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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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진짜로 책을 좋아하는 독서가든 자신이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독서의 역사"라는 제목만으로도 책을 즐겨읽는 사람들의 구미를 당긴다. 그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광범위한 책에 관한 지식과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는 저자의 독서량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쓴 독서의 역사가 서양의 책 중심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또는 동양의 독서의 역사를 엮어 낸다면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한 것 같다.

그런데 마침 얼마전에 그런 책을 만났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가 그 책이다. 물론 이 책은 시기면에서는 조선이라는 짧은 기간만을 담아내고 있고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책과 책읽기에 관한 역사라는 부족한 면이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독서의 역사임에는 분명하다.

이 책이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책과 독서에 관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그 위대한 승리"를 다시 찾게 만들었다. 학교 다닐 때의 교과서나 교재 이외에는 반복해서 읽은 적이 거의 없는데 두번씩 책을 읽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인 것 같다. 사실 제목박에 기억나지 않아 독서에 관한 기본 교양을 위해서는 책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기억에 남겨야겠다는 결심이 한몪 했다.

망구엘은 아마도 자신의 엄청난 분량과 다양한 독서를 바탕으로 역사이기는 하지만 장별로 독특한 주제로 시대를 넘나들며 때로는 책에 관한 역사, 때로는 책읽기에 관한 역사를 현란하게 펼쳐나간다. 책의 재질과 모양, 크기에서부터 책읽는 사람들에 대한 시대적 인식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책에 얽힌 사연들을 포진함으로써 책자체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지식들이 가득하다.

거기에다  특히 마음에 드는 건 밑줄을 그어가면서 기억해 두고 싶은 책에 관한 뛰어난 서술이다. 따라서 그의 책 속에 있는 주요 표현들을 인용해 두는 것이 책을 기억하는 더 좋은 방법이 될 듯하다.

"책 한 권을 소유하는 행위에 잠재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앞서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의 독서의 역사이다. 말하자면 새롭게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보다 앞서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에게 그 책은 어떤 존재였었을까를 상상하는데, 바로 그런 상상에서도 독서가는 어떤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 한 권의 책은 그 자체의 역사를 독서가에게 안겨준다."(pp.29-30)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p.37) - 그러면 나도 지금 범죄행위를 저지런 셈이다.

"신하들이 이걸 배운다면 그들의 영혼에 망각할 수 없는 무언가를 심는 결과가 되오. 그 사람들이 앞으로는 쓰여진 것에만 의존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이상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더듬어 내려 하지 않고 눈에 드러나는 기호에만 의존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기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거요. 당신이 발명한 것은 기억을 위한 비법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한 비결이오. 그리고 그대가 그대의 신봉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유사품에 지나지 않소."(p.90) - 책의 존재는 문자의 발명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문자의 발명의 어느 시대에나 환영할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현재 영상물의 홍수로 문자(책)가 소외받는 시기에도 이런 비유가 적절할 것 같다.

"수세기 동안, 그리고 수많은 나라에서 이뤄졌던 것을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중세말기와 르네상스 초기의 기독교 사회에서 읽고 쓰기를 배우는 것은 - 교회 밖에서 - 거의 귀족과 (13세기 후에는) 상류층 부르주아들의 특권이었다. - 이는 우리 조선의 상황도 마찬가지 또는 더 가혹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금속활자의 보급으로 책의 보편화가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18세기 하시디즘의 대가였던 베르디체프의 랍비 레비 이츠하크는 바빌로니아의 탈무드를 보면 책의 첫 페이지가 모두 결락되어 꼭 두번째 페이지부터 읽도록 되어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 랍비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읽는 사람일지라도 아직 그 책의 첫 페이지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오"라고 대답했다.(p.134) - 이건 책에 대한 예의가 너무 지나친 '과공비례'가 아닌가. 책을 즐겨찾는 사람치고 자기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까?

