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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 서현의 우리도시기행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 나는 거리로 나선다. 특색없이 꼬불꼬불한 주택가 골목을 지나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에 시달리다 지하철 역을 나서면 나를 반기는 건 싸구려 간판들과 넓은 길은 차도에 내주고 인색하게 뻗어있는 복잡한 인도이다.
우리나라 어딜가도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다. 그래서일까? 어느새 이런 풍경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이런 거리에 짜증이 나면서도 정당하게 분노하지 못했다. 산업개발이란 미명하에 거리는 사람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개발의 대상이 되어 왔고, 그런 사고 방식은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었나보다.
저자는 외친다. 이 거리에 분노하라고! 이 거리가 정상이 아니라고! 왜 시민들이 가만히 있느냐고 서글프게 다그친다.
일제침략, 한국전쟁, 산업개발의 틈바구니 속에 역사는 실종되고 사람들의 숨결은 사라져 버린 거리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건축가들이나 행정 공무원들의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거리를 만드는 그들을 무관심하게 방치해온 우리의 책임을 이제는 느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거리를 멍들게 하는 건 어설픈 전통의 복원이다. 공공건물을 지을 때면 꼭 나타나는 기와 형식이나 전통문양들. 조선 시대에 고려 시대를 모방하기만 했다면 문화의 발전이 있었을까?
기와를 얹어야만 전통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기와가 아름다운 건 그를 지탱하고 있는 나무 기둥이 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건물에 기와 지붕을 끼워 맞춘 건물들은 기형적일 뿐이다. 우리가 콘크리트 건물에 기와를 얹고 있을 때 루브르 박물관에는 유리피라미드가 세워지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지는 말이 필요 없다.
저자는 말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21세기의 건축은 21세기의 이야기를 하게 하자고....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의 저자가 쓴 또다른 건축 인문서이다. 신문에 연재되던 글을 모았기 때문인지 전작만큼의 집중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사진과 함께 실린 저자의 풍자적인 거리 스케치가 인상적이다.
저자는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의 말을 인용한다.
"모든 시대의 건축가들은 그 시대의 모습을 파리시에 남길 권리가 있다"
우리네 대통령 중에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지금 우리의 거리가 이렇게까지 만신창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은 안목을 가진 정치인의 부재가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