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왜 뼈를 그리자는 거지요? 
- 기록입니다. 느낌을 기록해서 보관하자는 겁니다. 
- 사진으로 해보시지 그랬어요?
- 다 실패했습니다. 오래 삭은 뼈의 내부구조의 느낌이 사진에 담기질 않았어요. 그게 인간의 뼈라는 걸 표현해야 되는데...... 아마 연필로 그리셔야 될 겁니다. (153쪽)  

  사진이 할 수 없는 일을 연필은 할 수 있다. 사진보다 정확한 세밀화가 그렇듯, 김훈의 연필도 그렇다. 김훈은 강점이 분명한 작가다. 현실을 재현해내는 신묘한 문장력, 개성적이고도 명쾌하고, 모호한 대신 매섭다. 재현 대상이 수백년 전 실존했던 한 인간의 내면이든, 폐경기를 맞은 여인의 저물어가는 삶이든 김훈의 연필이 닿으면 지나칠 정도로 치밀하게 현상이 재현된다. 지나치다. 김훈의 글을 읽을 땐 늘 그런 생각이 든다. 글이 지나친 게 아니라, 글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지나치다는 의미이다. 여성의 내면을 그리는 글을 쓰기 전에 수개월을 코스모폴리탄 유의 잡지를 탐독한다는 이 작가는, 때론 무안하게 혹은 잔인할 정도로 명징하게, 어떤 감정을 굳이 끄집어 낸다. 예를 들면, 

 교도소에 갇힌 아버지를 떠올리며, 교도소 지붕에 눈이 덮여서 따듯하고 아늑할 것인지를 생각하다가 안쓰러워서 생각을 버렸다. 때 아닌 생리혈이 밀려나오려는 것인지, 몸속 깊은 곳이 화끈거라고 허벅지 안쪽이 불안했다.  (18쪽)

이런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다. 48년생 남자 작가인 김훈이. 이런 문장을 만나면 정말 '몸속 깊은 곳이' 긁히는 것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젊은 여자이다. 조용하고 깔끔하고, 다소 이기적인 느낌이다. 계약직 공무원으로서 식물 세밀화를 그리게 되어 군인과 숲과 연구자와 식물과 곤충을 만났다. 소설은 가족과 일과 어쩌면 연애, 한 여자의 일상 근처를 배회한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듯, 자신의 역사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세밀함은 때로 잔혹해진다. 부패한 아버지는 자신의 보스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 쓰고 교도소에 갇혔다. 아버지의 충정 덕분에 일찍 출소하게 된 아버지의 직장상사 최국장이 가석방된 아버지를 맞았다.  

 - 제수씨도 고생이 많았소. 그래도 빨리 나와서 다행이지. 저 친구 심성이 착실해서 복받은 거요. 아, 그 안에 있으니까 제수씨가 만들어준 김장김치 생각이 나더군. 솜씨는 여전하신가. 
어머니는 잠자코 따라왔다. 최국장이 또 말했다.
- 아직 따님은 출가 안 시켰나? 우리 아들은 지난겨울에 장가보냈어. 내가 출소자라고 해서 사돈 쪽에서 내켜하지 않았는데, 저네들끼리 좋다니까 성사가 되더군. 그러니까 따님도 짝 생기면 빨리 보내시오. 우리 애하고는 인연이 안 닿았던 모양이지. 
 최국장은 우리 가족들의 생애에 스며든 오욕들을 맛보기로 재탕하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딸린 아우디를 타고 최국장은 돌아갔다. (139쪽)

   해마다 당연한듯, 어머니는 최국장의 집 김장을 도왔다. 최국장의 망나니 아들과 여자 사이에 잠시 혼담이 오갔던 것도 사실이다. 최국장에게 굴종했던 이 가족의 역사는 오욕 그 자체였다. 소설은 이 짧은 재회로 한 가족의 부조리를 순식간에 재현한다. 최국장의 에쿠스로.

   세밀함이 지나치다. 이 장면을 본 순간 나 자신의 오욕의 역사가 떠오른다. 그게 촌지라는 것도 모르고, 국민학교 시절 엄마가 시험 때마다 담임에게 해다 바쳤던 갓김치, 물김치... 각종 명목으로 요구하는 말이 석연찮음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애써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어머니 음식솜씨가 좋으시다는 말에, 어쩌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 순간의 움츠러들던 기분이 선명한데, 우습게도 그 여자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조.. 조... 몇번 중얼거리며 엄마한테 전화를 해 물어볼까 하다 그만 두기로 한다. 엄마는 아직도 그 선생님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오욕의 역사는 반복된다. '올드 닉'에 의해 감금당한 방. 일요일 선물과 롤리팝, 전기로 남자는 여자를 애원하게 할 수 있다. 

