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체에 자연스럽고 힘찬 기운이 있고 목표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으면 교육 시스템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해도 어떻게든 ‘대세의 흐름‘을 타고 그럭저럭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의 힘찬 기운이 상실되고 폐색감 같은 것이 곳곳에서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가장 강한 영향을 받는 곳은 교육의 장입니다. 학교이며 교실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은 갱도의 카나리아처럼 그런 탁한 공기를 가장 먼저,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 P222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인 폴 발레리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인터뷰했을 때, 그는 "착상을 기록하는 노트를 들고 다니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온화하지만 진심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보였습니다. 그러고는 "아, 그럴 필요가 없어요. 착상이 떠오르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 P124

거기서(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내가 유념했던 점은 우선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다양한 단편적인 에피소드나 이미지나 광경이나 언어를 소설이라는 용기 안에 척척 집어넣고 그걸 입체적으로 조합해나간다, 그리고 그 조합은 통념적인 논리가 문학적인 언어와는 무관한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기본적인 작전이었습니다.

그런 작업을 추진하는 데는 무엇보다 음악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 요령으로 문장을 만들어갔습니다. 주로 재즈가 도움이 됐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재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듬입니다. 적확하고 견고한 리듬을 시종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청중은 따라와주지 않아요. 그 다음은 코드(화음)입니다. 하모니라고 말을 바꿔도 좋을지 모르겠군요.

(중략) 그런 사실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한정된 소재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더라도 기거에는 무한한-혹은 무한에 가까운-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건반이 여든여덟 개밖에 없어서 피아노로는 더 이상 새로운 건 나올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겠죠.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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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와 중세의 개념들이 완전히 역전되면서 근대에는 순수 음악이 이상적으로는 목소리보다는 악기적인 것으로서, 낱말 없는 노래로 여겨지게 됐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막 제기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노래의 핵심적인 음악성이 언어적 요소에서 선율, 화성, 리듬이라는 비언어적 요소로 이전됐는가? 그리고 반대로, 어떻게 소리는 언어에서 빠졌는가? - P40

다윈은 선을 따라가는 삶을 그리지 않고 각각의 점 안에 있는 삶을 그렸다. (중략) 근대적 사고는 공간적인 위치에 장소를 고정시켰고 사람들의 삶을 일시적인 순간에 묶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러한 수순을 뒤집고, 다윈의 도식에 나타난 것처럼 점선 예찬자로서가 아니라, 존재들로 자은 무수한 실들로 짜인 다양체로서 삶 그 자체를 상상할 수 있다면 진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뀔 것이다. - P27

장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어떤 곳들이 하나 이상의 길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은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이어진 길이고, 어떤 곳으로 향하는 움직임의 길이다. 나는 삶이 장소 안에서 살아질 뿐만 아니라 길들을 따라 살아진다고 추론한다. 이때 길은 일종의 선이다. - P26

우리에게 전해진 형식 안에서 언어와 음악 사이의 구별은 쓰기의 탄생 속에 기원이 있지 않고 쓰기의 종말 속에 있음을 제시하는 다량의 증거가 있다.(중략) 그러니까 나는 모든 쓰기 역사가 보다 포괄적인 표기법의 역사 중 일부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 P43

음악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작품을 (장엄함을 함축하며 신축적 형식을 지닌) 구성된 인공물로 보는 바로 그 발상은 18세기 말 즈음 음악이 자주적인 순수예술로 분리되면서 그와 동시에 생겨난 적곡, 퍼포먼스, 표기법이란 개념 속에 기인한다. 그 시기 이전에 실제 음악 작품이란 사전의 작곡에서가 아니라 퍼포먼스 속 노동에 있다고 이해됐다. 모든 퍼포먼스가 표기법에서 사전 제시된 상세설명서에 따라야 한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았다. - P47

이 시점에서는 고대와 중세의 독자가 운항사가 아니라 행려(wayfarer)였다는 결론을 내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그들은 종이면 위에 있는 글을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는 진공의 상세설명서로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글을 기억의 경관 속에서 길을 찾게 해줄 수 있는 위치표지판과 디딤돌, 이정표의 집합물로 보았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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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볼 때, 관념은 기존 계급 관계와 경제 시스템을 촉진하거나 아니면 와해시키는 갖가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다. 반면에 아날 역사가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관념보다 더 변화에 무딘 그 어떤 것, 곧 망탈리테(mentalites, 심성 구조)이다. 아날 역사가들이 말하는 망탈리테는 세계를 정당화하지도 왜곡하지도 않고 그냥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일종의 집단 무의식 같은 것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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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그러나 그런 설명으로 이 세상을 설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덫은 자기도 모르게 덜컥 걸려드는 법입니다‘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많은 사람이 잘 실감하지 못하죠. 그런 구문을 이야기라는 차원으로 이행시키지 않으면 본질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책을 쓰면서 실감했어요.

무라카미: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죠. 결국 힐러리 클린턴은 집의 1층 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만 했고, 트럼프는 사람들의 지하에 통할 만한 이야기를 마구 던져서 승리한 셈이에요.
가와카미: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무라카미: 뭐랄까, 선동가라고까진 할 수 없어도, 트럼프는 고대 사제처럼 사람들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요령을 체득했지 싶어요. 그리고 그런 데서는 트위터 같은, 개인 대 개인의 디바이스가 강력한 무기가 되죠. 그가 구사하는 논리와 어휘는 상당히 반지성적이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지하에 안고 있는 부분을 매우 전략적으로, 교묘하게 집어낼 수 있어요.

가와카미: 예를 들어 종교 교의는 가장 막강한 이야기죠. 우리에게는 이 이야기가 매우 중요하게 만듦으로써 이야기가 실제로 움직이게 됩니다. 무라카미 씨가 만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은 시대가 낳는 갖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은 이 ‘무의식‘의 쟁탈전인데, 다들 그것에 큰 문제를 느끼지 않아요. 자신들이 만드는 이야기는 막연히 선한 것을 낳는다고 생각하죠.

무라카미: 물론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말투에 매력이 없으면 사람들은 귀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이스, 스타일, 말투를 매우 중요시하죠. 제 소설은 너무 쉽게 읽힌다는 말을 곧잘 듣는데, 당연합니다. 그게 저의 ‘동굴 스타일‘이니까.
가와카미: ‘동굴 스타일‘...!
무라카미: 네, 일단 눈앞의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거죠. 그러니 늘 하는 말이지만, 뭐가 됐든 알기 쉬운 말, 읽기 쉬운 말로 소설을 쓰려 해요. 최대한 쉬운 말로 최대한 어려운 이야기를 하자. 마른오징어처럼 몇 번이고 곱씹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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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정책에 대한 쓸데없는 조언을 받을 때가 많다. 이는 주로 학계나 여타 전문가들로부터, 필요하지만 인기가 없는 정책들을 시행할 용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힐난을 받는 형태를 띤다. 때로는 그런 쓸데없는 조언은 (중략) 하기 쉬운 일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식의 주장을 담은 ‘고행‘ 정치의 형태로 나타난다. (중략)

미시정치학은 확실히 다르다. 대개의 조언들이 정치 현실에 드러내놓고 무감각한 데 비해 미시정치학의 스타일은 정치가들보다 더 정치적인 것 같다. 그것은 이익집단을 구별해내고 그들이 그들의 이익으로 여길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해낸다 그리고 그 집단들이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 체제를 어떻게 이용할지를 지적해낸다. 그리고서 미시정치학은 그 집단 각각에 대해 더 매력적인 제안을 함으로써 그 집단들의 협력을 확보할 방안들을 제시한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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