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00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진짜로 책을 좋아하는 독서가든 자신이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독서의 역사"라는 제목만으로도 책을 즐겨읽는 사람들의 구미를 당긴다. 그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광범위한 책에 관한 지식과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는 저자의 독서량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쓴 독서의 역사가 서양의 책 중심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또는 동양의 독서의 역사를 엮어 낸다면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한 것 같다.

그런데 마침 얼마전에 그런 책을 만났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가 그 책이다. 물론 이 책은 시기면에서는 조선이라는 짧은 기간만을 담아내고 있고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책과 책읽기에 관한 역사라는 부족한 면이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독서의 역사임에는 분명하다.

이 책이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책과 독서에 관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그 위대한 승리"를 다시 찾게 만들었다. 학교 다닐 때의 교과서나 교재 이외에는 반복해서 읽은 적이 거의 없는데 두번씩 책을 읽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인 것 같다. 사실 제목박에 기억나지 않아 독서에 관한 기본 교양을 위해서는 책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기억에 남겨야겠다는 결심이 한몪 했다.

망구엘은 아마도 자신의 엄청난 분량과 다양한 독서를 바탕으로 역사이기는 하지만 장별로 독특한 주제로 시대를 넘나들며 때로는 책에 관한 역사, 때로는 책읽기에 관한 역사를 현란하게 펼쳐나간다. 책의 재질과 모양, 크기에서부터 책읽는 사람들에 대한 시대적 인식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책에 얽힌 사연들을 포진함으로써 책자체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지식들이 가득하다.

거기에다  특히 마음에 드는 건 밑줄을 그어가면서 기억해 두고 싶은 책에 관한 뛰어난 서술이다. 따라서 그의 책 속에 있는 주요 표현들을 인용해 두는 것이 책을 기억하는 더 좋은 방법이 될 듯하다.

"책 한 권을 소유하는 행위에 잠재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앞서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의 독서의 역사이다. 말하자면 새롭게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보다 앞서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에게 그 책은 어떤 존재였었을까를 상상하는데, 바로 그런 상상에서도 독서가는 어떤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 한 권의 책은 그 자체의 역사를 독서가에게 안겨준다."(pp.29-30)

"책을 읽으면서 그전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를 회상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그때의 감정을 불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독서야말로 가장 세련된 형태의 간통이다"(p.37) - 그러면 나도 지금 범죄행위를 저지런 셈이다.

"신하들이 이걸 배운다면 그들의 영혼에 망각할 수 없는 무언가를 심는 결과가 되오. 그 사람들이 앞으로는 쓰여진 것에만 의존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이상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더듬어 내려 하지 않고 눈에 드러나는 기호에만 의존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기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거요. 당신이 발명한 것은 기억을 위한 비법이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한 비결이오. 그리고 그대가 그대의 신봉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유사품에 지나지 않소."(p.90) - 책의 존재는 문자의 발명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문자의 발명의 어느 시대에나 환영할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현재 영상물의 홍수로 문자(책)가 소외받는 시기에도 이런 비유가 적절할 것 같다.

"수세기 동안, 그리고 수많은 나라에서 이뤄졌던 것을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중세말기와 르네상스 초기의 기독교 사회에서 읽고 쓰기를 배우는 것은 - 교회 밖에서 - 거의 귀족과 (13세기 후에는) 상류층 부르주아들의 특권이었다. - 이는 우리 조선의 상황도 마찬가지 또는 더 가혹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금속활자의 보급으로 책의 보편화가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18세기 하시디즘의 대가였던 베르디체프의 랍비 레비 이츠하크는 바빌로니아의 탈무드를 보면 책의 첫 페이지가 모두 결락되어 꼭 두번째 페이지부터 읽도록 되어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 랍비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읽는 사람일지라도 아직 그 책의 첫 페이지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오"라고 대답했다.(p.134) - 이건 책에 대한 예의가 너무 지나친 '과공비례'가 아닌가. 책을 즐겨찾는 사람치고 자기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까?

"그렇지만 한 독서가가 낙담하는 바로 그 책장에서 또 다른 독서가는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독서 행위가 갖는 창조적인 본질이 담겨 있다."(p.140)

"15세기 말경에는, 비록 인쇄술이 확립된 터였지만 우아한 손재능에 대한 동경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서구 역사상 가장 기억할 만한 달필의 일부는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 있었다. 책을 대하기가 더 쉬워졌고,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배우는 한편으로 글자를 보다 우아하고 두드러지게 쓰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는 인쇄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육필 입문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기술상의 발전이 그 기술로 인해 뿌리째 뽑혀 버리리라고 예상되던 것들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시키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주목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이 드물어진 지금에도 이런 반전이 가능할까?

"'월드 클래식스' 같이 거창하지 않아야 하며 '에브리맨스' 처럼 선심쓰는 체하는 이름이어서도 곤란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동물이름들이었다. 돌핀, 이어서 포퍼스(참돌고래), 그리고 마침내 펭귄이 떠올랐다. 맞아, 바로 그이름이었다." - 영국의 유명한 출판사인 펭귄이라는 이름의 탄생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책읽기의 은유) "휘트먼이 볼 때 텍스트와 작가, 독자, 그리고 이 세상은 독서행위에서 서로를 비추는 존재였다. .... 이런 연계선상에서 보면 독자는 작가를 반영하고(그와 나는 하나다), 세상은 한 권의 책(신의 책, 대자연의 책)을 반영하고, 책은 곧 피와 살이며(작가 자신의 살과 피이지만 문학적 변형을 통해 나의 것이 된다). 이 세계는 판독해 내야할 책이 된다(작가의 시는 나의 세상읽기가 된다). 휘트먼은 한평생 책읽는 행위에 대한 정의와 이해에 천착했던 것처럼 보이는데, 독서행위는 행위 그 자체이기도 하면서 그 행위에 참여하는 요소들의 은유이기도 하다."(p.248) "휘트먼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p.249)

"공부하는 기술에 관한 에세이에서 16세기 영국 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어떤 책은 음미해야 하고 또 어떤 책은 삼켜야 하고 극히 일부는 씹어 소화시켜야 한다"고 공부방법을 분류했다."  (p.251)- 시와 소설과 사회과학이 그러할까?

