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다시, 눈 비비며 현관문을 열었던 날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그 날, 나는 <느낌의 공동체>를 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했었고, 며칠 뒤에는, 같은 날 받아 잠시 보관해 두었던 <사유의 악보>(최정우)를 들고 같은 길을 향했다. 용산행 출발, 독서 시작. 나는 그의 글을 본적이 있다(그러니 샀겠지).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난장, 2010)에서, 또 뭔가 허접한 듯 하면서 이상하게 빵빵한 계간지 <자음과 모음>에서(내가 주로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자음과 모음󰡕은 자주 베게로 쓰인다. 높이와 가격, 모두 적절하므로). 아아!,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의 번역으로도. 그런 이유에선지 어쩐지, ‘트위터’에서 나는 그의 ‘팔로워’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그가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최정우-람혼(襤魂)에 대해 대충 이러한 이미지 연쇄를 가지고 있었다. 랑시에르-자음, 모음-베게(?)-그 사진-밴드(?)-알튀세르-그밖에 이러저러함. 그 덕택에 적어도 ‘양원’까지는 <사유의 악보>라는 제목이 썩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종로 5가’까지 3번을 오가는 동안, 적어도 3번의 저 연쇄의 파괴와 반가움이 있었다.

 첫 번째. 「서곡」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유의 악보’라는 것은 하나의 비유, 그것도 이론을 지극히 ‘예술화’한 하나의 비유일 뿐이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비유’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예술, 철학과 음악이 서로를 오직 비유로서만, 그리고 또한 오직 비유로써만 차용함으로써, 그렇게 서로 접속하고 흘레붙을 수 있다는 근본적/극단적radical 사실에 있다.(8)

 그리고, 읽는다. ‘음음...비유, 이론, 예술화, 이론, 예술, 철학, 비유, 비유, 접속, 흘레??!!’(‘흘레붙다’라는 말은 이 책에서 상당히 빈번하게 사용된다.) 이, ‘익숙한 낯섦(uncanny)’은 무엇인가...... 저 쉼표들...! 그렇다. 박상륭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4악장.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에는 이런 선언이 있다.

 ‘수비 실책’을 문제 삼는 감독의 시선은, 말하자면 여전히 ‘이사만루의 야구’라는 지평 위에 있는 것, 이는 탈근대를 근대라는 잣대로 파악하는, 그리고 그렇게 파악할수밖에 없는 몸짓이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듯 비평이라고 하는 하나의 문학적 행위가 저 야구 감독의 훈수, 저 가장 근대적인 문제설정의 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 ‘근대문학의 종언’이 아니라 ‘근대비평의 종언’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 (중략) “아침에는 전근대이고 오후에는 근대이며 저녁에는 탈근대인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한국이다.” 이 말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곳은 바로 한국 근대문학의 자리,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근대적인’ 비평의 자리에 다름 아닌 것.(150~151)

 다시, 읽는다. ‘감독, 탈근대, 근대, 비평, 훈수, 근대문학, 종언, 비평의, 종언, 몰락의, 그러므로 에티카’ 말할 것도 없이, 신형철이다. 이것이 두 번째. 그리고 저 것. ‘부를 수 있을 것’, ‘다름 아닌 것’. 마지막 세 번째. 김윤식이다.

 물론 이 이상한 반가움은 단지 몇몇 인용문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4악장과 변주1, 7악장과 8악장, 그리고 11악장을 참조). 그러나 지엽적이라면 지엽적일 수밖에 없는 이 편향(아, 나도 어쩔 수 없나 보다). 또한, 더 지엽적일 수밖에 없는 잔잔한 반가움들(바타이유,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아감벤, 마루야마 마사오, 랑시에르, 사이드, 그리고 언제나 벤야민).

 그래서 나는 이 악보를 앞에 두고 ‘잔잔하게’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된다.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이 최정우가 목표하고 있는 바이고, ‘악보’라는 것이 ‘하나의 공통된 기보법’이긴 하지만, ‘작곡가마다 악보를 적고 사용하는 방식은 서로 각기 다르’며, 또한 이것이 악보인 한에서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면, 어쩌면 이것의 연주자는 중창단이나 교향악단이 아니라, 하나의 ‘롹 밴드’가 아니겠느냐고. 문체와 사유가 어떻게든 관계 맺을 수밖에 없으며, 그 문체와 사유를 결정하는 것은 어쨌든 ‘한국어’가 아니겠느냐고.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필연코 ‘불협화음’을 목적으로 할 것인 이 ‘한국어 밴드’를 나는 이렇게 잠칭하려고 한다. ‘데쓰, 메탈, 멜로디’라고.  

