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 붕괴는 대부분은 군인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뤄졌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물론 조지아, 헝가리, 니카라과, 페루, 필리핀, 폴란드, 러시아, 스리랑카, 터키, 우크라이나에서도 선거로 추대된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기반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극단주의 선동가는 어느 사회에서나 등장하기 마련이다.(중략)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시험은 이러한 인물이 등장하는각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와 정당이 나서서 이러한 인물이 당내 주류가 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이들에 대한 지지와 연합을 거부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당의 민주주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경쟁 세력과 적극저긍로 연대함으로써 이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가이다.(중략)기성 정당이 두려움과 기회주의, 혹은 판단 착오로 인해 극단주의자와 손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일단 잠재적인 독재자가 권력을 잡으면, 민주주의는 두 번째 중요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그 독단적인 지도자가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 제도가 그를 통제할 것인가? 그러나 제도만으로는 선출된 독재자를 실질적으로 제어할 수 없다. 정당 체제와 시민사회는 물론 민주주의 규범이 필요하다. 그 규범이 무너질 때 헌법에 명시된 권력분립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민주주의 보호막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1933년 1월 말 서로 경쟁하던 보수주의 정치인들은 ‘뭔가 타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회동을 가졌고, 한 가지 합의안을 마련했다. 그것은 대중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아웃사이더 인물인 히틀러를 수상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다.(중략) 1933년 1월 30일 그 합의안의 주도자 중 한 명인 파펜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하는 위험한 도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일축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그를 이용하는 겁니다. 두 달 뒤에 그를 구석으로 밀어내면 아마 찍소리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이보다 치명적인 착각은 없었다.
사람들은 국가의 운명이 국민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즉 국민이 민주적 가치를 지지한다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것이다. 반면 전제주의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민주주의는 곧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틀렸다. 이러한 입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이 자신의 의지대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며 그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중략) 유권자 대다수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세력에 반대했다. 적어도 두 아웃사이더가 정치 야망에 눈이 먼 기성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기회를 잡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린츠의 연구를 기반으로 잠재적인 독재자를 감별할 수 있는 네 가지 경고신호를 개발했다. 우리는 1)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2)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3)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4)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정치인을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
해밀턴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는 처음에 국민에게 아첨했다가, 대중선동가로 변신하고, 결국에는 폭군으로 군림해서 공화국의 자유를 허물어뜨린 인물들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해밀턴과 그의 동료들은 대통령을 투표로 선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위험을 걸러내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건국자들이 고안한 장치는 바로 선거인단이었다.(52-53) - P52
전당대회 시스템은 위험한 후보를 체계적인 방식으로 걸러냈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문지기 역할을 했다. 정당 내부자들은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동료평가(peer review)의 기능을 했다. 시장과 상원 및 하원 의원들은 대선 후보자들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후보자들과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환경에서 함께 일했기 때문에 그들의 성격과 이념, 그리고 위기관리 능력을 평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밀실회의는 평가 시스템으로 기능했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대중선동가와 극단주의자를 당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56) - P56
20세기 초 세계적인 갑부였던 포드는 해밀턴이 경고한 극단주의 대중선동가 유형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포드는 자신이 소유한 주간지 <디어본 인디펜던트>를 마이크 삼아 은행가와 유대인,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했으며, 유대인 은행가들이 미국 사회를 장악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 포드의 주장은 전 세계 인종주의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히틀러조차 <나의 투쟁>에서 포드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고, 미래의 나치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포드를 "가장 가치 있고, 중요하고, 재치가 넘치는 투사"로 꼽았다. 1938년 나치 정권은 포드에게 최고훈장을 수여했다.(57) - P57