"난 뭐 식료품이나 나르고, 쓰레기나 치우고, 애들 물건이나 사러 다니고,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천창 얼음이나 벗겨주면 되는 하인이지 뭐."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 뒤틀린 목소리로 반대되는 말만 한다는 뜻이다. 
"고마워요." 
엄마 목소리 같지 않았다. 
"덕분에 훨씬 밝아졌어요." 
"이것봐 그렇게 말하니까 좋잖아." 
"미안해요. 정말 고마워요." 
"마지못해 한마디 하는군." 
"식료품도 고마워요. 청바지도." (68 쪽)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여자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이고, 남자에게 간절하게 생존을 조른다. 오욕보다는 생존이 우선이다. 여자는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 제 아이의 머리에 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오욕의 역사가 다시 전면에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납치와 감금, 그리고 탄생. 이 소설은 극단적 상황에 처한 엄마와 아이를 두고 폭력과 존엄의 문제를 다뤘다. 

김훈의 소설보다 훨씬 충격적인 소재를 택했고, 김훈의 소설보다 훨씬 센세이셔널하지만, 한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하는 '최소한의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잘 쓴 소설이라 잘 읽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소설 역시 내 오욕의 역사를 건드려 다시 괴로워졌다. 아이가 화자라 직접적인 묘사가 없는데도, 건너서 보는 고통이 너무도 생생해서.... 

나는 살고 싶었고, 몹시 무서웠고, 가능하면 별 일이 없길 바랐고, 살고 싶어서 내가 별 게 아니라는 걸 최대한 불쌍하게 말해야 했고, 내가 별 게 아니라는 걸 말하면서도 사실 마음 속으론 내가 그렇게 별 게 아닌 것만은 아니라고 또 생각하고 있어서 몹시 억울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왜 잘못한 게 없는 내가 불쌍한 양 움츠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랬다.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내가 했던 말이며 행동은 당당히 내 오욕의 역사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그러니 그녀도 잊기 쉽지 않았겠지. 사랑스럽고 용감한 재키잭 왕자가 있었어도. 잊으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우타노 쇼고의 <해피엔드에 안녕을>을 제외하곤 요즘 읽은 책들이 하나 같이 무겁다. 우타노 쇼고는 비극을 엔터테인먼트화 해서 오히려 읽기 편했다. 역자의 말 대로 '깨소금맛이다' 싶게 결말을 즐기게 되기까지 했다. 훑어보는 책이 무거운지, 생존이 무거운지, 오욕이 무거운지 모르겠지만  근래 컨디션이 썩 좋은 건 아니다. 경영 MD님껜 <번뇌리셋>을 선물받았고, 인문 MD님 자리에선 <왜 나는 우울한 걸까>를 발견하고 레알 돋았다. <늦어도 11월에는>처럼, 11월은 연애마저 우중충하니, 이 일을 어찌할까.

   사랑이야말로 이 덧없는 것들의 중대사업이라고 말한 김훈의 말대로, 의외로(!) 희망을 말하는 것에 가까운 소설들을 보고서도 오욕의 역사가 떠오르는 걸 보면, 역시 11월은 해피엔드에 안녕을 고해야 할 계절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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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11-16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앞부분밖에 안봤는데요. 저도 그 부분 읽으면서 그생각 했어요. 강산무진에 나오던 단편(제목은 기억이 안나고)에서 목젖과 산도를 떠올리며 묘사하던 부분 보면서 되려 내가 진저리치던 기억도 막 다시 떠오르고. 현의 노래에서 오줌누던 장면의 비릿함도 생각나고... 안그래도 읽으면서 김훈의 여성에 대한 묘사만 한번 모아볼까, 생각했었는데, 어쩐지 내가 못견딜 것 같아서 ㅎㅎ

그나저나, 이 새벽까지, 고생이십니다. 덕분에 잘 읽었지만요.

한국소설MD김효선 2010-11-16 15:36   좋아요 0 | URL
저도 강산무진 즈음이었던 걸로.. <화장>과 <언니의 폐경> 사이에 한 인터뷰를 봤었는데, 그때도 하 여성을 직조하는 데에 대한 집요함이 느껴져서 숨이 가빴었지요... 새벽 소리가 붙을래면 그래도 한 두세시는 되어 주셔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