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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경전
김욱동 엮음 / 범우사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최근에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형성된 주거촌이다. 수천 수 만년 동안 그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해 왔을 산과 들, 나무와 숲들이 베어지고 뭉개진 자리에 이른바 대단위 주택단지가 들어선 것이다. 하루아침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뭉텅이로 베어져 나갔으며 짙푸른 숲은 그 형태가 사라져 버렸고 들판은 고르고 질서있게 정리되고 포장됐다. 뒤늦게 이런 무차별적인 난개발의 심각성에 눈을 뜬 시민단체와 각성한 일부 주민들은 개발자들의 횡포에 맞선 항의와 이에 따른 대안을 제시하고 나섰지만 이미 그 형태가 사라지고 없어져 버린 자연을 바라보며 허탈해 할 뿐이었다. 남은 산은 옛날의 산이 더 이상 아니었다. 산은 손발이 다 잘리고 몸통의 일부만 남아 마치 봉분처럼 기이한 형상으로 변했다. 숲에 살던 토끼며 다람쥐 청설모 오소리 등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는지 일시에 사라져 버렸고 얼마 남지 않은 새들만 목쉰 소리로 울어댈 뿐이었다. 개발도 결국 인간을 위한 일 일진데 이렇듯이 사람의 마음까지 황폐화 시키고 산과 숲의 주인인 동물들과 그들의 보금자리를 너무 쉽게 뭉개버리는 야만적인 행태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하기야 이런 일들이 어디 이 곳 뿐이겠는가. 오늘도 이 땅에서 아니 지구촌 각 곳에서 무수히 벌어지고 있는 일상적인 일의 하나일 것이다.
위의 내용은 내가 근년에 구체적인 체험으로 겪은 반생태주의의 실상이었지만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하게 대두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래의 우리 삶의 화두가 환경과 생태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넘어서 이제 상식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인 것이다.
다소 장황한 설명으로 글을 시작한 것은 최근에 읽은 책인 [녹색경전]얘기를 하기 위함이다. 이 책 [녹색경전]은 이런 환경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깃발을 들고 자연보호를 소리 높이 외치거나 생태운동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경전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인류의 자연적이고 생명있는 삶에 보다 확실한 가르침을 주는 울림있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담담한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읽어 가다 보면 동 서양 인류의 생활과 마음에 자리해 있던 자연주의와 생태주의 정신의 그 시원성에 우선 놀라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 시대 우리가 나아 가야할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해준다.
삶이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쓰리고 때론 각박하지 않았으랴.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스스로를 경쟁속으로 몰입시키고 서로 반목하고 건설하고 파괴하고 또 개발하고 허무는 무수한 시행착오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였다. 이 책에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놓치지 않고 소중하게 품어왔던 생명과 자연의 소중함에 대한 수많은 현자들의 글을 모아 놓았다. 현대를 사는 시인으로부터 다수 민중이 공동의 작자라고 할 수 있는 고대 무가에 이르기까지..........
사실 나는 생태주의나 환경보호라는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자연파괴의 심각성을 비로소 느끼고 나서부터가 아니었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오류였던가 하는 점을 이 책을 읽어보고 알게 되었다. 선조들의 자연에 대한 인식체계야 말로 오늘날의 환경과 생태운동의 든든한 뿌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책을 읽고 난 후의 소감이다.
이 책은 삼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자연과 생명을 노래한 우리나라 글모음 편 그리고 제2부는 동양, 3부는 서양의 자연주의와 생태주의에 관한 글들로 그 편가름이 돼있다. 고대의 경전으로부터 현대 시인의 아포리즘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글 중에서 엮은이가 환경과 생태에 대한 애정과 안목을 가지고 가려 뽑은 글과 여기에 엮은이의 신선한 해설을 잇대어 놓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 서구의 문명이 성경 창세기의 한 구절인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라는 말처럼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사상적 토대위에 형성되었다면 동양의 정신세계는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아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는 문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서구는 자신들이 건설해온 문명이 가져다준 폐해를 일찌기 깨닫고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문명의 방향을 설정해서 이를 실행해온지 오래됐다. 반대로 서구의 자본주의가 늦게 침투되어 물질문명에서 뒤쳐져 있다가 뒤늦게 경제적인 풍요를 향해 매진하기 시작한 동양이나 제3세계는 어떤가. 어설픈 자본주의화 산업화로 인하여 무참히 환경을 파괴하고 반생태적인 개발에 뒤늦게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동양이 소중히 품어 간직해온 인류의 경탄할만한 지혜인 자연생태주의 사상이 거꾸로 서양에서 대접받고 오히려 동양에서는 윗목차지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예를 보더라도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하던 6-70년대에는 환경이라는 말만 언급해도 반국가적인 단체나 인물로 낙인찍어 불온시 하였다. 그러나 정치사회적인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생계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뒤늦게나마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해서 이제는 정부에도 환경부서가 만들어져 활동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 환경문제라든지 생태주의 문제는 개별국가는 물론 양의 동서를 떠나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중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오염물질이 모래바람을 타고 한국이나 일본 아니 미국까지 날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환경문제는 더 이상 개별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그 심각성에 대처하고 노력해야하는 문제로 그 질과 양이 커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인류가 지속적으로 환경과 생태문제에 천착해야할 문화적인 토양을 이 책은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첫 부분에 우리나라의 고대 무가라는 다소 생소한 노래 중에 ‘천지로 장막 삼고’라는 제목의 글은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하여 얼마나 흥미로운지 모른다.