대선 출마를 바라는 대중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포드는 정당 네트워크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지 못했다. 제임스 쿠젠스 상원 의원은 포드의 출마를 이렇게 일축했다. "예순이 넘도록 훈련도 경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런 자리를 꿈꾼단 말인가? 가당치도 않다."(중략) 휴이 롱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탁월한 정치 수완과 대중의 인기, 그리고 정치 야망 모두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암살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문지기 시스템 때문에 자신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1932년 롱은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이후 계속해서 규범을 무시하면서 동료 정치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특히 민주당 지도부의 신임을 잃으면서, 1936년 전당대회에서 루즈벨트에 대항할 후보 자격을 얻지 못했다. 그는 결국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59-60) - P59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는 두 정당이 1972년 대선 이전에 받아들였던 일련의 권고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구속력 있는 프라이머리 시스템이라는 것이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1972년을 시작으로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대의원 대부분을 각 주의 프라이머리와 코커스를 통해 선출했다.(중략)일부 정치학자는 새로운 시스템에 우려를 표했다. 구속력 있는 프라이머리는 분명하게도 더욱 민주적인 방식이었다. 그런데 혹시 ‘지나치게‘ 민주적인 방식은 아닐까?(64-65) - P64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정당 문지기들은 힘을 크게 잃었다. 첫째, 연방대법원의 2010년 판결(Citizens United v. FEC) 덕분에 외부 자금을 선거운동에 훨씬 더 수월하게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중략) 또 다른 요인으로 대체 언론, 특히 케이블 뉴스와 소셜 미디어 산업의 성장을 꼽을 수 있다. 과거에 전국적인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오로지 소수의 주류 언론에 의존해야 했던 반면,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는 보다 쉽고 빠르게 인기와 대중적 지지를 끌어모을 수 있게 되었다.(74) - P74
2016년 대선을 앞둔 공화당 인사들(중략)은 민주주의 기본 규범을 위협하는 트럼프를 어떻게든 저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저버림으로써 미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민주주의를 잃는 것은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일이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 공화당은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결단, 즉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과감한 선택을 내렸어야 했다.(중략) 2016년 오스트리아 보수 진영은 극우파 급진주의자인 노르베르트 호퍼의 당선을 막기 위해 녹색당 후보 알렉산더 판데어벨렌을 지지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2017년 프랑스 보수 진영 후보 프랑수아 피용은 극우파 후보 마린 르펜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중도좌파 후보인 에마뉘엘 마크롱을 지지하도록 당원들을 설득했다.(87) - P87
그(후지모리)는 정당 대표들과의 협상 대신 그들을 "놀고먹는 사기꾼"이라 비난하면서 공세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정부에 비협조적인 판사를 "비열한 인간"이나 "악당"으로 표현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후지모리가 의회를 우회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먼저 행정명령에 눈길을 돌렸다.(중략) 후지모리는 경영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페루는 정말로 민주주의 국가입니까? 그렇게 말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페루는 사실 강력한 소수와 독점, 파벌, 로비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97) - P97
미국의 민주주의를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준 것이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탄생한 한법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랬단 말인가? 아마도 믹구 사회의 경제거 풍요, 탄탄한 중산층, 활발한 시민사회 등 다양한 요인이 함께 민주주의를 지켜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두 저자는 그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민주주의 규범을 꼽고 싶다.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130~131) - P130
민주주의 수호에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두 가지 규범을 꼽자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들 수 있다. 상호 관용이란 정치 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이 존재하고,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개념이다.물론 경쟁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 주장을 혐오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정당한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132-133) - P132
상호 관용 규범이 자리잡지 못한 스페인 공화국은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1933년 우파 정당인 가톨릭 세다당이 승리하면서 의회를 장악했을 때 새 공화국은 위기를 맞이했다.(중략) 좌파와 무정부주의자들은 공화국이 파시스트 손에 넘어갔다고 판단했고, 카탈로니아와 아스투리아스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광범위한 파업을 주도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우파 정권은 이러한 움직임에 무자비한 탄압으로 맞섰다.(중략) 정당간 건강한 경쟁이 사라지면서 시가지 전투와 폭탄 테러, 교회 방화, 정치인 암살, 쿠데타 음모가 이어졌다. 걸음마 단계였던 스페인 민주주의는 결국 1936년 내전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135~136) - P135
