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 오래된 사물들을 보며 예술을 생각한다
민병일 지음 / 아우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낡은 것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들을 가져다준다. 낡아지기까지 수많은 손길들이 그것들 위를 스쳐갔을 것이며, 그러면서 누군가의 추억이 그 물건들 위에 쌓였을 것이다. 때로 손때 묻은 물건들은 낡았다는 이유로 버림받기도 하지만, 그 낡음이 바로 추억의 깊이라는 같은 이유로 애착과 미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낡은 물건이 아니라 타인들의 손에서 낡은 물건들을 수집한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독일 유학시절에 그는 낡은 물건들을 대하는 독일인들의 모습에서 그 나라 사람들의 감성을 읽어낸다. 그래서 휴일이면 배낭을 매고 벼룩시장을 다니면서 그들이 자신의 추억이 깃든 물건을 팔면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공부하기 위해 몸담고 있는 나라 독일의 정신을 이해하고,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는 기회를 가진다. 
  주인이 들려주는 사연과 함께, 또는 벼룩시장에서 그 물건을 만나게 된 인연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와 함께 저자의 소유가 된 사물들은 다시 그만의 감성이 그 위에 덧입혀지고 그의 방식대로 길들여져 이제 우리 앞에 더 길어진 사연들을 풀어놓는다.
  마음에 온기를 전해줄 것 같은 따스한 빛의 유겐트슈틸 램프, 저자에게 서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기억하게 해준다는 남색의 마이센 도자기, 마른 풀꽃 냄새가 책 밖으로 스며나올 것 같은 50년된 마른 풀꽃 액자, 그리고 아주 사소한 그러나 잊기어려운 기억들을 끄집어 내주는 단추들, 몽당연필들, 색연필들, 연필깍기들...  일회용이라는 말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에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들의 견고한 아름다움,  물건들의 소중함을 알던 시기에 사용되면서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보관된 물건들은 우리는 잃어가고 있는 어떤 가치들을 발견한다.
  소개하는 물건들을 담은 저자의 사진에서 그의 감성이 번져나와 이 책은 더욱 감성적인 책이 된다. 저자의 문장 속에 흐르는 지성의 무게와 감성의 깊이 또한 대단하다. 음악, 미술, 디자인에 대한 그의 매니아적 몰두가 느껴지며, 어떤 삶의 과정이 그런 감성을 가진 이로 단련시켰을지 궁금할 정도로 섬세하고 애잔한 감성이 느껴진다.
 
  음악과 그의 기억이 하나가 되며 애잔한 감성이 글에서 잘 묻어나는 구절을 한 번 베껴본다.:
  슈바르츠코프가 부른 슈베르트의 <들장미>가 라디오에서 나오자 나는 노래를 시작할 때의 청아함과 뒷부분 고음부에서의 눈부시도록 투명한 음색에 반해 노래가 끝날 때까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슈바르츠코프의 단아하고 고혹적인 미성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정전된 것 같은 어찌할 수 없는 마음에 석고상처럼 선 채로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이 노래를 들으니 유월의 아침 등교 길에서 본 하얀 교복을 입은 백장미 같은 여학생들이 생각나고, 화강암 담장에 무리지어 핀 빨간 줄장미 향기가 생각난다. 장미 향기가 라디오 소리에 배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소리에는 왠지 잠들지 못하는 고독이 묻어난다. -<그룬디히Grundig 라디오의 진공관 소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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