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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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 눈 비비며 받아든 <느낌의 공동체>(신형철)의 띠지에는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이다."라고 씌어있다. '쯧쯧, 설마, 어떻게, 에이'라고 뇌까리면서 읽어내려 가다보니 '과연...'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찬탄이나, '사명에 대한 경외의 염(念)' 같은 것은 아니다.

 '삶의 거의'가 '읽고 쓰는 일'인 사람의 글을 만나게 될 때, 나 같은 문학아동들은 '과연!' 과 '과연?' 사이에서 서성이게 된다. 그런 삶이 쓰는 글에는 텍스트의 바깥이 점점 희미해지고 마는게 아닐까 하는 이상한 불안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평론가라는 직함이, 그러니까 읽고 쓰는 일에 거의 모든 삶을 바쳐야 하는 사람이 불가피하게 써야하는 안경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안경이라는 게, 모든 것에 ‘시력 2.0’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삶이 문학이고, 영화이고, 음악이며, 그래서 예술인 사람들을 나는 본다. 또 삶을 문학으로, 영화로, 음악으로, 결국 예술로 밀어 올리려는 사람들도 숱하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능히 한 생을 소진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 안에서라면 현실이 시가 되고, 정치가 문학이 되며, 세계가 음악이 되면서, 우주가 예술이 되는 상상도 가능하리라.

 그러나 그게 꼭 그렇던가. 늘씬하게 빠진 문체(文體)에서 한 걸음만 물러서서 보면, 소음과 악취, 고성과 방가, 노상에서 방뇨, 무엇보다 합법적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그래서 해석하기 난망한 날 것들이 적채(積債)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경이 이것들을 해석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지도 모르겠다고 믿고 싶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다시, 그러니까, 이 사려깊고, 겸손하며, 그래서 착한, 하지만 잔뜩 벼린 글을 구사하는 신형철의 글을 따라가고 있노라면, ‘과연!’과 ‘과연?’이 오락가락이다. 문제적인건 역시 후자 쪽의 느낌일텐데, 이건 아마 정갈한 목록화, 고유명에 대한 헌사와 얼마간의 아쉬움으로 글의 대부분이 채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더 테레사’ 같은 그의 글은 요컨대 ‘산문’으로 명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의 형태를 띠고, ‘비평’의 형태로 고유명들 사이를 ‘분절’하는데 거의 모든 지면이 채워져 있다. 그러다 ‘crisis’까지 도달하지만(3부를 보라. 제목은 ‘유산된 시인들의 사회’이다), ‘진단’은 다소 밋밋하고, 평범하다. 이건 정당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정당해서 그렇다고 해야 옳겠다.

 예를 들어, ‘번뇌걸스’를 보며 밀려오는 번뇌를 시인의 상상력으로 치유하려 할 때, 혹은 9시 뉴스 앵커의 클로징 멘트, 노래 가사, 용산, 떠난 이의 삶 등등을 시로 읽어내려는 (자연스러운)시도는 어딘지 익숙한, 그래서 지루하다는 느낌이다. 잘 씌어진 노래와 말, 그리고 삶이 시가 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상상력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물론 수록지면의 성격과 요청이 이런 글쓰기 방식을 낳았을 수도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예술의 성애학’과 ‘문학의 정치’의 접합만으로는 색다른 독해를 보여주기 어렵다. 때론 안경을 벗어던지고 날것의 눈으로 보며, 더 보기위해 표정을 찡그릴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꼬맹이가 모범생 형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길. 모범생 형은 형대로 배울 점이 있는 법이니까. 가벼운 답답함이 느껴진다 해도 역시 그 가벼움을 날려버릴 만한 무거운 것이 그에게는 있다. 무어라 해도 ‘읽고 쓰는 일’이 삶의 ‘거의 전부’라지 않는가. 그는 아마 평생을 그렇게 살 것이다. 그래서 불만인 것이고, 믿음인 것이다.

 작가와 텍스트, 그래서 예술중심이야말로 앞으로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우리시대의 '장기지속'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누군가 계속해서 짊어져야 하고, 하고자 한다면 신형철이야말로 그 적임자가 아닐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가 ‘읽고 쓰는’ 일을 삶의 ‘전부’라고 단언하지 않고 ‘거의 전부’라고 써뒀다는 점이다. ‘전부’라고 했다면 나는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비슷한 이유로 다른 업계에서 상당히 유사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대해서 나는 많이 실망했다.) 저 ‘거의’가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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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6-01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린킨박 님을 형으로 부르면 안될까요? 많이 배웠습니다.

린킨박 2011-06-02 02:59   좋아요 0 | URL
헛...그 무슨 말씀을...그냥 끄적거린 겁니다. 그저 앞으로 종종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변변찮은걸 읽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