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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구판절판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34쪽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 -39쪽

그는 읽으라는 말을 듣고 읽었고, 쓰라는 말을 듣고 썼으며, 그리고 시를 읊은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139쪽

철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철학과를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문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문학에 종사하는 걸 그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문학부 교수도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뭐든지 결국은 경제라고 말한다면 처음부터 경제학자가 되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돈을 벌기 위해 회사라도 차렸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의견으로 정치를 좌우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관료나 정치가가 되면 좋았지 않았겠습니까?-225쪽

"아니, 그런 줄 알고 하고 있다"는 등의 변명을 듣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 수 없는 겁니다. -226쪽

그렇습니다. 지금은 전야입니다. 이 전야가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도 사라지기로 합시다. 우리의 밤 속으로. 우리의 싸움 속으로. 우리의 승리하고 패배하는 환희 속으로.-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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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이데올로기 최인훈 전집 12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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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이 지적했던 바와 같이, 최인훈 문학에 있어 제갈공명은 대단히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공명에게서 시인의 이데아(희망)를 보고, 우울한 근대 지식인의 초상인 이순신을 떠올리며, 근대의 어떤 불가능성을 예감한다. 사태는 이렇다.

 󰡔문학과 이데올로기󰡕에 수록되어 있는 에세이 「공명」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시작된다. 최인훈은 꿈속에서 제갈공명을 본다. 그는 수레를 타고 길을 지나가고 있으며, 최인훈 자신은 먼 발치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잠에서 깬다. 멀리서 공명이 타고 가던 수레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고 최인훈은 그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최인훈이 (역시)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공명의 ‘책읽기’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공명이 읽었을 책의 대부분은 병서(兵書)인데, 그것은 생활의 경험이 반성과 사색을 거쳐 책의 형태로 나온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순수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최인훈의 생각으로는, 중국은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인구를 기반으로 중국-천하-세계라는 보편주가 생리화 되어 있다. 이는 공명과 같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보편-특수 사이의 조화 감각을 가져다 주는데, 달리 말하면 세계와 자기에 대한 인식이 합일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책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일치되어 있으며, 병서(와 그 밖의 책들)는 여기서 완전한 정신을 단련시키는 하나의 세계로 기능한다. 책으로의 망명(도피)은 여기서 일어나지 않는다. 산속에서 책만 읽는다 하더라도, 정신속에서 세계는 이미 완전히 독해가능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귀 큰 것 빼곤 아무것도 내새울 것이 없는 유비가 공명을 찾아와 책 밖으로 나올 것을 권유한다. 정치적 결단을 요구한 것이다. 공명은 거절한다. 이미 그의 ‘정신적 시력’은 완성되어 있으며, 현실에서 더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공명이 결국 유비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최인훈의 질문은 이렇다. “공명의 순수하고 완전한 삶을 현실에서도 허락할 것인가? 현실을 시처럼 살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현실이 될 수 있는가?, 정치는 시가 될 수 있는가?, 삶이 책이 될 수 있는가?’ 대답은 -적어도 공명에게 있어서만은- 그렇다.

 공명이 책에서 나와 군담소설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삼국지의 서사의 성질은 완전히 변화된다. 공명은 슈퍼맨이고, 초인이며, 프리즘이 되어 현실의 불투명함을 명료하게 바꾼다. 그의 등장 이전에 사실주의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반영하던 󰡔삼국지󰡕는 그의 등장 이후로 게임의 양상이 뚜렷해지며, 관념화·심리화의 길을 걷게된다. 책처럼 정치를, 전쟁을, 그리하여 책처럼 인생을 사는 공명에게 경국(經國)은 ‘순수행위이며 후회없는 앙가주망’이다. 공명의 출사표는 글인 동시에 현실이며, 행동 그 자체다. 그는 현실의 인간이면서 시 자체이고, 자신의 능력으로 시가 되고 있는 인간이다.

 요컨대, 공명의 삶에는 순수행위의 3가지 형태가 있다. 1. 책읽기의 끝(행동의 시작), 2. 행동의 끝(허구의 시작), 3. 허구의 끝(세계의 변화). 1. 책읽기가 끝난 후, 현실에서 그는 늘 이긴다. “이 비범한 인간을 매개로 하여 현실은 마침내 심리화되고 관념화되고 상징화된다.” 이를테면, 현실과 상징의 일치. 2. 행동의 끝, 즉 공명은 죽는다. 그러나 몸을 잃어버린 후에도 그의 마음은 ‘행동’을 만들어낸다. 공명은 자신이 행동하거나, 병기를 이용하거나,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돌들(자연)을 행동시킨다. “돌들에게 미리 뜻을 주어 숨겨두었다가 그들의 디데이에 그대로 행동하도록 돌들을 정확히 짜놓은 것이다.” 육체를 잃었을 때, 순수행위는 더 완벽해진다. 이를테면, 자연사를 통한 인간사의 변화. 3. 허구도 끝난다. 공명이 등장했던 역사의 시간은 끝나지만, 그는 시가 된다.