천지(天地)로 장막 삼고, 등칙(등나무와 칙)으로 베개 삼고
잔디로 요를 삼고, 떼구름으로 차일 삼고
샛별로 등촉을 삼어
이 무가를 보면 저자의 설명처럼 인간과 자연은 마치 손등과 손바닥처럼 서로 떼어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이미 하나라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얼마나 친자연적이며 호기로운 노랫말인가. 동시에 오늘날의 환경문제 생명문제의 근원적 성찰이 이 노래 안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오늘날 돌아보면 어떠한가. 천지는 이미 장막을 삼을 수 없을 만큼 뿌옇게 오염되어 숨쉬기조차 어렵게 돼 버렸으며 우리의 요가 돼 주어야 할 잔디나 들판의 풀들은 인공적으로 정돈되고 수시로 뿌려지는 농약들로 인하여 마음놓고 뒹굴 수 있는 요가 더 이상 아니며 밤하늘에 떠 있어 등촉으로 삼아온 뭇 별들은 우리의 시야에서 뿌옇게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이 무가의 노래말처럼 다시 천지 자연을 우리의 장막과 등칙으로 삼을 수 있는 날이 우리의 환경과 생태운동의 종착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의 말미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아름다운 말로 장식되어 있다.
‘꽃과 어린이와 새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두려워할 것이 없다’
꽃과 새는 자연이요. 어린이는 희망이자 순수의 상징이다. 인류는 더 이상의 과도한 소비와 파괴적인 개발의 미망에서 벗어나서 이와 같은 상징이 지향하는 바대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꽃과 어린이와 새는 가장 여리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닐까.
지난 여름, 휴가를 맞아 강원도 태백 일대에 다녀 왔었다. 예전에 탄광촌으로 흥청대던 태백과 삼척에서 영월까지 그야말로 일제 식민지를 거쳐 해방이후 한국 경제발전의 한 중심을 담당해 왔던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만큼 그곳의 자연은 무참히 파괴되었고 그 험준한 태백준령은 수십 킬로미터의 땅속까지 마치 개미굴처럼 파헤쳐져 앞으로의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깊은 병이 들어 버렸다. 사람도 자연도 지칠대로 지쳐 그 피로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 석탄이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자 사람들은 떠나 버렸고 자연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그 놀라운 생명력으로 차음 원기를 회복해 갔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외양상으로는 대부분의 상처가 치료된 듯 계곡은 맑은 물이 찾아 들었고 숲은 다시 무성해 졌으며 산들은 푸르기만 하다. 태백일대를 포함해서 강원도일대는 우리나라의 허파라고 할 수 있다. 일부지만 그 곳이 다시 정상적인 숨을 쉬는 곳으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개발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그 개발이 가져다주는 패혜가 결국 인간의 삶의 질을 형편없이 낮출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자연은 무서운 것이며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들판에 자라는 풀 한 포기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일찍이 깨우친 선조들의 혜안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앞으로 우리가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엮은이의 해석대로 성경 창세기의 ‘땅을 정복하라’라는 말을 문자대로 해석해서 정복하여 지배하라는 말이 아니라 인류에게 주어진 자연을 잘 관리하라는 말로 받아들일 때 앞으로의 인류에게 그나마 작은 희망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의 그 험한 벼랑길을 돌면서 안을 도통 보여주지 않는 검은 숲들의 원시성에서 우리나라의 푸른 미래도 조금은 확인할 수 있었다면 과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