"그렇지만 한 독서가가 낙담하는 바로 그 책장에서 또 다른 독서가는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독서 행위가 갖는 창조적인 본질이 담겨 있다."(p.140)

"15세기 말경에는, 비록 인쇄술이 확립된 터였지만 우아한 손재능에 대한 동경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서구 역사상 가장 기억할 만한 달필의 일부는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 있었다. 책을 대하기가 더 쉬워졌고,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배우는 한편으로 글자를 보다 우아하고 두드러지게 쓰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는 인쇄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육필 입문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기술상의 발전이 그 기술로 인해 뿌리째 뽑혀 버리리라고 예상되던 것들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시키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주목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이 드물어진 지금에도 이런 반전이 가능할까?

"'월드 클래식스' 같이 거창하지 않아야 하며 '에브리맨스' 처럼 선심쓰는 체하는 이름이어서도 곤란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동물이름들이었다. 돌핀, 이어서 포퍼스(참돌고래), 그리고 마침내 펭귄이 떠올랐다. 맞아, 바로 그이름이었다." - 영국의 유명한 출판사인 펭귄이라는 이름의 탄생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책읽기의 은유) "휘트먼이 볼 때 텍스트와 작가, 독자, 그리고 이 세상은 독서행위에서 서로를 비추는 존재였다. .... 이런 연계선상에서 보면 독자는 작가를 반영하고(그와 나는 하나다), 세상은 한 권의 책(신의 책, 대자연의 책)을 반영하고, 책은 곧 피와 살이며(작가 자신의 살과 피이지만 문학적 변형을 통해 나의 것이 된다). 이 세계는 판독해 내야할 책이 된다(작가의 시는 나의 세상읽기가 된다). 휘트먼은 한평생 책읽는 행위에 대한 정의와 이해에 천착했던 것처럼 보이는데, 독서행위는 행위 그 자체이기도 하면서 그 행위에 참여하는 요소들의 은유이기도 하다."(p.248) "휘트먼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p.249)

"공부하는 기술에 관한 에세이에서 16세기 영국 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어떤 책은 음미해야 하고 또 어떤 책은 삼켜야 하고 극히 일부는 씹어 소화시켜야 한다"고 공부방법을 분류했다."  (p.251)- 시와 소설과 사회과학이 그러할까?

"한권의 책이랄 수 있는 이 세상은 이 세상이라는 텍스트에서 글자 한 자에 해당하는 독서가에 의해 게걸스레 먹힌다. 이리하여 독서의 끝없음을 위해서 순환적인 은유가 끊임없이 창조된다. 우리 존재는 읽은 만큼 성장한다. 그 순환이 완성되는 과정은 단순히 지적인 과정만은 아니라고 휘트먼은 주장했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는 지적으로 읽어 어떤 의미를 파악하고 어던 사실들을 자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도 텍스트와 독서가는 서로 한데 얽히면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텍스트를 섭취하여 텍스트가 가두고 있던 무언가를 풀어낼 때마다 그 텍스트의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아직 파악해 내지 못한 무언가가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휘트먼이 자신의 시를 거듭 손질하고 다시 펴내면서 믿었던 것처럼, 어떠한 책읽기도 결코 완성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p.254)

"도서관은 ....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모았던 곳"(p.273)

"아득한 옛날 성 금요일에 콘스탄티누스가 발견한 것은 한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독서가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확대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대할 때 독자는 그 텍스트의 단어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역사적으로 그 텍스트나 저자와느느 전혀 관계없는 의문을 풀어주는 메시지로 바꿔버릴 수 있다. 이런 식의 의미변질은 텍스트 자체를 확장시키거나 퇴보시킬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텍스트에 독서가 자신의 환경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말해 그것을 재창조해 내는 것이다."(p.306)

"한권 한권 쌓아올리면서 나는,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다시는 읽지 않을 것이 뻔한데도 그렇게 많은 책을 간직하려는 이유는 대체 뭘까 궁금해한다. ... 나는 철저함과 희귀함, 그리고 얄팍한 학식을 구실로 내세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계속 늘어만 가는 이 책 무리들을 계속 움켜쥐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일종의 관능적인 탐욕이라는 것을"(p.342) -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책에 대한 욕심이 과한가 보다라고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탐욕적인 독서가"에서 느끼는 것처럼 탐욕이 이렇게 긍정적인 뜻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은가?

