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진실은 무엇인가요?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 도대체 있을까요? 그리고 사춘기 이후에 모든 고민은 어차피 사랑 고민 아닌가요? (125p) 

   여주인공 '조야'가 말한다. 사춘기 이후 모든 고민은 어차피 사랑 고민이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잘 팔리는 아이템이 사랑인 것도 같은 이유이다. 모든 사람의 사랑이 주말 저녁 만날 수 있는 조권과 가인의 시트콤 같다면 얼마나 유쾌할까. 여기 멜랑콜리한 독일작가 카챠 랑게-뮐러가 쓴, 가상연애의 정 반대편에 있는 어떤 흔해빠진 연애담을 소개한다. 

 

   소설은 하나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여주인공 조야는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연인 해리에게 편지를 쓴다. 헤어지고 몇 년, 겨우 열어볼 수 있었던 그의 노트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사랑을 잃고 한참 뒤, 조금은 평온해졌을 조야의 시선이 그들이 사랑했던 시간을 좇는다.

  그는 어리고 잘생긴 서독 남자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사랑의 순간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독 여자, 위대한 빨치산 여전사와 이름이 같은 그녀는 언제 그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을까. 그가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듣고도 남들이 다 그랬듯 비웃지 않았을 때. 그녀가 단 한 번도 받아보질 못했던, 섹슈얼한 느낌이 전혀 없는 '애기키스'를 해주었을 때. 그러나 그는 정키였고, 쓰레기였다. 아무런 꿈도 없는 그의 그 동공이 활짝 열린 시선까지 그녀는 경탄하고 또 증오했다.   

  처음에는 죽음에대한 불안, 그 다음에는 그 불안에 대한 불안, 그다음에는 아무런 공포가 없는 것, 그러니까 어떤 보호막도 없다는 점에서 너와 마찬가지 신세라는 불안감, 우리가 더 똑같아지고, 더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같아지고 또 같아지고...... (196p)

  그들의 사랑은 빤히 앞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같아지고 또 같아질 때까지 함께 낙하한다. 다른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그녀는 그를 의심하고, 그가 아닌 남자를 만나고, 온 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극한의 분노를 맛보고, 결국 그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모든 사랑이 그렇듯 '결국 흔해 빠진 사랑'얘기다. 그러나 간단한 정보로 연상할 수 있는 극한의 신파를 이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건 아니다. 동독과 서독, 마약중독자, 질병, 섹스, 나태함, 도시의 우울... 그러나 위대한 빨치산 여전사 조야 코스모뎀얀스카야의 단단함이 내재된 여주인공 조야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기에 너무 강하고 소박하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그 찬란하던 추억을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 우스꽝스럽고 슬픈 문장들이 묘한 멜랑콜리가 되어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감싸고 돈다.

  시간이 없거나 네가 더이상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때문에 가슴이 미어졌기 때문이었어. 다른 표현을 쓴다면 조금 덜 통속적이겠지. 하지만 그만큼 덜 진실할 것 같아. (251p)

   이 계절이면 생각나 벌써 몇 년째 듣고 있는 노래가 있다. 대단한 완성도라고 생각하는 것도, 엄청난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님에도, "Oh, Love, Never knew what I was missing"을 흥얼거리며 괜히 코끝을 한번 만지게 되는.  

  통속은 진실하다. 통속이 통속인 것은 그것이 이미 보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속에는 늘 공감할 구석이 있다. 그 흔해 빠진 사랑 얘기가 사춘기 이후 모든 고민의 핵심인 것처럼. 번역이 잘 된 문장은 코끝이 찡한 와중에도 순간순간 피식 웃게 만든다. 공감이란 참으로 위대한 것. 가벼운듯 소박한 문장 사이에서 지금껏 표현되지 못한 채 혀 끝에서 맴돌던 바로 그 문장을 건져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좋은 연애소설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gimssim 2010-02-0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랑은 다 통속이 아닐까요? 낡은 잡지같지만 어쩌겠어요. 그런 게 사랑이라면요. 그냥 제 생각이에요.

한국소설MD김효선 2010-02-15 11:24   좋아요 0 | URL
폐부를 찌르는 댓글이라 '차마 그 리플을' 달지 못했군요...(이것으로 저의 게으름을 갈음하고 ^^) 그 통속을 반복해서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참 재밌죠. 기대도 실망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