 그러나 공명처럼 사는 것, 다시 말해 시가 되는 지식인이란 불가능하다. 전 군대를 움직이고, 그리하여 창업지신(創業之臣)이 되어, 자신의 삶을 역사에 일치시키는 그런 삶이란 애초에 근대적 지식인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기껏해야 ‘신문지 한 장으로 국내의 정세를 더듬어야 하는’ 우울한 근대 지식인에게, 공명의 삶은 꿈에서나 간신히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꿈이다.

 해서 최인훈은 꿈깨기 작업으로 이순신을 떠올린다. 초인적인 능력, 인품의 공명정대함, 비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면목은 이순신과 공명의 공통점이지만, 자신의 직접적 행동을 통해 역사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근대 지식인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공명의 비극은 ‘하늘의 비극’이지만, 이순신의 비극은 ‘인간의 비극’이다. 그리하여 공명의 정치적 행동은 적에 대한 ‘갤런트리’로 나타나지만, 이순신의 경우에는 ‘순교’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최인훈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신통한 행동 하나 없는 삶’이다. 그러나 최인훈은 그 ‘꿈’을 꿈 만으로 남겨두지는 않는 것 같다. 꿈 - 공명 - 이순신 - 꿈깨기로 이어진 이 글은 다시 꿈을 꾸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다시 공명이 남기고 간 수레바퀴 자국을 떠올린다.

 

그러나 인제야 졸음이 참을 수 없이 밀려온다. 생각을 지탱할 수 없이. 옳다. 거기서. 거기 가서 생각해보자. 그 들판에서. 좀 전의. 수레 자국이. 남아 있을. 그. (p. 173)

 

 

 

 

 


 

 

최인훈 끝.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온다.

 

책표지가 절묘하다.

책 속에 책이 있다. 책 속의 책 안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불기둥은 책 속의 책을 뚫고 나오지만 책 밖으로 나오지는 못한다. 여전히 불꽃을 보기 어렵다. 완전연소 되어버렸거나, 걷잡을 수 없어 외면해버리는 화염들이 있을 뿐.

 

걸어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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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의 소리 - 개정판 최인훈 전집 9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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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진정한 숙고의 힘으로부터 제기된 창조적 물음과 사색의 과정을 통해서만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그것’[존재]을 알게 되며, 그것을 자신의 진리 속에서 참답게 보존하게 된다. 이러한 숙고로 인해 앞으로 도래할 인간은, 그 안에서 자기가 존재에 귀속하면서도 존재자들 속에서는 낯선 자로 머물게 되는 그런 ‘사이’(Zwischen) 안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하이데거가 근대의 근본과정을 ‘세계를 상으로 정복하는 과정’이라 정의했을 때, 그리하여 출현하게 된 근대 학문의 전개를 ‘세계관의 논쟁’을 둘러싼 존재자의 ‘결단’의 과정으로 정립했을 때, 역설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시인의 언어였다. 기술(techne)의 미시화를 통해 개별 존재에게 표상되는 세계는, ‘언제라도 철저히 계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의 가시화가 아니라 오히려 ‘더 이상 계산할 수 없는 그것’이 되고 만다. 표상되지 않는 공간인 동시에 ‘존재의 진리가 일어나는 열린 터전’이기도 한 이 그림자. 이 그림자를 사색하는 인간, 그리하여 광기의 언어를 실어나르는 시인(횔덜린)이야말로 하이데거에게는 근대시의 탄생을 알리는 존재였다.

