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여인의 집
류가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환타지로 넘어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삶이 던지는 비애와 비장감을 잔인할 정도로 하드보일드하게 다루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뇌살적인 유년을 보낸 두 주인공의 고통은, 환타지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이 제공한 해방감 속에서 무디어졌거나 공감을 더디게 만들고 그럭저럭 재미는 있으나 울림은 없는 맨송맨송한 느낌만 갖게 한다. 작가는 시간여행의 패러독스를 극복하기 위해 ‘에버렛’의 평행 우주로 자신의 주인공들을 떠나 보낸다. 그곳에서 주인공들이 만나게 되는 인물들은 각기 다른 우주를 살아가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스스로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서슴없이. A=B다, 라는 것을 주입시키기 위해 과잉 친절을 베푼다. 끝부분 이십여장에서는 그런 앙탈이 가볼 데까지 가보자고 한다. 슬며시 조롱하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독자를 뭘로 보고! 더구나 이 여자는 피의 관계로 맺어진 이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도살에 대해서는 무지한 듯 하다. 실패한 어머니가 딸의 성공에 집착하는 행위를 ‘진짜 엄마라면 그녀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로 일축해 버린다. 무지막지하게 상식적인 풀이다. 진짜 엄마라면 자식의 삶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 이라는 입양아의 고백에 아직도 가슴 얼얼한 탓일까. 지극히 일반론적인 설정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유리와 클락의 해피엔딩, 사랑만이 구원이다라는 모티프를 과감히 수용한 것도 시대에 뒤떨어진듯 보이고, ‘실패는 끝이 아니라 삶의 필수적인 여정이란 것’ 따위의 구세대적 아포리즘들도 마음에 안 든다. 소소한 재미는 있으되 공감의 여지는 없고 광대무변하게 펼쳐는 놨으되 기립박수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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