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구) 문지 스펙트럼 2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트렌드인 웰빙에 발맞추는 현대적 감각을 지니기 위해, 서는 아니고 그저 덮개 위에다 책 놓고 읽는 이미지에 혹해 욕조 덮개를 구입했다. <첫사랑>은 그러니까 욕조 덮개의 실용성도 실험하고 한군데 진득허니 앉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내 인내심도 테스트해 볼 겸 해서 반신욕 중에 읽게 된 책이다. 꼴에 본 건 많아서 레드 와인 한 잔도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일단 욕조덮개로 말하자면 후회없는 선택, 이었다는 데 한 표. 반신욕의 효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물 속에 잠겨 느슨해진 상태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가슴으로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땀방울의 미학을 즐기는 것도 좋고 움직임을 느낄 때마다 유선형의 물살이 나긋하게 몸을 감싸는 느낌도 좋다. 이런 아늑함 속에서 책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최강이다. 반신욕 중엔 들뢰즈라도 술술 읽힐 것 같다. 몸의 긴장이 완화되면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유지하기에는 최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첫사랑>, 달콤하고 아릿한 추억을 불러들인 다음, 베케트 문학의 특징적 요소들을 감안하여, 첫사랑이란 현상을 통하여 실체 불분명한 감정 상태가 야기하는 관계 맺음의 왜곡과 본질에 대한 회의 등이 다루어지나 보다, 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일단 <첫사랑>에는 첫사랑은커녕 바람같은 사랑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나’가 언급하는 결혼이란 것은 벤치에서 만난 여자와 있을 법 하지 않는 동거 상태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베케트는 기존의 언어 체계마저 허문다. <첫사랑>, <추방자>, <진정제>, <끝>, 네 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텅 비어 있거나 으깨어져 있거나 파괴된 자들이다. 그들은 세상과 관계 맺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도 타협하지 못한다.

베케트의 소설을 읽으면서 틈 없이 정영문을 떠올렸는데, 정영문의 글쓰기가 베케트 소설을 ‘의식적으로’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 드러내놓고 떠벌이고 싶어하는 작가는 드물다. 하지만 정영문은 베케트의 작법이라든지 설정, 소재까지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일단, 쉼표를 과용하면서 이미 발화한 것을 부정하고 뒤집으며 그 의미를 지워나간다. 의미를 생성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 의미를 희석하기 위한 글쓰기인 셈이다.

- 내가 도달한 단계까지 아무 변화 없이 내가 이르렀다면, 설혹 어떤 변화가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되니까, 그렇다 해도 그 단계에 내가 이르렀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역시 변함없는 사실인데,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하다. (도대체 이게 웬 말장난인가.)

또, 어디론가 걷는 사내, 벤치나 공원 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일회성 공간에서의 만남, 혈육을 부정하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인물, 자신은 임신과 출산에 기여한 바가 없음을 밝히고, 소년과 염소에게 집착하고, 모르는 사내에게 자신의 발기 불능에 대해 이야기 하는 등, 베케트의 소설은 정영문의 소설에 그대로 현현된다. 정영문식 글쓰기에 적이 실망스러우면서도 그의 솔직함에 호감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정영문을 내처 읽으며 그 일관된 정서에 긴 하품을 했던 여운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서였을까. 어쩔 수 없이 읽는 내내 읽어도 좋고 읽지 않아도 좋을, 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 쓰는 독서가 되었다. 기실 베케트가 무슨 잘못이랴. 사놓고 읽지 않았던 내 잘못이지. 베케트의 <첫사랑>은 그것으로 족하고 그것으로 매력적인 소설일진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