 

 그와는 반대로, 그러나 동시에, 저 ‘알 수 없음’과 ‘볼 수 없음’의 무기력 그 자체가 대도시 체험으로부터 촉발된 근대시의 출발이기도 했다. 서정시의 불가능성을 노래하는 최후의 서정시. 악취, 소음, 난투가 폐허처럼 쌓여가는 길목에서 판에 박힌 언어를 토해내는 사람 또한, 아니 이 사람이야말로, 파국의 징후가 끝없이 쌓여가는 근대세계의 종말과 구원을 동시에 낚아채는 시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세계의 인식 불가능성과 시인의 사명, 정치와 일상, 역사와 현실, 파국과 구원 사이에서 내내 서성이며, (세계를)쓰면서 (세계를)읽고 싶은 사람이 있다. “달에서 지구를 본 육체의 눈만한 의식의 눈이 있다면. 지구는 한 줄의 시가 되리라. 지구는 말이 되리라. 지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눈이 있다면 둥근 슬픔의 그림자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들리는 건 소리요, 나오느니 비명 뿐인 세계의 밤. 「총독의 소리」는 새벽을 기다리는 시인이 이 세계의 비밀같은 사실을 누설하는 ‘조선총독부지하부’의 방송의 장광설과, 그것을 듣고 난 후 자신이 발붙인 현실의 어찌할 수 없음을 떠올리며 쓰기를 예비하는 과정에 대한 소설로 읽힌다. 세계를 단숨에 독해해버리는 총독의 소리와, 그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을 때 ‘이 도시를 바라다보면서 오래오래 서있는’ 시인이 떠올리는 파국의 상황으로 구성된 이 (소설 같지 않은)소설은 공히 저 ‘계산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해석 욕망과 눈 앞에 보이는 해독불가능한 현실 사이의 간극 그 자체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아는 것이다. 󰡔구운몽󰡕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 방송은 ‘세계상’간의 투쟁에서 소외된 개인을 그리는 장치로 기능해왔다. 독고민은 자신을 각하로 지목하는 혁명군과 정부군의 방송 사이에서 어찌할 줄 모르며 도망가기만을 반복했고, 독고준은 ‘그 해 여름’을 찾아가는 의식 속에서 방송을 듣지만 이내 자신에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태풍󰡕 이후에는,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저 수다스런 방송이 세계에 대한 일말의 진실과 비밀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시인에게만 들리는 이 비밀의 방송과 현실사이에는 여전히 큰 괴리가 존재한다. 파국의 진실을 듣고, 처음에 시인이 내밷는 것은 다만 ‘아구구아구구아구구구아구구구구. 비명’이다. 그런데 이후 이어지는 「총독의 소리」에서 방송을 듣는 시인은 이미 쓰고있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들리는 방송에 대해서 이렇다 할 평가나 대응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이 파국의 상황을 구원의 순간으로 전화시키기 위해 더한 파국의 순간을 요청하고 있다.

 

밤이여 익어라. 밤이여 익어라. 땅이 썩고 눈이 먹물처럼 흐리도록 밤아 익어라. 마지막 한마디를 어느 시인이 쓰는 순간에도 지구는 가라앉지 않는다. 밤은 더 익기를 원한다. (중략) 더 많은 재앙을. 풍성한 재앙을 (19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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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역사 하얀 이론 - 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 한길신인문총서 18
이경원 지음 / 한길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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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버트 영이 맑시즘을 중심으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계보와 실천적 함의를 재구성하려고 했다면(<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 이경원은 제3세계 민족주의를 그 중심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 모두 서구 아카데미즘의 문법 안으로 경사되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저항적 실천이라는 본래적 의미를 상실해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탈환을 위한 방법과 연대의 가능성을 각각 다른 곳에 걸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경원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저항담론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주된 이유로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어색한 결합’을 꼽는다. 계급과 민족을 ‘이론적 허구’로 치부하는 풍토가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서구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경원은 ‘아직도 물질과 정신의 탈식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과도기’로 규정된 현재의 상황에서, 제3세계 민족주의는 서구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전제 안에서 이 책은 ‘탈식민주의’의 계보를 흑인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구라는 저항의 대상은 점차 선연해지고, 흑인 민족주의, 범아프리카주의, 네그리튀르와 같은 저항적 실천과 이론을 주창했던 이들의 이론적 지반이 되짚어진다.  