"한권의 책이랄 수 있는 이 세상은 이 세상이라는 텍스트에서 글자 한 자에 해당하는 독서가에 의해 게걸스레 먹힌다. 이리하여 독서의 끝없음을 위해서 순환적인 은유가 끊임없이 창조된다. 우리 존재는 읽은 만큼 성장한다. 그 순환이 완성되는 과정은 단순히 지적인 과정만은 아니라고 휘트먼은 주장했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는 지적으로 읽어 어떤 의미를 파악하고 어던 사실들을 자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도 텍스트와 독서가는 서로 한데 얽히면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텍스트를 섭취하여 텍스트가 가두고 있던 무언가를 풀어낼 때마다 그 텍스트의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아직 파악해 내지 못한 무언가가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휘트먼이 자신의 시를 거듭 손질하고 다시 펴내면서 믿었던 것처럼, 어떠한 책읽기도 결코 완성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p.254)

"도서관은 .... 이 세상의 모든 기억을 모았던 곳"(p.273)

"아득한 옛날 성 금요일에 콘스탄티누스가 발견한 것은 한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독서가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확대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대할 때 독자는 그 텍스트의 단어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역사적으로 그 텍스트나 저자와느느 전혀 관계없는 의문을 풀어주는 메시지로 바꿔버릴 수 있다. 이런 식의 의미변질은 텍스트 자체를 확장시키거나 퇴보시킬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텍스트에 독서가 자신의 환경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말해 그것을 재창조해 내는 것이다."(p.306)

"한권 한권 쌓아올리면서 나는,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다시는 읽지 않을 것이 뻔한데도 그렇게 많은 책을 간직하려는 이유는 대체 뭘까 궁금해한다. ... 나는 철저함과 희귀함, 그리고 얄팍한 학식을 구실로 내세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계속 늘어만 가는 이 책 무리들을 계속 움켜쥐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일종의 관능적인 탐욕이라는 것을"(p.342) -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책에 대한 욕심이 과한가 보다라고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탐욕적인 독서가"에서 느끼는 것처럼 탐욕이 이렇게 긍정적인 뜻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은가?

"번역은 불가능한 작업이고, 배반이고, 기만이고, 날조이고, 희망있는 거짓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번역은 독자들을 더 현명하고 훌륭한 청취자로 바꿔 놓는다. 고집은 조금 누그러지고 감수성은 훨씬 더 민감해지는 "seliglicher'의 존재로 발전한다는 말이다. (p.400)

"노예에게 있어 글 읽기를 배우는 것은 자유를 얻는 패스포트가 아니라 압제자들이 그들을 짓누르는 막강한 도구인 책에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 더욱 중요한 점은 독서가는 그 문장을 반추하고 그 문장에 따라서 행동하고 그 문장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p.404)

"볼테르는 '가공할 만한 독서의 위험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풍자적인 소책자에서 "책은 무지와 잘 정비된 경찰국가의 감시인과 호위를 사라지게 만든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 검열은 모든 권력의 필연적인 귀결이고, 독서의 역사는 초기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부터 우리 당대의 책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검열관의 불길로 점철되어 왔다."(p.406) - 권력을 펜에서 나온다.

"이런 것들은 독서가들 모두에게 매우 평범한 몸짓들이다. 안경을 케이스에서 꺼내 종이조각이나 윗옷 가장자리나 넥타이 끝부분으로 닦은 뒤 그것을 코 위에 걸친다. 그제서야 훤하게 보이는 책장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나서도 글자의 초점을 맞추려고 안경을 위로 올리거나 아니면 반들거리는 콧등 아래로 약간 내린다. 또 조금 있다가는 빨려들 듯했던 텍스트를 보지 않으려고 안경을 들어올리고 양 눈썹 사이의 미간을 문지르며 눈을 감고 눈꺼풀을 찡그려 본다. 이제 마지막 행동이 따른다. 안경을 벗어 곱게 접어 밤을 위해 이제 막 끝낸 책장 사이에 꽂아 둔다." (p.420) - 마치 나를 그대로 묘사한 듯한 현실감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안경쓴 모든 독서가들이 공감할.

"나태한, 연약한, 젠체한, 현학적인, 엘리티스트, 이런 것들은 골똘한 학자, 시력이 나쁜 독서가, 책벌레, 얼간이들 하면 연상되는 형용사들이다. 책속에 파묻혀, 세상과는 담을 쌓은 채, 너덜너덜한 책 표지 안에 담긴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자신들이 더 낫다는 우월감에 빠져, 하느님의 가르침에 숨은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척했던 안경 낀 독서가는 얼간이로 비쳤고, 안경은 지적 오만의 상징이 되었다."(p.426) - 안경이 때로는 지적인 이미지의 상징이 되고 때로는 현실에 부적응하는 얼간이를 상징하기도 한 것은 역사가 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