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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구판절판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34쪽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 -39쪽

그는 읽으라는 말을 듣고 읽었고, 쓰라는 말을 듣고 썼으며, 그리고 시를 읊은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139쪽

철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철학과를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문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문학에 종사하는 걸 그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문학부 교수도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뭐든지 결국은 경제라고 말한다면 처음부터 경제학자가 되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돈을 벌기 위해 회사라도 차렸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의견으로 정치를 좌우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관료나 정치가가 되면 좋았지 않았겠습니까?-225쪽

"아니, 그런 줄 알고 하고 있다"는 등의 변명을 듣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 수 없는 겁니다. -226쪽

그렇습니다. 지금은 전야입니다. 이 전야가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도 사라지기로 합시다. 우리의 밤 속으로. 우리의 싸움 속으로. 우리의 승리하고 패배하는 환희 속으로.-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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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통신

 

1. 학교에 갈까말까, 밍기적밍기적 거리다가 주말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KTX 예매, 신용카드 개통, 아버지 스마트폰의 어플 추가와 같은 사소한 일들을 처리했다. 소요된 시간은 대략 1시간 남짓. 나머지 시간은 자고, 먹고, 보다가, 자고, 자고, 자고..가 반복. 당연한 일이지만 책은 아주 멀리했다. 집에 있으면 왠지 그렇게 된다.

 

2. 한동안 끊었던 영화를 몇 편 봤다. TV를 보고, 게임을 했다.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포들이 꿈틀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럴리가 있겠는가. 언제든 2~3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기억하는 관성화된 행동을 이성이 이기진 못한다.

 

3. 1. 혹성탈출(2011), 2. 마셰티(2010), 3. 컨테이젼(2011). 테크놀로지와 문명 속의 불안, 코스모폴리스 자연화 혹은 월경(越境)의 일상화에 따른 전지구적 공포라는 측면에서 1과 3이 묶이고, 드림팀을 데려다가 재미못봤다는 점에서 2와 3이 묶인다. (하지만 그 쯤은 감독도 배우도 알고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말하는 로봇들의 지구수호전이나 목소리 빼곤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할 수 있는 괴/동물, 말 잘듣는 버추얼 침팬지들의 습격이 ‘돈’이 되는 헐..리우드가 아닌가) 어쨌든 연관없는 세 영화를 보다보니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현대인의 공포(의 스펙터클화)는 절멸(1, 3)에 대한 상상으로 나타나거나, 계급/인종/자본적(2, 3) 차이의 인식(cognition)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절멸에 대한 공포는 전지구적인 것이지만 멸의 선후순위나 위생권력의 편중성은 그 공포 속에서 보다 선명해진다(3). 테크네 묵시록과 어설픈 생태주의, 혹은 문명의 원환구조(1). 제국의 구조와 정치적 복마전을 주변부(B급영화, 멕시코, 국경)에서 바라보기(2). 그런면에서 한국의 국경 블록버스터(예컨대 놈놈놈, 황해, 풍산개 등)는 어디까지 말하고/말할수 있는가. 해묵은 그래서 어려운(장률의 영화를 봐야겠다).

 

3-1. 세 영화중 단연 최고는 마셰티. 1. 현실/영화를 상호지시하는 ‘대인배’ 린제이 로한에게 박수를. 2. 일본도를 든 스티븐 시걸의 ‘할복’과 마체테를 든 대니 트레조의 ‘마술적 리얼리즘’. 3. 어째서 대다수의 영화에서 목사님은 등장하질 않는겐가.

 

 

 

토정비결

 

토정비결 어플이 공짜로 나왔길래 받아서 (난생처음)운세를 봤다. 일년신수, 월별운, 연애/건강운, 직장/소망운 순으로 '자세(?)'하게 자기 운명을 들여다 볼 수 있는데, 다른건 그렇다치고 '건강운'이 가관이다. 이렇게 되어있다.

 

무절제한 생활과 무리로 인해 건강이 나빠질 수 있으나 매사 자중하고 꾸준히 운동을 하면 매우 건강하게 한 해를 보내게 됩니다.