"번역은 불가능한 작업이고, 배반이고, 기만이고, 날조이고, 희망있는 거짓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번역은 독자들을 더 현명하고 훌륭한 청취자로 바꿔 놓는다. 고집은 조금 누그러지고 감수성은 훨씬 더 민감해지는 "seliglicher'의 존재로 발전한다는 말이다. (p.400)

"노예에게 있어 글 읽기를 배우는 것은 자유를 얻는 패스포트가 아니라 압제자들이 그들을 짓누르는 막강한 도구인 책에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 더욱 중요한 점은 독서가는 그 문장을 반추하고 그 문장에 따라서 행동하고 그 문장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p.404)

"볼테르는 '가공할 만한 독서의 위험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풍자적인 소책자에서 "책은 무지와 잘 정비된 경찰국가의 감시인과 호위를 사라지게 만든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 검열은 모든 권력의 필연적인 귀결이고, 독서의 역사는 초기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부터 우리 당대의 책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검열관의 불길로 점철되어 왔다."(p.406) - 권력을 펜에서 나온다.

"이런 것들은 독서가들 모두에게 매우 평범한 몸짓들이다. 안경을 케이스에서 꺼내 종이조각이나 윗옷 가장자리나 넥타이 끝부분으로 닦은 뒤 그것을 코 위에 걸친다. 그제서야 훤하게 보이는 책장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나서도 글자의 초점을 맞추려고 안경을 위로 올리거나 아니면 반들거리는 콧등 아래로 약간 내린다. 또 조금 있다가는 빨려들 듯했던 텍스트를 보지 않으려고 안경을 들어올리고 양 눈썹 사이의 미간을 문지르며 눈을 감고 눈꺼풀을 찡그려 본다. 이제 마지막 행동이 따른다. 안경을 벗어 곱게 접어 밤을 위해 이제 막 끝낸 책장 사이에 꽂아 둔다." (p.420) - 마치 나를 그대로 묘사한 듯한 현실감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안경쓴 모든 독서가들이 공감할.

"나태한, 연약한, 젠체한, 현학적인, 엘리티스트, 이런 것들은 골똘한 학자, 시력이 나쁜 독서가, 책벌레, 얼간이들 하면 연상되는 형용사들이다. 책속에 파묻혀, 세상과는 담을 쌓은 채, 너덜너덜한 책 표지 안에 담긴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자신들이 더 낫다는 우월감에 빠져, 하느님의 가르침에 숨은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척했던 안경 낀 독서가는 얼간이로 비쳤고, 안경은 지적 오만의 상징이 되었다."(p.426) - 안경이 때로는 지적인 이미지의 상징이 되고 때로는 현실에 부적응하는 얼간이를 상징하기도 한 것은 역사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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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서스와 올리브나무 - 양장
토머스 L. 프리드만 지음, 신동욱 옮김 / 창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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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xus and the Olive Tree"(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이미 책이 나온지 수년이 되었고 발간당시 DJ정부때 수인이 된 사람이 옥중에서 감명깊게 읽었다고 매스컴을 타면서 더 유명해진 책. 그때는 한낱 저널리스트가 쓴 에세이 정도로 생각한데다 언론에서 부추기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어느 정도의 혐오감으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그런데 큰 녀석이 참가하고 있는 토론회 모임에서 교재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도 원서로, 이 참에 큰 녀석과 눈높이도 맞추고 저널리스틱한 글을 통해 풍부한 교양을 쌓을 겸 도서관에서 번역서를 빌렸다. 그런데 그 두께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사전같은 두께에 800페이지에 한장이 모자라는 799페이지짜리 책이라니. 원서로는 500페이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데 국어의 표현이 많이 긴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떠한 내용인지에 대한 사전 정보없이 서문부터 읽고 들어가니 바로 20세기말부터 불기 시작한 세계화의 의미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이란다. 불과 얼마전에 읽었던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과는 정반대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미래의 희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즉 장하준 교수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기본사상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큰 녀석이 토론할 때 렉서스 이후에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교재로 사용하면 아주 유용한 주장과 비판에 관한 재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책이 발간된 지 7년이 지난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진행상황과 이의 기반이 되는 인터넷이나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이 너무 익숙해져 새로운 맛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산업의 등장과 이에 따른 전세계 국가간의 연계성 증대에 따른 미래의 전망 등은 여전히 유효하고 유용한 듯 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서평대로 세계화된 경제질서의 새로운 흐름에 대한 창의적인 설명을 저널리스트의 술술 읽히는 문장과 흥미진진한 사례들이 책의 두께에도 질리지 않고 집중시켜 준다.