2. 
 밴드의 구성을 이렇다. 기타 박상륭, 드럼 김윤식, 키보드 김진석(유감스럽게도 신형철은 밴드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컬은 (내 마음대로)최정우. 이것은 물론 하나의 가정인데, 무엇인고하니 이 밴드의 연주가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 안에서만 그가 말하는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허약한 가설 안에서 탄생한, 빈약한 멤버 소개를 하자면 이렇다.  

 기타에 데쓰 박상륭 - 끊임없는 ‘죽음’에의 탐구를 통해 유물론의 극단, 유심론의 첨단 사이를 왕복하며 소설타고 우주로 나아가려 했던 작가. 촥촥 감기는 한국어 선율(김현의 평을 참조)과 정신과 육체의 변증법을 통해 질주 · 탈주 · 속주하는 언어 현상학자. 한국제일이라 자부하다 친구들은 떨어져나가고, 음주를 일삼으며 캐나다와 한국을 오가다 이빨 나갔던 고독한 파이터(박태순과의 일화, 이문구의 회고 참조).

 드럼에 메탈 김윤식 - 근대와 반근대에 대한 기나긴 탐구의 여정. 고로 끝나지 않을 형벌을 감수한 한국형 시지푸스. 근대라는 바위를 밀어 올리며 그것에 균열을 내려고 했던 사람. 그래서 그 자신이 거암(巨巖)이 된 사람. 그래서인지 눈 굴리며 내려가는 탈-근대주의자들에 대해 썩소· 조소· 폭소를 내비치는 한국문학의 차도남. 그러므로 근대의 정신분석학자. 장시간의 연주(연구)를 소화할 수 있으며, 그래서 길게 쓰며, 때때로 짧게 끊는 메탈 바디(문체). 

 키보드에 멜로디 김진석 - ‘포월(匍越)’이라는 내재적 초월의 가능성을 타진해 온 사유의 선율가. (사실, 잘 모른다.)

 물론 여기에 기타 알튀세르 드럼 바타이유 베이스 랑시에르로 이루어진 노(老)밴드를 상상해도 무방하리라. 또한 인문학 피쳐링계의 대부, 고로 인문학의 ‘T-Pain’인 ‘발터 벤야민’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라인업은 대강 이정도로 정해두고, 서곡과 종곡까지 합쳐 15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긴 악보 중에 하나의 연주와 음미해 보도록 하자. 5악장, 제목은 ‘테제들의 역사를 위한 현악사중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현악사중주라는 도도한 이름은 잠시 접어두고, ‘데스 메탈’로 EQ를 설정하고, 볼륨을 맞추자. 무엇보다 이 악장에는 위에서 언급한 연주자가 대부분 출동하고 있다.
3. 
 5악장의 인트로는 이렇게 시작된다. 

 ‘안온한’ 조성들의 해체와 재구축으로서의 ‘불온한’ 무조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는 그 반대로 ‘편안한’ 무조 사이를 갑자기 침입해 들어오는 ‘불편한’ 조성이 문제라는 것, 곧 익숙하던 어떤 것이 갑자기 낯을 바꿔 낯선/날 선 모습으로 등장하고 다가오게 되는 ‘두려운/낯선 것das Unheimliche’의 경험이 문제라는 것.(165)

 또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깨는 듯이 보이는-아니, 그렇게 ‘들리는’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이러한 조성의 침입은 다시금 보다 큰 통일성과 일관성의 문법으로 포섭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 여기서 더 적확한 문제의 형식은, ‘통일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는 ‘일관성’을 어떤 개념으로[까지]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일종의 투정과도 같은 의문문이 된다.(166)

 고로, 한국이라는 ‘세계사’의 ‘불협화음’의 문제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 된다.

