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
베쓰야쿠 미노루 지음, 송선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책을 만날 때 독서는 절망스럽다. 얼핏보면 장난스러운 어렵지 않은 대사들이 오고가는 희곡이지만 이 책 속 의 대사들은 서로 질문과 답이 연결되지 못하고 끝없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대사들의 진실은 왜곡되고, 엉뚱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독자는 당황하고, 때로 그 숨은 뜻을 찾으려 그들 속을 편력한다.

  막이 열리면 의사와 간호사가 등장한다. 그들은 환자를 찾아다니고 있다. 이어 목사가 등장한다. 그는 임종을 맞을 이를 찾아다니고 있다. 병든 이와 죽을 이를 찾아서 떠돌고 있는 이들은 사실은 자신들이 떠돈다는 것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 우연을 가장하며 각각 자신들이 찾은 이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세상을 편력하던 이들이 한 곳에 모였다.
 이어 주인과 딸이 등장한다. 그들이 이 연극의 무대, ‘이동식 간이 숙박업소’의 주인이다.  그러니 그들도 숙박객을 찾아 세상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숙박업소에 있는 주전자의 물에 독약이 있을까? 누가 독을 넣긴 한 것일까? 저어하며 서로를 의심하고 있을 때 두 기사와 그들의 종들이 나타난다. 기사1과 종1, 기사2와 종2이다. 그들은 늙고 지치고 병들어 보인다. 조건에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났다 싶다. 의사는 그들을 환자로 보려하고, 목사는 그들이 임종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물론 숙박업소의 주인은 그들을 숙박객으로 본다. 모두가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그들을 읽는다. 그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동하는 숙박업소에 세상을 떠도는 인물들 모두가 만난 이 무대 자체가 편력하는 불완전한 세계들의 만남이다.
  
  기사들이 나타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아주 장난스럽게 마치 의도되지 않은 실수처럼, 또는 마술사의 마술행위같은 순진한 속임수처럼 살인들이 행해진다. 그런데 어이없게 기사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들이다.
   돈키호테는 정의를 위해서 싸웠다. 그러나 이 극 속의 기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심지어 싸우지도 않고 비열한 속임수로 상대를 죽이며 결투의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결투를 하고 돌아온다. 이런 치사한 말로 살인을 변명하기까지 하면서...: '우리도 특별히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게 아냐. ...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니까.' 그들에 의해서 등장인물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간호사, 의사, 숙박업소 주인, 목사가 차례로 살인된다.  종2도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 죽는다. 자신들을 죽여주리라고 기대했던 숙박업소의 딸도 자결하고 만다. 종1은 풍차와의 결투를 위해 돌진하여 죽는다.
 
   기사1과 2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들의 희망과 달리 그들은 또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살아있어도 진정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명분도 모험도 사랑도 없는 모두가 떠난 이 세상에 오직 그들의 육신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흔들리는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명분도, 사랑도, 모험도 모두 흔들리고 의심받는다.

  책을 덮고 두 기사를 생각하니 이 노래가 떠오른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잘 살고 못 되고 찰나의 것이니
   흉흉한 암초는 가까워 오도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내 님도 다 싫다
                             -윤심덕 <사의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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