음주나 철야작업등으로 인하여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절대 무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절기에는 기관지를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운세라면야 나도 백가지는 만들 수 있겠다. 가령,

 

무절제한 흡연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질 수 있으나, 매사 신중히 생각하여 흡연하고 꾸준히 조깅을 하면 건강하게 한 해를 보내게 됩니다. 끊는다면 더할나위 없겠습니다.

책을 너무 많이 보면 시력이 나빠질 수 있으니 적당히 보아야 합니다.

겨울철에는 감기를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식사는 삼시세끼 챙겨먹는 것이 좋겠습니다.

등등

 

매일 엄마가 하는말이 아닌가.

그나저나 언제부터 토정비결이 '환절기', '재태크', '직장이동', '입시' 등을 예측해 주었는지 궁금하긴 하다.

본래 4언시구(四言詩句)로 자구를 해석하여 괘를 판단하는 것이 <토정비결>의 묘미(?)일텐데,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줘서야 맛도, 신뢰도 떨어진다.

(여기다 들이대긴 좀 이상하긴 하지만)아감벤에 따르면, 점성술, 연금술 등은 '경험' 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여기서 '경험'은 신적 지식과 인간적 지식 사이의 차이를 가르는 '경계에 대한 경험'이다. 헌데 근대과학+테크놀로지+인간언어의 복합체인 이 '어플'은 신적 지식과 인간적 지식의 구분을 알지 못한 채, 양자를 인간의 지식안으로 구겨넣는다. 이래서는 신-자연의 '지식'를 '경험'한다는 토정비결의 근원적 의도(?)을 (공짜)어플에서 찾기란 꽤나 난망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받아서 해보라'라고 대답할 도리밖에 없다.

 

올해 내 운세는 전반적으로다가 좋댄다...잠룡득주 변화무궁이래나 뭐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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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씨가 떠나고, 한나라당에서는 '20대 하버드 출신' 이준석씨가 뜨는 모양이다. 두 사람의 연관은 찾을래야 찾아 볼 수도 없고, 내가 알고있는 정보래봐야 기사 한 두편이지만, (정치, 대학, 국가, 대중에 대한 인식 측면에서)여러모로 흥미로운 비교대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 자신도 양자 사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김근태가 ‘민주화-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1967년 김근태는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라고 한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이준석은 “2004년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실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한다. 7년 전이니까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이 후 김근태는 강제징집-수배-노동운동-고문-인권운동-구속-(비주류)제도권 정치 입문의 길을 걸었다. 반면 이준석은 “고등학교 때만 해도 정치도 참 재미있을 것 같은 분야였는데 국회에서 인턴 할 때 보좌관 한 명이 ‘나중에 뭘 해도 생계형 정치인은 되면 안 돼’ 라고 말했다”면서 “그 때 들은 말 덕분에 정치에는 관심을 싹 끊었다”한다. 이준석은 이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하버드-무료 과외 봉사단체-창업-(주류)제도권 정치 입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 사람의 삶 중에서, 아마, 내가 이해가능한 것은 아무래도 이준석 쪽일 것 같다. 서울과학고(!)나, 하버드(!!!)나, 무료(?) 과외나, 창업(!!!!!), 의원(!!!!!!!) 따위를 삶의 지평안에서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어도 그렇다. 오히려 국가내란 음모 사건이 되는 학생운동, 수배-도망,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빌던” 대공분실의 분위기, 결사체 조직 등등등의 삶의 궤적은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부모 세대의 가난-자수성가 신화(‘해봐서 아는데’(?)), (잘 되지도 않는)영어공부(미국인-외국인 위화감(?)), 정치 불신(돈되는 정치(?)) 같은 것은 20대 상당수의 공통감각 같은게 아닐까. 그리고, 되려 그런면에서, 이준석의 ‘삶’은 전혀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부럽지도 않은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발언들이 충분히 이해가능하고, 수긍할만한 것이라는 건 아니다. 또한 트위터의 언급이 정치적 성향이나 인식구조, 삶의 궤적을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아마, 이준석의 등장이 한나라당의 쇄신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누가와도 마찬가지다.) 생각이나 정치적 입장이 ‘26살짜리’ 따위라서가 아니라, 그의 삶이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재미’로서의 정치와 ‘생계형 정치인’에 대한 혐오(?), 가치중립으로서의 과학과 학문에는 결단-행동-정치의 가능성은 이미 차단되어 있다. 성공신화, 봉사활동, CEO 경험이 그것을 보충해주지도 않는다. (‘나꼼수’=민간인 발언은 꽤 영리했지만.)