 여기서 저자가 가장 힘주어 설명하는 이론가는 역시 ‘파농’인데, 파농을 둘러싼 연구경향의 변화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이론적 모순을 가속화하는 기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 연구의 경향이란, ‘하나는 1960년대 아프리카 민족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미국의 신좌파, 흑인 과격단체에서 주창한 ‘고전적 파농주의’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이후에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탈식민주의·문화연구 등의 영역에서 전개되는 ‘비판적 파농주의’다.’(184) 여기서 고전적 파농주의는 오로지 마르크스적 파농만 부각시켜왔고 비판적 파농주의는 프로이트적 파농에 주목한다. 호미 바바를 필두로 하는 ‘비판적 파농주의’는 결국 투쟁을 중시하는 마르크스적 파농은 점차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 결과 ‘정신분석학과 탈구조주의에 거의 무비판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비판적 파농주의’는 서구이론 속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그러나 위와 같은 이경원의 논지 또한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의 말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도하는 온갖 이론의 향연이 우리의 비판의식을 혼미케 하며 피아의 식별마저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 그리하여 그 특유의 완고한 저항의지를 내장한 민족주의가 역설적으로 다시 요청된다면, 도대체 그 적은 누구인가. 그가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아마도 그것은 문화다원주의, 초민족주의, 세계화, 자본화 등으로 일컬어지는 서구 문화제국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과연 ‘민족주의를 시대착오적 골동품으로 우리 스스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서구의 전략이고 문화제국주의의 결과인 것일까. 이경원이 한국 내부의 바바로 생각하고 있는 인물들은 대개 임지현과 같은 민족주의 비판론자들이다. 그의 도식대로라면, 내부 파시즘과 같은 논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문화제국주의의 음모를 무비판적으로 수용·내면화한 결과로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이러한 논리는 자본화에 뒤따르는 대규모 이주, 국가의 제국적 통치기술 학습, 내부 하위주체에 대한 제국주의적 이분법과 같은, 말하자면 제3세계 내부의 제국주의적 열망에 대한 반성의 산물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서구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즉 제1세계의 자기반성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같은 논의가 대규모로 발생하게 된 원인에는 이미 준제국적 위치에 도달한 한국 내부의 현실적 징후와 증상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할 때, 민족주의가 제국 질서에 대항하는 저항담론이 될 수 있는가. 아니, 한국은 여전히 제3세계의 범주 안에서 파악될 수 있는가. 
 