 ‘우리’의 이 특수한 상황 자체가 오히려 민족/국민국가라고 하는 저 ‘역사적 보편성’의 가장 극명한 징후를 드러내는 독/약pharmakon으로서의 어떤 ‘특수한 보편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마도 바로 이 때문에 국민국가 체제의 집단화 혹은 중앙화로 대표되는 우리의 ‘세계’는 그 자신의 징후를 ‘봉합’하고 ‘은폐’하기 위해 북한 문제 혹은 한반도 문제에 그렇게 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169)

 그런 이유로,

 한반도와 통일이라는 주제를 ‘세계’라는 하나의 상징체계에 대한 일종의 ‘치명적 실재’로 이해한다. 내가 민족/국민국가 안에서 모종의 ‘건강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실재가 지니는 ‘수행적 불건강성’일 것이며, 내가 ‘조국’이라는 단어로 생각하고 품게 되는 나만의 ‘민족적 감수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의 대상은 또한 한반도가 지닌 세계사적 ‘실재’로서의 역사적/국제[정치]적 파국의 지위일 것이다.(171)

 그리고 드럼과 기타 연주의 시작. 두 번째 ‘불협화음’.

 어떤 의미에서 김윤식의 저 모든 저작들은 바로 이러한 ‘(근대)소설이 (근대)소설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혹은 ‘(근대) 소설이 아닌 것은 결코 (근대) 소설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거대한 천착의 작업이 되고 있지 않은가.

 그(김윤식)는 박상륭의 작품들 중 <평심>이 근대적 소설의 형식으로 귀화한 ‘패관(稗官)’ 혹은 ‘잡설가(雜說家)’의 ‘귀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오직 <평심>만이 비로소 근대적 소설비평의 ‘유효한’ 대상이 될 수 있었음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오직 이러한 모더니티의 형식으로 도래하는 것만이 하나의 ‘소설’이-‘잡설’이 아니라-될 수 있다는 점에서 김윤식의 기준은 확고하며, 또한 그러한 ‘확고함’에 의해 그 비평 작업의 상징계는 가장 ‘확고하게’ 동요한다, 바로 박상륭이라는 한국 (근대)문학의 가장 극단적인 ‘실재’ 안에서(175~176)

 ‘불협화음’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피쳐링 보컬의 울부짖음.

 저 ‘직역’의 영역과 ‘의역’의 영역이 상충되지 않고 양립 가능하게 만나게 되는 어떤 ‘신비한’ 지점, 바로 그러한 간극과 이행으로서 번역이 갖게 되는 성격이 바로 저 ‘순수 언어’의 자리는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저 ‘순수 언어’의 ‘순수성’이란 오직 이러한 ‘불순한’ 교통 안에서만 사유되고 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물음들을 던져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역설적 접근이 벤야민의 ‘신비주의’를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오는 중이다. (189)

 그리고 뚝.

 ‘데스 메탈 멜로디’는 여기서 멈춘다. 왜냐고? 도토리 6개나, 600원이나, 0.99달러를 지불하지 않은 음악은 원래 1분간의 재생만을 허락할 뿐이므로. 무엇보다 (내가)자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4. 

 이제 다시 처음의 3번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왜 3번이어야 했는가. 김윤식과 박상륭이 동거하는 저 문장들에서 무엇을 발견해야만 했는가. 왜 악보이고, 어째서 불협화음이며, 그러니까 다시, 무슨 이유로 사유를 문제 삼는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문화와 문학. 식민과 탈(후기) 식민. 정치와 삶. 자본주의와 삶-죽음. 블라블라블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항대립 속에서 우리가 취(取/醉)하고, 거주해야 할 곳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경계 자체가 무너지는 어떤 ‘비식별역’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세계란 무(無)이다.”라는 진정한 무신론으로부터 시작하기. 그리고 아주 드문 만남들. 아니 만나본 적도 없는 눈빛(빚)들을 떠올리기. 그러다보니 어느새 감기는 눈. 학굔가? 집인가?

 아...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나.


 P.S. ‘자음과 모음’의 근간 광고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제목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이택광)라는 제목은 좀 바꾸시라. <이것이 개벽이다>와 두고두고 비교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물론 바뀌어도 저걸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라는 제목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던가. 󰡔파국의 지형학󰡕(문강형준)은 체크.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6-05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5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11-06-07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고 재기 번뜩이는 서평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진용으로 밴드를 만들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하겠는데요.^^

린킨박 2011-06-07 14:01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즐거운 귀가 시간을 제공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사실, 직접 오셔서 읽어주시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안이하게 쓴 건 아닌가 하는 자탄도 없지 않네요.

밴드가 만들어진다면 사운드는 뭔가 굉장할 것은 분명한 듯 한데, 유지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