 

저 50~70년대의, 아니 훨씬 더 오래된 계보들을 숨기고 있을, 소위 ‘민주화 투사’들이 이 땅을 뜨고 있다. 시간이, 투사들의 역사보다 긴 ‘그것’이, 그렇게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투사’의 칭호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이 정부의 근시안과 무식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김근태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라 한다.

 

이리저리 마지막 부분에 대해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지만, 제대로 마무리가 되질 않는다. 자기반성, 분노와 비난, 다짐과 희망 모두 마땅치 않다. 이렇게 하자.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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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이데올로기 최인훈 전집 12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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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이 지적했던 바와 같이, 최인훈 문학에 있어 제갈공명은 대단히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공명에게서 시인의 이데아(희망)를 보고, 우울한 근대 지식인의 초상인 이순신을 떠올리며, 근대의 어떤 불가능성을 예감한다. 사태는 이렇다.

 󰡔문학과 이데올로기󰡕에 수록되어 있는 에세이 「공명」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시작된다. 최인훈은 꿈속에서 제갈공명을 본다. 그는 수레를 타고 길을 지나가고 있으며, 최인훈 자신은 먼 발치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잠에서 깬다. 멀리서 공명이 타고 가던 수레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고 최인훈은 그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최인훈이 (역시)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공명의 ‘책읽기’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공명이 읽었을 책의 대부분은 병서(兵書)인데, 그것은 생활의 경험이 반성과 사색을 거쳐 책의 형태로 나온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순수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최인훈의 생각으로는, 중국은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인구를 기반으로 중국-천하-세계라는 보편주가 생리화 되어 있다. 이는 공명과 같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보편-특수 사이의 조화 감각을 가져다 주는데, 달리 말하면 세계와 자기에 대한 인식이 합일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책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일치되어 있으며, 병서(와 그 밖의 책들)는 여기서 완전한 정신을 단련시키는 하나의 세계로 기능한다. 책으로의 망명(도피)은 여기서 일어나지 않는다. 산속에서 책만 읽는다 하더라도, 정신속에서 세계는 이미 완전히 독해가능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귀 큰 것 빼곤 아무것도 내새울 것이 없는 유비가 공명을 찾아와 책 밖으로 나올 것을 권유한다. 정치적 결단을 요구한 것이다. 공명은 거절한다. 이미 그의 ‘정신적 시력’은 완성되어 있으며, 현실에서 더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공명이 결국 유비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최인훈의 질문은 이렇다. “공명의 순수하고 완전한 삶을 현실에서도 허락할 것인가? 현실을 시처럼 살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현실이 될 수 있는가?, 정치는 시가 될 수 있는가?, 삶이 책이 될 수 있는가?’ 대답은 -적어도 공명에게 있어서만은- 그렇다.

 공명이 책에서 나와 군담소설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삼국지의 서사의 성질은 완전히 변화된다. 공명은 슈퍼맨이고, 초인이며, 프리즘이 되어 현실의 불투명함을 명료하게 바꾼다. 그의 등장 이전에 사실주의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반영하던 󰡔삼국지󰡕는 그의 등장 이후로 게임의 양상이 뚜렷해지며, 관념화·심리화의 길을 걷게된다. 책처럼 정치를, 전쟁을, 그리하여 책처럼 인생을 사는 공명에게 경국(經國)은 ‘순수행위이며 후회없는 앙가주망’이다. 공명의 출사표는 글인 동시에 현실이며, 행동 그 자체다. 그는 현실의 인간이면서 시 자체이고, 자신의 능력으로 시가 되고 있는 인간이다.