민주주의 생존에 중요한 두 번째 규범은 우리가 ‘제도적 자제‘라고 부르는 개념이다. ‘자제‘란 "지속적인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 혹은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또한 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입법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자제 규범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나라에서는 정치인들은 제도적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려 들지 않는다.비록 그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기존 체제를 위태롭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137) - P137
제도적 자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가. 영국 정부의 구성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법학자이자 저자인 키스 휘팅턴은 영국 총리의 임명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임명은 왕의 특권이다. 공식적으로 왕은 내각 구성을 책임질 총리를 자기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영국 총리는 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한 정당의 일원으로서 일반적으로 당 대표가 맡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관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영국의 왕들은 수세기에 걸쳐 그 관습을 자발적으로 따랐다. 총리 임명과 관련된 어떤 성문화된 법률은 지금도 찾아볼 수 없다.(138) - P138
미국 역사상 두 번의 임기 제한은 법률이 아니라 자제의 규범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1952년 수정헌법 제22조가 추가되기 전까지, 미국 헌법의 어떤 조항도 대통령이 최대 두 번의 임기로 물러나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았다. 다만 조지 워싱턴이 1797년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 선례로 남았을 따름이다.(중략)미국 역사상 이 규범을 위반한 사례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1940년 재선뿐이었다. 그리고 루즈벨트의 위반은 결국 수정헌법 22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138-140) - P138
자제의 반대는 제도적 특권을 함부로 휘두르는 것이다. 법학자 마크 터쉬넷은 이를 ‘헌법적 강경 태도‘라고 불렀다. (중략) 아르헨티나 1853년 헌법은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애매모호하게 정의했다. 역사적으로 선출된 아르헨티나 대통령들은 그 권한을 신중하게 사용했으며, 실제로 1853년에서 1989년까지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내린 사례는 25회에 불과했다. 그러나 메넴 대통령만큼은 그러한 자제의 미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단일 대통령 임기보다 짧은 기간에 무려 336번이나 행정명령을 내렸다.(140-141) - P140
헌법적 강경 태도는 관용의 규범을 허물어뜨림으로써 경쟁자가 위협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키운다. 그 결과 정치판에서 민주주의 가드레일이 사라진다. 정치학자 에릭 넬슨은 이러한 상황을 "합법적으로 극단적인 전술을 활용하는 악순환"으로 묘사했다.(144) - P144
독립전쟁 이후 미국 정치인들은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고, 또한 경쟁자가 반드시 적은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해졌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인물로 마틴 반 뷰렌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현대적인 민주당의 설립자이며, 미국의 8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반 뷰렌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온화한 카운티 법원 변호사의 정신, 즉 정치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오랫동안 법정에서 상대와 치열한 공방을 벌였지만, 일단 법정 밖을 나서면 동료 법률가들에게 존중, 그리고 종종 친밀한 우정까지 보여주었다.‘(156) - P156
이 두 사건(*1877년 타협, 1890년 연방선거법안 부결)은 미국 민주주의에 중대한 비극이었다. 남부 민주당 인사들 대부분 시민권과 선거권을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인종문제를 논의의 테이블에서 치우기로 한 양당의 타협안은 상호 관용의 회복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중략)역설적이게도 미국 민주주의를 뒷받침한 관용의 규범이 인종차별을 외면하고 남부 일당 지배를 공고히 했던 비민주적인 타협안에서 비롯된 것이다.(161) - P161
매슈스는 1950년대 말 미국 상원에 대한 연구를 통해 민습(folkway)라고 하는 비공식적 규범이 민주주의 제도가 작동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살펴보았다. 그중 예의와 호혜주의라고 하는 두 가지 민습은 자제의 규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그가 말하는 예의란 동료 의원을 개인적으로 공격하거나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태도를 말한다.(중략)다음으로 호혜주의 규범은 협력의 문을 계속 열어놓기 위해 동료를 강하게 비난하거나 권한을 함부로 휘드르는 행동을 심가는 것을 말한다.(171) - P171
미국 민주주의 규범은 차별에 근간을 두었다. 정치 공동체가 대부분 백인의 영역으로 제한되었던 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정당은 서로의 존재를 위협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작된, 그리고 1964년 시민법과 1965년 선거권법을 통해 가속화된 미국 사회의 인종 포섭의 과정은 마침내 미국을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 흐름은 미국 사회를 양극화시켰고, 재건 시대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에 최고의 도전 과제를 안겨다주었다.(182) - P182
공화당과 민주당 인사들은 서로를 적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다양한 분야에서 공통점을 찾아냈다. 민주당과 공화당 내 진보 세력은 하원에서 시민권 보장을 위해 표를 던졌고, 반대로 민주당 남부 인사와 공화당 북부 우파 인사들은 시민권을 억압하기 위해 하원에서 ‘보수주의 연합’123을 형성했다. 1964년 시민권법과 1965년 선거권법으로 정점을 이루었던 시민권 운동은 이러한 정당 구도를 깨버렸다. 시민권 운동은 흑인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 일당 지배를 종식시킴으로써 마침내 남부 지역을 민주화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정당 재편을 장기적으로 가속화했다.
