떼어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이미 하나라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얼마나 친자연적이며 호기로운 노랫말인가. 동시에 오늘날의 환경문제 생명문제의 근원적 성찰이 이 노래 안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오늘날 돌아보면 어떠한가. 천지는 이미 장막을 삼을 수 없을 만큼 뿌옇게 오염되어 숨쉬기조차 어렵게 돼 버렸으며 우리의 요가 돼 주어야 할 잔디나 들판의 풀들은 인공적으로 정돈되고 수시로 뿌려지는 농약들로 인하여 마음놓고 뒹굴 수 있는 요가 더 이상 아니며 밤하늘에 떠 있어 등촉으로 삼아온 뭇 별들은 우리의 시야에서 뿌옇게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이 무가의 노래말처럼 다시 천지 자연을 우리의 장막과 등칙으로 삼을 수 있는 날이 우리의 환경과 생태운동의 종착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의 말미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아름다운 말로 장식되어 있다.


    ‘꽃과 어린이와 새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두려워할 것이 없다’


꽃과 새는 자연이요. 어린이는 희망이자 순수의 상징이다. 인류는 더 이상의  과도한 소비와 파괴적인 개발의 미망에서 벗어나서 이와 같은 상징이 지향하는 바대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꽃과 어린이와 새는 가장 여리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닐까.

지난 여름, 휴가를 맞아 강원도 태백 일대에 다녀 왔었다. 예전에 탄광촌으로 흥청대던 태백과 삼척에서 영월까지 그야말로 일제 식민지를 거쳐 해방이후 한국 경제발전의 한 중심을 담당해 왔던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만큼 그곳의 자연은 무참히 파괴되었고 그 험준한 태백준령은 수십 킬로미터의 땅속까지 마치 개미굴처럼 파헤쳐져 앞으로의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깊은 병이 들어 버렸다. 사람도 자연도 지칠대로 지쳐 그 피로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 석탄이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자 사람들은 떠나 버렸고 자연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그 놀라운 생명력으로 차음 원기를 회복해 갔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외양상으로는 대부분의 상처가 치료된 듯 계곡은 맑은 물이 찾아 들었고 숲은 다시 무성해 졌으며 산들은 푸르기만 하다. 태백일대를 포함해서 강원도일대는 우리나라의 허파라고 할 수 있다. 일부지만 그 곳이 다시 정상적인 숨을 쉬는 곳으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개발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그 개발이 가져다주는 패혜가 결국 인간의 삶의 질을 형편없이 낮출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자연은 무서운 것이며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들판에 자라는 풀 한 포기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일찍이 깨우친 선조들의 혜안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앞으로 우리가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엮은이의 해석대로 성경 창세기의 ‘땅을 정복하라’라는 말을 문자대로 해석해서 정복하여 지배하라는 말이 아니라 인류에게 주어진 자연을 잘 관리하라는 말로 받아들일 때 앞으로의 인류에게 그나마 작은 희망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의 그 험한 벼랑길을 돌면서 안을 도통 보여주지 않는 검은 숲들의 원시성에서 우리나라의 푸른 미래도 조금은 확인할 수 있었다면 과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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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아프리카 - 정해종의 아프리카 미술기행
정해종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주문하여 읽게 된 것은 한 주의 책을 소개하는 일간지의 귀퉁이에서 이어령 선생의 추천 글을 읽고 나서이다. [터치 아프리카! 이 책은 상상력과 열정이 식어가는 우리에게 생명의 불꽃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대한 조각이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 깊이 기록되어 있는 암호들을 해독해준다. 성냥골에 불이 붙는 것처럼, 내안의 아프리카가 섬광처럼 켜진다.]라는. 이 시대의 대가가 이렇게까지 평가한 책의 내용은 무엇일까.

‘상상력과 열정이 식어가는 우리에게’는 맞는 말이로되, ‘내면 깊이 기록되어 있는 암호들’이라니........아프리카는 내게 아니 우리에게 너무 멀리 있다. 우리 의식속의 아프리카는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낙후되어 있어 전혀 모범으로 삼을 곳이 아닌 곳. 타잔이나 동물의 왕국. 혹은 저자의 얘기대로 콜라병을 눈에 갖다 대고 하늘바라기를 하고 있는 부시맨의 모습, 그리고 에이즈나 굶주림으로 동물처럼 죽어가는 저 비참한 사람들의 버려진 땅으로 대개 기억된다. 그러나 독자들의 이러한 편견을 깨부수려는 듯 저자는 처음부터 남아메리카의 광대한 대지 위를 매우 서정적인 리듬을 타고 상륙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좋은 머리글 한편은 그 책 전체와 맘먹는 값어치를 한다고 믿는다. 저자가 시인이라는 것을 확인하여주는 서문의 멋진 글을 보자. [밤의 평원은 사방이 다 별이다. 운전대 위로 길게 사선을 그으며 바로 눈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별똥별들을 바라볼 땐, 마치 내가 외계의 어느 행성을 찾아가는 고독한 우주 나그네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암흑의 대지를 빠르게 지나면서 멀리서 보면 내가 별똥별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평원은 자유를 가르치면서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아프리카 평원의 아득한 밤길을 달리면서 쓴 것 같은 이 글은 아프리카에 대해 무지한 독자의 시선을 유혹하는 매혹적인 글이다.

