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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언 - 전3권
엘리자베스 코스토바 지음, 조영학 옮김 / 김영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드라큘라 전설은 실존 인물인 왈라키아의 군주 블라드 체페슈를 모델로 하고 있다.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특유의 잔혹한 성품으로 인해 자신의 가신들까지 말뚝에 박아 처참하게 죽였던 블라드. 체페슈는 '꼬챙이로 찌르는 자'라는 의미이다.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로 유명해진 이 흡혈귀는 수많은 변형을 거쳐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로 사랑받고 있다. 흡혈 전설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블라드 체페슈 뿐 아니라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마을 처녀들을 잡아다가 그들의 피로 목욕을 했던 헝가리의 귀족 엘리자베스 바토리도 흡혈 전설에 한 몫을 한 인물이다.
나는 뱀파이어 스토리를 좋아한다. 산 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자도 아닌, 어두컴컴한 중세 고딕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들이 주는 이미지는 꽤 매력적이다. 그래서 이 책의 소개 문구를 보고 매료되어 덥썩 집어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드라큘라의 존재를 쫓는 역사학자들이라니!
저자는 드라큘라를 1477년에 죽은 존재가 아니라 50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살아 있는 존재로 그려낸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중세 풍의 용 문양이 그려진 기이한 책을 습득한 폴은 자신의 지도 교수인 로시 교수를 찾아간다. 뛰어난 역사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로시 교수도 젊은 시절 그 책을 얻었고, 그 책이 블라드 체페슈와 관련된 책임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로시 교수는 폴의 방문 이후 실종되고, 폴과 로시 교수의 딸인 헬렌은 로시 교수의 행방을 찾는 도중 현실 세계에 흡혈귀가 존재하며 블라드 드라큘라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책은 마치 한 권의 동유럽 여행 안내 책자같다. 지금의 루마니아 지방에 뿌리를 두고 있던 드라큘라의 행적을 찾기 위해 주인공들은 터키의 이스탄불,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루마니아의 왈라키아, 불가리아의 소피아와 릴라 수도원, 바치코보 수도원, 프랑스의 르 뱅에 이르기까지 매혹적인 장소들을 한 보따리 풀어놓고 있다. 여기에 드라큘라의 시신의 행방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더해지면서 비록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중세의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풍긴다. 저자는 정교회와 메메드 2세 시대의 오스만 투르크, 그리고 블라드 체페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드라큘라의 행적을 쫓는 로시, 폴, 헬렌, 휴 제임스, 스토이체프, 투르굿 등의 역사학자들의 열정과 모험을 그려낸다. 이들이 과거로 부터 단서를 찾아내어 미스터리의 퍼즐을 맞추어가는 순간 순간이 얼마나 매혹적이던지.
다만 긴장감 있게 잘 끌어오던 이야기가 마지막에 가서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점이 아쉬웠다. 헬렌의 실종과 드라큘라의 최후는 전혀 개연성이 없었고, 드라큘라의 목적도 불분명한 채 그렇게 끝나버리다니. 하지만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은 서스펜스나 미스터리가 아니라 바로 '중세를 재현해 낸 분위기'이다. 중세를 대표하는 매력적인 악마인 드라큘라와 그를 둘러싼 고서적들이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매혹적이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체가 묘사해내는 동유럽의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 때문일까.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문체는 거의 또박 또박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보통 소설 책을 읽을 때 거의 속독을 하던 것과 달리 천천히 읽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소설이 주는 오래된 과거의 향기는 충만히 느낄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기면 나도 모르게 양피지로 만들어진 중세의 책들이 가득 들어찬 장대한 도서관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