 또한, 이 책이 설정한 제1세계와 그에 대립하는 제2세계, 제3세계라는 구도가 어느 정도의 현실적 규정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여전히 서구와 비서구라는 이분법적 대립에 기초하고 있는 이러한 구도는 제3세계의 저항의 산물인 탈식민주의가 ‘지배-내-구조화’ 되면서 발생되는 또 다른 지적 제국주의의 반복에 대한 경고처럼 들린다. 여기서 하나의 전제는 모든 ‘‘타자에 관한’ 또는 ‘타자를 위한’ 재현은 결국 주체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로부터 전유된 탈식민주의 또한 주체중심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을 자생적으로 발생했던 저항적 탈식민주의를 제3세계가 탈환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이 주체의 이동이 저항의 공간을 산출한다는 논리인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논리가 가지고 있는 함정 즉, 각 사회 내부 혹은 국가 간의 역학관계나 대립의 구도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예컨대 이 책에서 제3세계 민족주의 혹은 민족문학의 연대를 주창할 때, 그 범위가 모호해지거나 느슨해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아마 그 제3세계라는 범주를 한·중·일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에 끼워 넣으려고 할 때에 생기는 이물감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현재 상황과 흑인의 저항 민족주의를 겹쳐 저항의 대상으로 서구를 지목하는 것이 다소 어색해지거나, 나이브한 것이 되고 마는 이유와도 상통한다. 물론 이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통째로 생략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큰 틀에서 설명하고 있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계보학은 한국학 연구, 혹은 실천적 탈식민주의에 대한 몇 가지 생각할 점을 제시해준다. 아프리카나 알제리와 같은 곳과는 달리 한국에서 탈식민주의는 지속적으로 저항해야 할 대상이 이미 사라진 이후에 본격화되었다. 또한 그것은 이미 국가 간 협의를 통한 정치적 해소 이후 식민지 유산의 청산, 심정적 증오와 같은 형태로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달리 말해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처단과 저항이 이미 차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탈식민적 실천이 내부자(협력자)에 대한 고발이나 처단의 형태로 대리보충된 것은 아닐까. 파농의 말대로, 폭력이 피식민자를 주체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면, 그러한 계기가 말소되어 버린 상황에서의 탈식민주의란 어떤 모습인가.
다른 한편, 탈식민주의의 서구적 전유 이후 본격화된 식민지 연구 혹은 한국학 연구의 궤적과 전망도 이 책을 통해 생각해 볼 문제이다. 파농 이후의 서구에 의한 포스트콜로니얼 연구의 포식은, 이 책이 말하는 대로 어떤 면에서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일환이었던 탈식민주의를 언어의 유희로 변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혹은 보다 정교해지는 이론적 기반과 서구적 인식론과 철학적 계보에 기반을 둔 아카데미즘으로의 포섭이 한국학의 한계를 규정짓거나 구미에 맞는 성과만을 산출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것은 90년대 이후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채,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로의 방향전환을 맞았던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저간의 사정과 함께 사유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저항사 이후 탄생과 기원을 문제 삼는 근대성 연구, 지배자의 언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권력 분석 등으로 논제화 된 식민지 연구의 역사적 맥락을 되짚어보는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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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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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를 단번에 읽어낼 방법은 존재하는가. 더욱이 그것이 한 사람 안에서 인지되고 체험되는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면? 제각기 다른 표정·생각·판단 하에 한 장소 안에 모인 군중, 그리고 그들의 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릿하게나마 공통된 목적. 아마도 그것이 한 사람에 의해 단숨에 그려지기 위해서는 그 속의 있었던 한 인물의 내면을 읽고·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리라. 하지만 그들과 그 시간 전체를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는 방법 또한 만족스럽지 않다. 그렇다면 ‘황폐성’과 ‘무질서성’으로 가득한 이 유물과 마주한 ‘고고학자’의 과제란 어떤 것인가. 이 폐허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나의 영화이기도 하면서, 꿈이기도 한, 하지만 일어난 사건의 토대 위에 서 있는 이 소설은 ‘미궁 속에 빠진 몽유병자’인 독고민이라는 인물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황해도 출신으로 포목상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한국전쟁 때 남하하여 2년간의 군 복무 후에, 넥타이·군복·고구마·무연탄 장사를 거쳐 미군부대의 ‘궁정화가’가 되었다가, 지금은 ‘간판가게 점원’인 이 말 없는 인간의 꿈은 ‘숙’과의 재회를 위한 목적 속에서 순환한다. 애초에 죽은 인물로 등장하는 이 사람에게 표정이란 없다. 그는 장소와 인물들을 건너 뛰어가며,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사는 ‘얼굴 없는 화자’이며, ‘A이면서 A가 아닌’자이다. 이와 같은 서술자의 꿈 속에서는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기시감 속에서 서술된다. 독고민이 사랑한 ‘최초의 여자’의 얼굴처럼 ‘왼쪽 뺨에 까만 점’을 가진 여성이 9명 등장하고, 말 없는 ‘사팔뜨기’ 여성이 2번, ‘빨간 넥타이’를 찬 남성이 최소한 2번 등장한다. 무엇보다 ‘독고민’의 삶은 ‘김용길’ 박사의 삶과 겹쳐지고, ‘간호부장’의 죽은 아들의 얼굴과 겹친다. 여기서 김용길 박사는 「라울전」에서 나타난 바 있는, ‘보지 않고 믿는 것’과 ‘보아야 믿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토끼, 말, 코끼리의 우화 속에서 현대 주체 분열의 현상을 발견해내고, 그것이 현대사회에 와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재현되는 것에 대해서, “처음부터 가라앉지 않도록 뜰 주머니를 주고, 분열하지 않도록 코르셋을 주”어 해결하려는 ‘도마의 형제’로 묘사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동일성의 사유를 밀어붙여 보자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독고민’의 존재는 김용길 박사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면서 그 비동일성을 재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개체로 존재하되 개체가 아닌 자, 인류의 기억의 두께가 잠재되어 있는 자로서 독고민은 그 자체로 구원을 예비하기 위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흔히 ‘5.16에 대한 소설적 대응’이라고 설명되어 온 󰡔구운몽󰡕에서 최인훈이 구상했던 것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혁명군과 정부군의 대립 속에서 쫒기는 독고민은 혁명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혁명의 공통 기억을 재현하는 자이다. 결단에의 요구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이 인물은 끝내 이렇다 할 말을 하지는 않지만, 고고학 입문 필름을 보고 나와 크리스마스 거리를 걷는 연인에게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추구자라는 면에서, 저 황폐성과 무질서성으로 가득 찬 역사의 증거로 여겨지는 그는, 혁명의 실패 이후에도 이어지는 공통감각을 드러내는 존재로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소설을 많이 읽고 있다. 그 대신 읽지 못하는 책도 늘어난다. 아이디어를 내고, 구조를 찾아, 문제를 조직한 후, 답을 내는 과정은 여전히 버겁다. 소설 분석에는 '이 쯤이면...'이 없다. 계속 부족하고, 그런한에서 말해져야 할 것들은 많지만, 그 모든 것을 기억해내고 배치하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작업이 아닌가. 어쨋든 써야한다. 폭풍전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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