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
로저 스크루턴 지음, 류점석 옮김 / 아우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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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인 문화가 이제 서서히 저변을 넓혀가는 것 같다. 특별한 자리에서 마시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와인은 몇 년 전부터 와인을 학습(?)하고 함께 즐기는 모임들이 생겨나면서 조금 전문적인 방식의 애호가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와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좀 갖추고 싶었던 한 사람으로 이 책이 반가웠다. 이 책의 저자가 철학자인지라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펼쳐갈 지도 사뭇 궁금했다. 

  우선 책의 앞 부분은 철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철학자와 와인을 접목시켜서 이야기한다. 어떤 철학자의 책을 읽을 때는 어떤 와인이 어울릴 것 같고, 어떤 철학자가 늘 마시던 와인은 그의 철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등등이다. 이 독특한 철학 강의(또는 와인 강의) 방식은 처음에는 조금 낯설지만 읽다보면 저자의 철학자다운 유머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철학이 너무 어렵다고 느껴지는 독자는 이 장을 건너뛰고 좀 더 흥미로운 다음 장부터 시작해도 될 것이다.: 

  거의 모든 환각제는 사물을 가리는 반면에, 어떤 환각제들(특별히 와인)은 사물을 이상적인 형태로 재구성하여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사물을 직면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p. 56)

  이 책에서 나는 와인을 철학의 동반자로, 철학은 와인의 부산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내 생각에 와인은 음식과 훌륭한 짝을 이루지만 철학과는 더욱 좋은 짝이 된다. 와인을 마시며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철학 안에서 술을 마시는 법은 물론, 술 한잔 속에서 사색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p.62)

  저자는 와인을 단순히 기분을 고조시키거나 휴식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적 연구에 깊이를 더하고 삶에 대한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는 매개로 여기며 존중한다. 미학을 강의하는 저자는 자주 음악에 비유하여 와인을 평가하는 데 독자가 공감하기는 힘들다. 와인에 대한 그의 해석을 이해하는 것에 각각의 음악에 대한 그의 해석을 유추하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랑 에셰조를 말로 표현하고자 머리를 쥐어짰다. 그때 내게 떠오른 문구는 "생상스의 첼로 협주곡 2번-바람의 요정같이 베일에 싸인 깊고 오묘한 테너 음조"였다. (p.78)

  차라리 나의 입장에서는 맛 자체에 대한 현란한 수사를 곁들이는 해석이 이해하기에 더 쉬운 것 같았다. 퓔리니-몽라셰에 대한 그의 평을 보자.:

  이 백포도주는 내가 트로타누아를 훔쳐마실 때와 같은 계시를 보여주었는데, 잔 속에서 떠오른 한송이 버터같은 꽃잎이 사과맛 나는 수정빛 열매를 둘러싸고 있었다.(p.74)

  철학자에 대한 장을 지나면 책은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에서 영감을 얻어 '나는 마신다.' 와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장의 이름을 정했다.

  '나는 마신다.' 장은 자신이 와인에 입문하던 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신에게 와인의 맛과 철학을 가르쳐 준 이들을 '바쿠스의 사제'라고 존중하며 세 사람의 애주가에 대한 추억과 그들이 가르쳐 준 와인에 대해 추억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동하던 과정을 보여준다.  이어 와인 재배지와 토양, 와인농가의 역사를 들춰내며 와인을 연구하며 맛보며 저자는 최고급의 와인들의 이름과 그 감동을 독자에게 전해둔다. 프랑스의 각 지방별 와인의 역사와 맛의 차이 등등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저자 특유의 철학과 미학에 곁들여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장은 매우 사색적인 장이다.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존재 의미를 분명하게 해주는 와인의 역할에 대한 철학이 펼쳐진다.:

   와인은 영혼에 영혼의 육체적 기원을 , 육체에는 육체의 정신적 의미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와인으로 인하여 우리는 번듯한 인간이 모습을 갖춘 의미있고 정당한 존재가 된다. (p.182)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책이지만 앞 부분을 꼼꼼하게 읽으며 저자의 수사학과  철학, 미학, 음악에 대한 넘치는 지식체계를 이해하면 뒷 부분부터는 이해하기 쉬워진다. 와인 속에서 철학과 미학과 음악의 향연을 찾아내는 독특한 저자 덕분에 와인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여하간 와인은 알 수록 어려워지는 미묘한 술이며 공부를 해야 이해하며 마실 수 있겠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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