아둔함 때문에 책의 중간부분에 다다라서야 제목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 끝부분에서 저자는 이 의미를 보다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래와 같은 사례를 통해서.

p.785. 세계화시대의 올리브 나무

그(배달업체의 흑인 남성)는 책을 상자 안에 되돌려넣으며 내게 이렇게 말을 붙였다. "흠, 그러니까 렉서스는 기술이며 컴퓨터 따위를 상징하는 말이군요?"

나는 맞다고 대답했다.

그는 또 "그리고 올리브타무는 공동체며 가정 등을 상징하는 거구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바로 이해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물어왔다. "그렇다면 말씀 좀 해보세요. 여기에서 하나님은 어떤 위치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여기서 그는 어떤 존재인가요?"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따를 경우에만 모든 국가가 보다 부유해질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미국은 지속가능한 세계화를 달성하기 위해 여전히 세계의 경찰이자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고 마무리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미국의 입장에서 본 세계화라는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미래를 보는 눈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 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도록 깊이 자극해주는 책이다. 더불어 대입 논술에서 모범답안을 작성하기 위해 인용해야 할 부분들이 수두룩할 수도 있는 실용서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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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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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책을 읽고 알라딘서재를 가끔씩 돌아다니면서 수천개의 리뷰를 단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그 부지런함, 읽는 것 보다 기록으로 남기는 부지런함에 대해.

리뷰나 감상은 책을 읽은 직후에 쓰느게 가장 풍부하고 직관적인 느낌을 담을 수 있는 것 같은데 며칠 지나보면 전반적인 책에 대한 감상만 남을 뿐 구체적으로 얻은 것들을 되새기기가 참 어렵다.그러다 보면 무언가 기록을 남겨야 겠다는 의지나 자신감도 점차 사라지게 되고. 점덤 더 그 책에 대한 기억은 가물해진다.

지난 1년간 조선에 관한 책을 꽤 많이 읽은 것 같다. 역사든 소설이든 "조선"을 배경으로 한 책이 가장 많이 출간되는 데다 역사에 관한 현존하는 기록은 조선이 대부분이라는 데 있겠지만, 참으로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책들이 조선을 배경으로 쓰여지는 것 같다.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 역사사랑,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등 모두 조선을 배경으로 아마도 조선왕조실록을 참조한 소설이나 역사서가 아닌가.

강명관이 쓴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도 조선의 지독한 애서가, 다독가이자 박학한 지식인이자 교양인들을 뼈대로 쓰여진 책이다. 조선을 시작한 정도전부터 근대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신채호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세종이나 정조, 박지원, 정약용 등의 실학자부터 다소 이름이 낮선 홍석주나 유만주에 이르기 까지 22명의 조선 지식인이 읽은 책이나 독서에 관한 열정이나 자세 등을 역사적 배경을 곁들여 이야기를 전개해 가고 있다.

일부 사람들의 높지않은 평가에 큰 기대를 품지않고 책을 샀지만 주말 이틀동안 지루한 줄 모르고 읽어나갔다. 독서의 역사에 관심이 많고 애서가 또는 장서가를 꿈꾸는 내게 책벌레라는 제목 자체가 어느정도 책에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준덕도 있을터이다.

몇가지 생각나는 것.

