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하나로 세계인을 사로잡은 괴물같은 기업, 나이키 이야기 [마이클 조던
이야기]편
1980년대 중반부터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의 회생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에, 나는 책의 한 부분을 할애해 조던 브랜드 사업부와 조던 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984년과 1992년에 미국 농구 국가대표로 올림픽대회 금메달을 획득한 조던은 2009년 9월에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Naithsmith Memorial Basketball Hall of Fame, 명예의 전당은 사회 각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을 기리는 기념관을 뜻하며, 농구 명예의 전당 앞에 붙은 네이스미스라는 명칭은 농구의 창시자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의 이름에서 따왔다)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는 선수 생활을 하며 1988년, 1991년, 1992년, 1996년, 1997년에 NBA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농구는 제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조던은 명예의 전당 입성 연설에서 이렇게 운을 뗐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과거에
그의 능력을 전혀 믿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특히 고교 시절에 조던을 학교 농구대표팀에서 탈락시킨 감독의 이야기는 큰 관심을 모았다.
“전 당신께 제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큰 실수하신 거예요.”
그는 마치 옛 감독님에게 직접 이야기하듯 청중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 감독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그는
조던을 대표팀에서 탈락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으리라. 조던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1학년 때 미국대학농구NCAA Basketball 결승전에서 경기 종료와 함께
승리를 결정짓는 슈팅을
성공시켰다. 그는 1983년과
1984년에 <더 스포팅 뉴스The Sporting News>가 선정한 ‘올해의 대학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3학년을 마친 그는
1984년에 드래프트(draft, 신인선수 공개선발제도)를 통해
시카고 불스에
입단했다.
조던은 명예의 전당 입성 연설에서 프로 세계에 발을 들인 후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이 겪었던
고난을 이야기했다. 마이클 조던은 시카고 불스와 워싱턴 위저즈Washington Wizards에서 활약하며
역대 최고의 농구선수라는 칭호를 얻은 인물이기에, 그가 농구 실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었다.
조던은 선수 생활 초기에 수많은 언론 매체가 그를 다른 여러
선수와 끝없이 비교하고, 또 그가 결코 래리 버드(Larry Bird, 1980년대에 보스턴
셀틱스의 우승을 이끌고 NBA 정규리그 MVP를 3년
연속으로 수상한 백인 선수)나 매직 존슨(Magic Johnson, 1980년대에 LA 레이커스에서 활약하며 여러 차례 팀의 우승을 이끈 장신
포인트가드로, 래리 버드와 매직 존슨은 다재다능함의 상징이자 당대의
맞수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같은 승자로 남지 못하리라 못 박아 말했다고
회상했다.
# 저는
그렇게 온갖 억측과 비교의 말을 들어야 했고,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매일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움직이게 하는 연료가 됐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매직, 래리, 조지 거빈, 그리고 다른 모든 이에게 제가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서도 마땅한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선수
생활 동안 그 목표를 의심할 여지없이 잘 완수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는 비판론자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어서 결승전
MVP상 5개와 NBA 우승반지 6개를 자신의 업적에 추가했다. 조던이 부와 명성을 막 손에 넣기 시작할 때 그의 재능을 알아챈 나이키 사람들은
재빠르게 후원 계약을 맺으며 1985년에 첫 번째
에어 조던 농구화를
출시했다. 그 후로는 나이키에서 새로운 에어 조던을 발표하는 일이
일종의 연례행사처럼 자리 잡았다.
열정으로 시작해 꿈이 된
기업, 나이키 이야기 72페이지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