무릇 좋은 기행문이란 자기가 체험하고 느낀 곳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애정이 있어야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고 그래야 눈에 보이는 단순한 풍광이 아닌 그곳의 실체에 대한 곰 삭여진 글이 나오는 법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성형의 남아메리카 기행집인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라든지 이희수의 ‘세계문화기행’중의 터키편 같은 글을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여수에 젖은 듯 이국의 공기와 대지의 냄새를 전해주는 작가의 글에서는 그 곳 사람들의 살 냄새가 더불어 풍겨지는 법이다.

터치 아프리카라. 남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길들을 부드럽게 터치하며 달리던 작가의 차가 멈춘 곳은 짐바브웨이다. 이곳은 아프리카의 조각의 대명사인 쇼나조각의 고장이다. 쇼나조각은 돌의 본성에 대한 영적 접근을 통해 아프리카 토착문화의 역동적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특히 돌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정과 망치 등 전통적인 도구만 이용해 돌 그 자체에 영혼을 불어넣은 자연의 조각이라는 점에서 서구의 조각과는 차별을 갖는다고 한다.(책 17쪽 설명).

쇼나조각의 역사와 현대적 의미를 찾아가는 저자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부시맨들의 회화로 옮겨간다. 사물을 바라보는데 원근법과 일관된 시점이라는 현대 회화의 원칙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의 그림. 그래서 어떤이들로부터 어린아이들의 그림 같다는 이유로 유치한 것으로 해석되는 그림에 문명이전의 지고지순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또 다른 방식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실제로 부시맨의 회화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로부터 오히려 모던한 평가를 받는 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동안 살아왔던 그들은 서구의 관점에서의 이른바 문명에는 한참 뒤떨어져 있다. 그들은 전쟁의 경험이 없었으며 따라서 전술도 없는 소집단 생활로 인하여 강한 부족으로부터 쫓기어 자기 땅에서 밀려났다. 부시맨들이 갈수록 더한 가혹한 환경에 처하게 된 것은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상륙하고서 부터이다. 그들은 부시맨들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끊어진 고리를 이어주는 살아 있는 화석쯤으로 여겼다. 땅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를테면 흰개미들이 짓밟힌 자기 집을 복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나 풀잎이 스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시간 혹은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데 걸리는 시간 등을 통해 짐승의 흔적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낼 수가 있으며 심지어는 짐승의 배설물만 보고도 그 짐승의 성별, 나이, 크기, 건강상태 등을 알 수 있다고 한다.)이 탁월했던 그들을 서구 열강들은 전쟁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20세기가 지나도록 벌판의 미아처럼 유랑하거나 쫓기고 착취당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그들이 마침내 정치적인 자각을 하게 되는데 그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한 것이 문화적인 정체성의 회복이었다. 그 방편 중의 하나가  현대예술 프로젝트로 나타났으며 그런 과정을 통하여 부시맨 부족의 전통적인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작품을 통해 부시맨들은 문화전통을 회복하고 더 나은 삶을 누려야 하는 권리와 자신들이 남아프리카 문화유산에 얼마나 중요하고도 독특한 공헌을 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부시맨들의 회화와 작품의 전개과정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피폐된 역사까지 안내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비참한 현장, 저자는 이제 흑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타운십을 찾아간다. 그곳은 인류가 아프리카에 대하여 가지는 어떤 부채 같은 현장이다. 그들의 비참한 현실이 우리의 이웃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여겨야 되는가. 아니다. 작가는 전세계 인구 63억을 100명이 사는 마을로 축소해 놓을 때 그 중에 20명이 영양실조이고 1명은 아사직전의 위기에 몰려 있으며 15명이 비만이라는 사실로 치환해서 다수의 정상적인 사람들의 책임을 아프게 묻고 있다.

아프리카 미술여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아프리카문화의 정체성 그리고 현실, 그들의 아픈 역사와 현재의 삶까지 더듬어 확인 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있는가? 지은이가 처음에 자신에게 묻듯이 독자에게 물었던 질문에 스스로 아프리카는 이렇게 대양너머에 자리 잡고 있다고, 그리하여 당신의 내면 깊이 자리하고 있는 환상과 무지의 심지에 불을 켜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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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2005-11-04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성의 잇게 잘 쓰셨네요.. 일간지 서평 부럽지 않네요.. 저도 읽었는데 할말이 너무 많아 정리가 안되든데..필자의 필력이 예쁜표지가 그리고 감동을 주는 그림과 조각들과 기행문적인 요소들이 정말 잊고잇던 아프리카를 불러 일으키지요.

이끼낀 바위 2005-11-0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이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구요. 하여간 아프리카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심어준 책이었어요. 저자의 말대로 아프리카는 대양너머에 그렇게 자리잡고 있는데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해서 그냥 무시하고 흘려 버릴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들의 아픔엔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만이 가지는 시원적인 문명은 그 자체로  소중히 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