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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스티븐 런치만 경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면서 1100년을 지켜온 비잔틴 제국은 멸망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베네치아의 군의관 바르바로의 관점을 빌린 "소설"이라면, 이 책은 보다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1453년 전후의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유럽뿐 아니라 투르크까지 아우르며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시선은 마누엘 2세의 영국 방문에서부터 시작한다. 강대해지는 투르크에 맞설 힘이 없던 비잔틴 제국은 서유럽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도움을 구걸하는 처지까지 된 것이다. 하지만 국내 문제에 바빠 멀리 동방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던 서유럽 국가들에게 그의 방문도 효과가 없었다. 그나마 도움이 될만한 로마의 교황은 예전의 권위를 잃은데다가 교회 통합을 해야만 원조를 약속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은 최후까지도 교회 통합으로 내분을 겪어야 했다.
저자는 공방전의 상황을 하루 하루 자세히 서술하고 있어서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체념적인 비관론자들인가 하면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는 그리스인들의 모습과 제노바와 베네치아 사이의 해묵은 반목,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분투, 성인의 유물을 들고 도시를 축성하는 성직자들과 성 소피아 성당에서 마지막으로 예배 드리는 시민들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성벽 안 뿐만 아니라 도시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하는 투르크군의 모습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포효하는 우르반의 대포와 질서정연한 예니체리 부대의 모습, 할릴 파샤와 메메드 2세의 갈등, 언덕으로 배를 끌어올리는 투르크 해군의 모습등 방어하는 쪽과 공격하는 쪽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있어 마치 종군 기자의 리포트를 보는 것 같다.
삼중성벽과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인 콘스탄티노플이지만 투르크군을 엄청난 물량 공세를 버텨내기에는 힘에 부칠 수 밖에 없었고... 결국5월 29일, 그리스 로마 문화의 마지막 보루였던 아름다운 이 도시는 투르크군의 손에 넘어가고 만다. 이후 투르크는 로도스섬, 크레타섬, 세르비아, 헝가리로 파죽지세로 세력을 넓혀나가며 지중해의 새로운 패자로 부상하게 된다.
만약 베네치아 함대가 조금만 일찍 출발했다면, 서유럽 국가들의 십자군이 결성되었다면, 주스티니아니가 성벽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대포 기술자 우르반이 메메드 2세에게 가지 않았더라면...그랬다면 1453년 5월 29일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다행히 그때 함락되지 않았다 하라도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든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메메드 2세의 공격은 그저 콘스탄티노플의 수명을 조금 단축시켰을 뿐이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이 아무리 예정된 것이었을지라도 비잔틴의 찬란한 문화가 처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가슴아프게 한다. 어느 도시, 어느 나라의 멸망이 슬프지 않을까마는 110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의 숨통이 기어코 끊어지는 그 순간은 500년 후에 책으로 보는 나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온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서유럽 중심의 역사 연구와 교육으로 인해 비잔틴의 찬란한 문화와 가치가 오랫동안 잊혀져왔다는 사실이다.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주류 학자들에 의해 무시당하고 잊혀졌던 비잔틴 문명이 근래에 재평가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관련 서적이 부족한 것이 아쉽다. 1960년대에 쓰여진 이 책이 지금이라도 번역된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