저자의 조선왕조나 왕에 대한 평가는 매우 비판적이다. 왕은 아무리 개혁적이라도 성리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현체제를 흔드는 어떠한 저항도 허용치 않는다. 권력을 유지하는 한도내에서만 개혁적이다. 이러한 인식은 정조에 대해 두드러진다. 정조가 중국을 통해 서구문명이나 서적을 충분히 접했음에도 문체반정을 주도하고 정약용이나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는 무리들을 박해하는 것을 그 증거로 든다. 정조는 서양문물을 접했지만 이를 배척하고 더욱 굳건히 성리학 중심의 조선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러한 인식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같은 책에서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마 여기서는 정조의 기독교도 박해가 노론과 소론, 또는 남인과의 권력투쟁과정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평가했던 것 같다.

또하나 저자는 모든 저자들의 새로운 사고나 사상은 책읽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지식이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결과로 인식한다. 특히 독창적인 글쓰기로 모두 인정하는 연암의 글조차 당시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에 있는 서점에서 들여온 최신 서적을 통해 접한 다양한 문체나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점을 밝혀낸다. 물론 그럼에도 연암의 열하일기의 탁월성의 빛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인다.

이 책을 읽으면 조선 전기 또는 중기까지 조선이 얼마나 주자의 경전해석을 담은 주자대전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의 세계였는지, 책이라는 것이 주로 귀족들만이 접할 수 있는 얼마나 귀한 재산인지, 18세기가 되어서는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양명학, 고증학 등 중국의 다양한 사상을 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조선 최고의 장서가가 누구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책읽는 사람들의 책을 대하는 자세나 책을 읽는 습관 등을 덤으로 얻을 수 있으며 그들의 책읽는 모습이 현재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원하는 사람 대부분 적당한 가격에 원하는 책을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특히 가난한 애서가이자 책벌레인 이덕무는 책을 빌려보는 일이 무척 많았든 듯 책을 빌리는 예의를 설교하고 있다. 어릴적 책이 별로 없어 세계명작 전집이 꽃혀 있는 친구의 서가를 보고 부러웠던 시절이 생각나 그 내용을 옮겨본다.

"책을 빌려주는 것의 기본정의다. "남에게 책을 빌려주어 그 사람의 뜻과 사업을 키워주는 것은, 남에게 돈과 재물을 주어 그 곤궁과 굶주림을 구제해 주는 것과 같다." ... 하지만 남에게 책을 빌려주기를 강요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의 책이나 시문, 그림은 보고 난 뒤 빌려주기를 청할 것이며, 주인이 허락하지 않을 경우 억지로 빼앗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서는 안된다." .... 남의 책을 빌리면 정하게 읽거나 베끼고 기한 내에 돌려주어라. 기한을 넘기거나 주인이 독촉하는데도 돌려주지 않으면 안된다. 또 빌린 책을 돌려주지 않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서는 안된다. 지켜야할 예의는 이것뿐이 아니다. 남의 아직 완성하지 못한 책이나 장정이 안된 서화를 빌려서는 안된다. 완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원작이 손상될 수 있는 탓이다. 빌려준 사람에게 보답도 해야한다."(pp.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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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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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

그 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던 장하준 이라는 사람이 지은 책중에서 내가 맨처음으로 산 책.  몇년간 한국을 떠나있는 동안 그의 책이 이미 여러권 나온 데다 그의 화려한 학력과 명쾌한 분석과 거침없는 비판 덕분에 이미 매우 유명해진 모양이다. 처음에는 장하성과 혼동을 하기도 한 것 같다. 한국 경제에 관한 책들을 많이 내었기에. 

그동안 그가 쓴 책의 권수 등 무엇보다도 나를 압도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의 대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는데다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는 학자라는 사실이었다. 영국의 최고대학에서 동양인이 교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지는 정운영 교수님의 칼럼집(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을 통해서였고, 10년 이상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핵심적인 경제학자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는 미국에서 공부하며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실상이다.

