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계산을 해보자. 한 건물이 있다. 28층이고, 각 층마다 25개의 방이 있다. 이 건물에는 총 몇 개의 방이 있을까. 각각의 방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되었던 편혜영의 단편 <토끼의 묘>는 낯선 도시에서 의무적으로 파견 근무를 하게 된 '그'의 짧고 서늘한 일상을 서술한다. 소설은 전작 <사육장 안에서>에서 이미 발현되었던 편혜영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파견 근무자인 그는 매 업무시간 내내 '사냥개처럼' 정보를 수집한다. 그가 수집한 정보가 틀렸다고 해도 큰 문제가 발생하진 않는다. 파티션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눠놓는다. 그는 이 도시에서 대화란 것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날 버려진 토끼를 발견한다.

   
 

빨간 눈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 말고도, 원래 눈이 붉은 품종의 토끼가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저리 눈이 붉어지도록 피곤하고 지친 존재가 세상에 또 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고 그런 존재가 흔히 털이 쓰레기처럼 더러워지도록 어두운 공원에 버려져 있다는 게 씁쓸하게 느껴졌다.   

편혜영(2009), <토끼의 묘>, 《2009, 이효석 문학상 수상 작품집》, 9쪽

 
   

   안도감은 씁쓸함보다 먼저다. '그'의 마음은 인터넷 게시판을 방랑하며 나보다 더 걍팍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 '그래도 내가 낫지'라고 위안하는 어떤 마음들을 닮았다. 버려진 애완동물은 흔하다. 버려진 토끼는 더욱 흔하다. 그것은 토끼가 '너무 오래' 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주거지에 버려진 토끼를 데려오기로 한다. 왜냐하면,
 

   
 

길어봤자 몇 개월만 토끼를 책임지면 되는 거였다. 영영 돌볼 필요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토끼의 정서와 건강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버려질 거였으니까.  

위의 책,19쪽

 
   

  작업한 문서를 건넬 때만 그는 유일하게 상사와 대화란 것을 한다. 바로 그 상사가 실종되어도 그 외에는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도시를 떠도는 살인범에 대한 괴담에도 사람들은 심드렁하다. 아무리 살인이 벌어진 장소가 그들이 살고 있는 그 방의 모양과 놀랍도록 비슷하다고 해도. 모두들 그런 공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28층 건물, 각 층마다 늘어진 25개의 방. 더 이상 누구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에겐 그럴 의지가 없다. 그 역시 이 도시에 존재하는 각각의 샐러리맨들을 피상적인 사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모두 똑같이 검정색 재킷에 흰 와이셔츠 차림인 회사원들의 모습을 그는 바둑알로 치환한다. 오목놀이를 하듯 "연속된 다섯 명이 같은 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하면 씩 웃으며 승자가 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24쪽)던 것처럼.

  상사는 무사히 돌아왔을까. 그는 초인종을 누르던 의문의 사내에게서 무사히 도망쳐 파견지를 벗어났을까. 이 소설은 확실히 불편하다. 전작 <사육장 쪽으로>가 그랬듯 이유도, 마무리도 친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은 짧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응시할 때가지도 끝까지 속을 더부룩하게 한다. 뱃속까지 가득한 듯하다. 어쩌면 진실에 가까울 불편함이. 

   

 

   그와 비슷한 빨간 눈을 지닌 토끼는 어떻게 됐을까. 그의 말마따나 '세상에 널린 게 버려진 애완동물(29쪽)'이다. 처음 파견을 나왔을 때 '사냥개'가 되라는 말을 듣고 그 서늘함에 놀랐던 그 역시 새로 파견된 사원에게 마찬가지 말을 한다. 사냥개가 되라고. 다들 그렇게 익숙해진다. 또 그렇게 서로에게 걍팍해진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기형도, <안개>, 《기형도 전집》, 34쪽

 
   

라고 말했던 기형도처럼.
  

   파견 기간 내내 그가 머물렀을 공간을 생각해본다. 그 도시는 기형도의 시 속처럼 그로테스크한 안개가 낀 곳이 아니었을까. 그가 살았던 그 방은 어떨까. 집이라 부르기도 미안한 규격화된 공간. 그 공간은 신경숙의 소설에 등장했던 '외딴 방'보다 더 싸늘했으리라.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는 게 보였다. 구멍 가게나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육교 위 또한 늘 사람으로 번잡했었건만, 왜 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방을 생각하면 한없이 외졌다는 생각, 외로운 곳에, 우리들, 거기서 외따로이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인지.  

신경숙, 《외딴 방》, 47쪽

 
   

   신경숙의 1979년과 달리 2010년의 그들은 더 이상 외로움이라는 감각을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외로움'이란 '외롭지 않음'을 알고서야 비로소 느끼게 되는 대립항적 감각이기에.
 

 

   신경숙의 <외딴 방>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봉제공장, 전자공장, 의류공장, 식품공장들의 생산 라인이 존재했다. 편혜영의 2010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파티션이 존재한다. 그 파티션이 얼마나 인위적인 것인지도 이제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서로를 전염시킨 야박함이 이미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넷 회사 상담원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서비스 신청을 해놓은 시각에서 임의로 "무려" 두 시간 "씩이나" 서비스가 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아무 잘못도 없는 상담원에게까지 자꾸 말이 야박하게 나왔다. 일주일 동안의 모든 피로가 몰려와 그 두 시간의 여백에 대해 아무 잘못도 없는 인바운드 상담자에게까지 모질어졌다. 나를 피로하게 한 건 그저 일상이었을뿐, 그 상담자가 아니었음에도. 걍팍함이란 이렇듯 전염되는 것이다. <토끼의 묘>의 '그'의 입에서 내 전임자가 했던 말이 그대로 나온 것처럼. 다른 사람이 그에게 모질었듯, 그 역시 피로한 토끼에게 모질어졌던 것처럼.

   그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 김치찜집에서 한가해진 틈을 타 식사중인 직원 분들을 벨을 눌러 호출하지 않은 게 내가 한 유일한 덜 야박한 짓이었다. 내 너그러움이란 고작 물 한 잔, 수저 한 개, 반찬 한 그릇 정도다. 그 얄팍한 선량함 덕분에 그날 밤도 깊고 편한 잠을 잤다. 내일이면 다시 또 모질어질 것을 알면서 말이다. 

   어쩌면 우리 역시 28층 건물, 각 층마다 있는 25개의 방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거대한 도시엔 모양이며 구조가 완벽하게 같은 700개의 방이 있는 건물이 수백 수천 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가끔 스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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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1-19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피로하게 하는건 "알라딘"인데, "알라딘" 때문에 다른 곳에 야박해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집하게 되는 글이군요. 상담원은 아무 잘못이 없죠. 우연히 내가 돈을 낸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을 뿐이고...

한국소설MD김효선 2010-01-22 14:14   좋아요 0 | URL
헉.. 하이드님을 피로하게 만드는 알라딘에 저 역시 포함되어 있군요 ^^;; 댓글이 늦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