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효형출판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 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1854년, 미서부지역에 거주하던 인디언 추장의 시애틀 연설문이다. 이 연설은 미서부지역 토착민들의 삶터를 차지하는 대신에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보존지구를 마련해 주겠다는 백인정부의 제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은 여타의 공식적 연설문에서 보이는 딱딱함과 근엄성이 배제된, 거의 시적이라 할만큼 아름다운 문장과 영혼의 울림을 담고 있어 개발이라는 명제 하에 자행되는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인 파괴로 인류가 직면하게 된 고통의 시대에 오히려 더 생생한 호소력을 지닌다. 추장은 잔잔한 어조와 소박한 언어, 자연을 대하는 따스한 시각과 이미지, 비유들로 자연의 신비와 인간 삶터와의 관계에 대한 직관을 피력한다. 인디언들은 대의적 명분과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인 대지를 떠나 변방으로 밀려났지만 자연 파괴로 인류가 감당하게 된 폐해들이 속출하는 이때, 다시 한번 되새겨봄직할만 하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는 경제성장에 치여 불모가 된 녹지대에게 보내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만가이다. 각 챕터들은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주인공이 겪은 에피소드를 일기 형식으로 나열한 듯 보인다. 극도로 정밀하고 압축된 상징이 읽기를 방해하고 화자의 내밀한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거부하는 듯 하지만, 그가 그리는 풍경에는 초록이 풍성하고 반짝이는 물소리가 경쾌하고 물장구 치다 온 바람이 맑게 떠다닌다. 그것으로 족하다. 붕붕거리는 차량의 소음, 유골이 뿜어내는 악취, 넘쳐나는 쓰레기더미 속을 걷다 온 발목이 잠시 나른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그 작은 풀벌레 소리들에 위안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게다가 이 작가는 상냥한 유머까지 지니고 있지 않은가. 다정하게 소근대며 웃음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가 생태주의 전통에 서 있는 작가이든 상실과 죽음에 대한 페이소스를 드러낸 작가이든 간에, 아니 그런 구명을 굳이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의 문체는 확실히 발랄하다. 하지만 그 발랄이 지나쳐 수소풍선처럼 하늘을 휘젓고 날아다닐 정도는 아니다. 몸을 벗어나지 않을 만큼 안정을 유지하면서 가끔 겨드랑이를 간질여 움직임을 만드는 정도?

- 내 정액은 물 속으로 터져 나왔다. 환한 빛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그것은 즉시 흐릿하고 기다란 형태로 마치 유성처럼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죽은 물고기 한 마리가 떠 내려와 흩어진 내 정액 사이로 들어갔다. 그것의 눈은 강철처럼 뻣뻣했다.

- 그 날 오후, 양들은 내 낚싯대 앞에서 하천을 건너갔다. 양들은 아주 가까이 지나가서 그 그림자들이 내 낚싯밥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래서 나는 양들의 항문에서 송어를 잡는 셈이 되었다.

- 우리는 미처 풀지 않은 박스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촛불은 마치 접시의 우유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 아이를 만들었고,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브라우티건은 피켓을 들고 현대 문명의 반성과 비판을 외치거나 생태계의 회복을 전면에 내세워 공포감을 조성하지도 않는다. 아들의 잠자리 곁에서 우화를 들려주듯 잔잔하고 다정하게 목가적 풍경을 그려나갈 뿐이다. 다만 그 사이사이 ‘죽은 물고기의 강철처럼 뻣뻣한 눈’처럼 반의적 문장들을 포진해 둠으로써 자연파괴에 대한 반발을 무의식 속에서 의식하게 만든다. 그런 것들이 불편하지 않은 건 그의 수더분한 유머 때문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브라우티건의 문장이 상징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역자의 주석을 눈여겨 보면 된다. ‘양떼는 저항할 줄 모르고 독재자를 따르는 체제 순응적이고 무력한 민중의 상징이다. 목동은 민중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파시스트나 독재자를 상징한다.’ 역자는 브라우티건의 이미지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살뜰한 이정표가 되어준다. 이 텍스트의 알맹이, 생태주의 작가로서의 브라우티건과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초록숲과 개울이 주는 작은 휴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돌다리 통통 거리듯 살풋 건너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브라우티건은 51세에 권총 자살했다고 한다. 악몽같은 현실을 이렇듯 달작지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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