그래서 책의 내용보다는 그의 현재를 있게한 그의 이력이 더 궁금했다. 경제분야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가졌고(이렇게 영어는 어느정도 극복대상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와서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그의 천재성이나 능력은 어느정도 검증된 것 같다)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거기서 학위와 함께 자리를 잡아 현재에 이른 듯하다. 물론 그 과정 사이사이에 그의 피나는 땀과 노력이 진하게 배어있었을 테지.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개방과 개혁을 강요하는 선진국들의 경제논리로 지난 20년간 자리잡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도주의 경제학적 관점에서의 대중적 비판서다. 이미 번역되어 나온 몇권의 책(국가의 역할이나 사다리 걷어차기)이 학문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어 술술 읽히지 않는 반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기존의 이론체계를 집대성하면서도 일반인들이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너무 술술 흥미롭게 읽혀 그의 책이 모두 그런지 알고 나중에 "국가의 역할"을 보면서 진도가 나가지 않아 고생을 했다. 처음에는 선진국들의 과거 역사를 파헤치면서 그들도 했던 각종 보호주의 정책을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선전하는 그들의 신자유주의가 허구라는 것을 너무나 현실감있고 설득력있게 비판하기에 도대체 그의 사상적 근거가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분명히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적 기반이 아닌데.

중간쯤 읽고 나서야 어렴풋이,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보면서 그의 사상적 기반이 제도주의 경제학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10년쯤 전에는 제도주의 경제학과 관련해 잠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논리가 거의 그대로 이용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제도주의 경제학에 대해 쉽게 이단으로 치부하고 무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뭐 어떤가? 꿩잡는게 매라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더욱 설득력있게 해낼 수만 있다면.

그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란 점은, 그리고 그가 영국에서도 충분히 성공한 경제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은 영국인보다 그리고 영국인 경제학자보다 더 영국의 고전과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박노자가 19세기 한국의 실학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읽으면서 어떻게 한국인인 나보다 더 해박한 지식에다 유려한 문체의 문장을 줄줄이 엮어낼 수 있는가하는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과 같이 영국인들도 장하준을 볼 것 같다. 예를 들어 장하준은 걸리버 여행기를 쓴 작가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경제현상을 사례를 든다. 우리가 모르는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의 초기 저작의 내용을 파란눈을 가진 이방인이 인용한다고 생각해보라.

모름지기 아이를 키우려면 장하준 같은 아이를 만들지어다.

2008.1.22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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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베르베르가 쓴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내가 보려고 산 것도 아니고 딸 녀석이 친구가 재미있게 보았다고 사달라고 해서 산 책을.

녀석이 보고 나서 안방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것을 집어 들고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진도가 너무 느렸다. 전철 타는 시간 20분에 왕복으로 하루 50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웠다. 몇주전 술마시고 들어와 이른 시각부터 자다가 새벽에 몸과 머리가 불편해 깨었다가 다시 잠이 오지 않자 빠피용을 읽어 나갔다. 150페이지 정도를 읽고 이틀인가 뒤 대선일 즈음 밤에 끝을 낸 것 같다.

개미부터 시작한 그의 명성에 비하면 빠피용의 첫인상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특별한 복선이나 추리소설이 갖는 뒷부분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같은 것이 없이 서술형태로 술술 읽히는 책이었다. 한 장이 끝나면 다음장에 대한 기대로 책을 놓을 수 없도록 하는 마력 같은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읽기 위해 인내심을 가져야 할 정도는 아니다.

지구의 불안한 미래를 탈출하기 위해 140만명의 지구인을 태울 수 있는 우주선을 타고 세대를 이어가며 천년을 여행하며 새로운 지구를 찾아나선 사람들의 이야기.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나지만 결국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민과 갈등과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간다고 해결될 수는 없다는 주제같다. 그리고 지구의 모든 생활여건을 축소해 놓은 수십킬로미터 길이의 우주선 모양은 미래적이긴 하지만 그가 지주로 삼고 있다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오랫동안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멋진 풍자는 없는 것 같다.

그의 이전 소설들이 모두 이 정도라면 굳이 그것들을 애써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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