1965년 이후로 시작된 정당 재편과 함께 유권자 집단 역시 이념을 기준으로 재편되었다.128 거의 한 세기 만에 처음으로 이념이 곧 정당의 정체성이 되었다. 즉, 전반적으로 공화당은 보수주의를, 그리고 민주당은 진보주의를 상징하게 되었다.129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민주당과 공화당은 더 이상 이념적 ‘빅텐트’가 아니었다. 민주당 내 보수주의 인사, 그리고 공화당 내 진보주의 인사가 사라졌고, 그에 따라 정당 간 공통분모도 줄어들었다. 상원과 하원 의원들 대부분 상대 당 인사보다 정당 내 동료와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게 되면서 정당 간 협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정당 노선에 따라 표결에 임했다.
정당 재편은 진보와 보수 대결을 넘어서 나타나고 있다. 정당 지지자 집단의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특성이 크게 바뀌면서 정당은 이제 단지 서로 다른 정책적 접근방식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공동체 문화와 가치를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다.
정치학자 앨런 아브라모비츠Alan Abramowitz가 지적했듯이 1950년대에 결혼한 백인 개신교 신자는 미국 전체 유권자 집단에서 80퍼센트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139 그리고 이들은 비교적 비슷한 비중으로 민주당, 혹은 공화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결혼한 백인 개신교 신자가 전체 유권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퍼센트 수준으로 낮아졌고, 이들 대부분 공화당을 지지했다.140 다시 말해 미국의 두 정당은 이제 인종과 종교를 기준으로 확연히 분열되었다.
1993년 뉴욕의 민주당 상원 의원이자 전직 사회학자였던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Daniel Patrick Moynihan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통찰력 있는 주장을 했다.108 모이니핸의 설명에 따르면 불문율에 대한 위반이 계속해서 일어날 때 사회는 ‘일탈의 범위를 축소하는’, 다시 말해 기준을 하향 조정하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였던 행동이 정상적인 행동으로 바뀌는 것이다.
과거에 미국 사회는 지역적, 당파적 적대감으로 분열되었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진 정치 재앙을 경험했다. 그래도 미국의 헌법 체계는 회복되었고, 공화당과 민주당 지도부가 새롭게 개발한 규범과 불문율은 한 세기 넘게 정치적 안정성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안정은 인종차별과 남부 지역의 일당 지배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가능했다. 미국 사회가 완전히 민주화된 것은 1965년이다.1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민주화 과정이 미국 유권자 집단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재편했고, 이러한 변화는 다시 정당정치의 양극화로 이어졌다.2
민주주의 제도는 공식적인 규칙 이상의 것으로, 법률에 더하여 무엇이 바람직한 행동인지에 대한 구성원들의 이해가 필요하다. 1세대 미국 정치 지도자들의 위대한 점은 완벽한 제도를 설계한 것이 아니라, 설계에 더하여 그 제도가 실질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공통된 믿음과 관습을 치밀하게 구축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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