 요컨대, 공명의 삶에는 순수행위의 3가지 형태가 있다. 1. 책읽기의 끝(행동의 시작), 2. 행동의 끝(허구의 시작), 3. 허구의 끝(세계의 변화). 1. 책읽기가 끝난 후, 현실에서 그는 늘 이긴다. “이 비범한 인간을 매개로 하여 현실은 마침내 심리화되고 관념화되고 상징화된다.” 이를테면, 현실과 상징의 일치. 2. 행동의 끝, 즉 공명은 죽는다. 그러나 몸을 잃어버린 후에도 그의 마음은 ‘행동’을 만들어낸다. 공명은 자신이 행동하거나, 병기를 이용하거나,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돌들(자연)을 행동시킨다. “돌들에게 미리 뜻을 주어 숨겨두었다가 그들의 디데이에 그대로 행동하도록 돌들을 정확히 짜놓은 것이다.” 육체를 잃었을 때, 순수행위는 더 완벽해진다. 이를테면, 자연사를 통한 인간사의 변화. 3. 허구도 끝난다. 공명이 등장했던 역사의 시간은 끝나지만, 그는 시가 된다.

 그러나 공명처럼 사는 것, 다시 말해 시가 되는 지식인이란 불가능하다. 전 군대를 움직이고, 그리하여 창업지신(創業之臣)이 되어, 자신의 삶을 역사에 일치시키는 그런 삶이란 애초에 근대적 지식인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기껏해야 ‘신문지 한 장으로 국내의 정세를 더듬어야 하는’ 우울한 근대 지식인에게, 공명의 삶은 꿈에서나 간신히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꿈이다.

 해서 최인훈은 꿈깨기 작업으로 이순신을 떠올린다. 초인적인 능력, 인품의 공명정대함, 비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면목은 이순신과 공명의 공통점이지만, 자신의 직접적 행동을 통해 역사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근대 지식인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공명의 비극은 ‘하늘의 비극’이지만, 이순신의 비극은 ‘인간의 비극’이다. 그리하여 공명의 정치적 행동은 적에 대한 ‘갤런트리’로 나타나지만, 이순신의 경우에는 ‘순교’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최인훈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신통한 행동 하나 없는 삶’이다. 그러나 최인훈은 그 ‘꿈’을 꿈 만으로 남겨두지는 않는 것 같다. 꿈 - 공명 - 이순신 - 꿈깨기로 이어진 이 글은 다시 꿈을 꾸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다시 공명이 남기고 간 수레바퀴 자국을 떠올린다.

 

그러나 인제야 졸음이 참을 수 없이 밀려온다. 생각을 지탱할 수 없이. 옳다. 거기서. 거기 가서 생각해보자. 그 들판에서. 좀 전의. 수레 자국이. 남아 있을. 그. (p. 173)

 

 

 

 

 


 

 

최인훈 끝.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온다.

 

책표지가 절묘하다.

책 속에 책이 있다. 책 속의 책 안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불기둥은 책 속의 책을 뚫고 나오지만 책 밖으로 나오지는 못한다. 여전히 불꽃을 보기 어렵다. 완전연소 되어버렸거나, 걷잡을 수 없어 외면해버리는 화염들이 있을 뿐.

 

걸어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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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의 소리 - 개정판 최인훈 전집 9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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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진정한 숙고의 힘으로부터 제기된 창조적 물음과 사색의 과정을 통해서만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그것’[존재]을 알게 되며, 그것을 자신의 진리 속에서 참답게 보존하게 된다. 이러한 숙고로 인해 앞으로 도래할 인간은, 그 안에서 자기가 존재에 귀속하면서도 존재자들 속에서는 낯선 자로 머물게 되는 그런 ‘사이’(Zwischen) 안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하이데거가 근대의 근본과정을 ‘세계를 상으로 정복하는 과정’이라 정의했을 때, 그리하여 출현하게 된 근대 학문의 전개를 ‘세계관의 논쟁’을 둘러싼 존재자의 ‘결단’의 과정으로 정립했을 때, 역설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시인의 언어였다. 기술(techne)의 미시화를 통해 개별 존재에게 표상되는 세계는, ‘언제라도 철저히 계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의 가시화가 아니라 오히려 ‘더 이상 계산할 수 없는 그것’이 되고 만다. 표상되지 않는 공간인 동시에 ‘존재의 진리가 일어나는 열린 터전’이기도 한 이 그림자. 이 그림자를 사색하는 인간, 그리하여 광기의 언어를 실어나르는 시인(횔덜린)이야말로 하이데거에게는 근대시의 탄생을 알리는 존재였다.

 

 그와는 반대로, 그러나 동시에, 저 ‘알 수 없음’과 ‘볼 수 없음’의 무기력 그 자체가 대도시 체험으로부터 촉발된 근대시의 출발이기도 했다. 서정시의 불가능성을 노래하는 최후의 서정시. 악취, 소음, 난투가 폐허처럼 쌓여가는 길목에서 판에 박힌 언어를 토해내는 사람 또한, 아니 이 사람이야말로, 파국의 징후가 끝없이 쌓여가는 근대세계의 종말과 구원을 동시에 낚아채는 시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세계의 인식 불가능성과 시인의 사명, 정치와 일상, 역사와 현실, 파국과 구원 사이에서 내내 서성이며, (세계를)쓰면서 (세계를)읽고 싶은 사람이 있다. “달에서 지구를 본 육체의 눈만한 의식의 눈이 있다면. 지구는 한 줄의 시가 되리라. 지구는 말이 되리라. 지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눈이 있다면 둥근 슬픔의 그림자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들리는 건 소리요, 나오느니 비명 뿐인 세계의 밤. 「총독의 소리」는 새벽을 기다리는 시인이 이 세계의 비밀같은 사실을 누설하는 ‘조선총독부지하부’의 방송의 장광설과, 그것을 듣고 난 후 자신이 발붙인 현실의 어찌할 수 없음을 떠올리며 쓰기를 예비하는 과정에 대한 소설로 읽힌다. 세계를 단숨에 독해해버리는 총독의 소리와, 그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을 때 ‘이 도시를 바라다보면서 오래오래 서있는’ 시인이 떠올리는 파국의 상황으로 구성된 이 (소설 같지 않은)소설은 공히 저 ‘계산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해석 욕망과 눈 앞에 보이는 해독불가능한 현실 사이의 간극 그 자체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아는 것이다. 󰡔구운몽󰡕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 방송은 ‘세계상’간의 투쟁에서 소외된 개인을 그리는 장치로 기능해왔다. 독고민은 자신을 각하로 지목하는 혁명군과 정부군의 방송 사이에서 어찌할 줄 모르며 도망가기만을 반복했고, 독고준은 ‘그 해 여름’을 찾아가는 의식 속에서 방송을 듣지만 이내 자신에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태풍󰡕 이후에는,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저 수다스런 방송이 세계에 대한 일말의 진실과 비밀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시인에게만 들리는 이 비밀의 방송과 현실사이에는 여전히 큰 괴리가 존재한다. 파국의 진실을 듣고, 처음에 시인이 내밷는 것은 다만 ‘아구구아구구아구구구아구구구구. 비명’이다. 그런데 이후 이어지는 「총독의 소리」에서 방송을 듣는 시인은 이미 쓰고있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들리는 방송에 대해서 이렇다 할 평가나 대응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이 파국의 상황을 구원의 순간으로 전화시키기 위해 더한 파국의 순간을 요청하고 있다.

 

밤이여 익어라. 밤이여 익어라. 땅이 썩고 눈이 먹물처럼 흐리도록 밤아 익어라. 마지막 한마디를 어느 시인이 쓰는 순간에도 지구는 가라앉지 않는다. 밤은 더 익기를 원한다. (중략) 더 많은 재앙을. 풍성한 재앙을 (19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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