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귓속말

 

   미끄러지듯이 그녀의 발이 나무 바닥 위를 탁탁거린다. 그녀가 신은 구두는 탭 댄스화. 그녀는 탭 댄스를 배운 지 1년이 되었다. 그녀의 발은 굉장히 빠르게 리듬을 타고 있다. 댄스화의 소리가 진동으로 울려서 나무 바닥이 둥둥둥 하고 울렸다. 그녀의 상체는 단순한 손짓에 지니지 않았지만, 발동작은 현란했다. 발을 타다닥 거리며 나무 바닥 위를 계단을 오르듯이 움직이는 듯 했다. 연습 공간이 거대한 징이 되었다. 징을 두드릴수록 소리는 분명해진다. 그녀의 탭 댄스 소리가 하나하나 또렷하다. 그녀의 발동작만 보인다. 왜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 보이는 것일까? 나는 아까부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흐른다. 땀방울이 똑 떨어지고 움직이는 찰나에 방울이 튄다. 그녀는 거울을 쳐다보지 않는다. 오직 소리만을 듣고 있다. 그녀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그녀의 발소리에 온 정신을 맡기고 있다. 나는 서서히 무너져간다. 그녀는 내가 알 수 없는 여자이다. 나는 그녀가 쓰러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마 내가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겠지.

 

    그녀의 이름은 은수이다. 정은수. 그녀는 나보다 3살이 많다. 그녀는 대학원을 그만두고 댄스에 목을 매기 시작했다고 댄스 선생님에게 들었다. 나도 1년 전부터 이곳에서 탭 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의 발은 모래주머니라도 달은 것처럼 무겁게 움직이고 만다. 선생님이 아무리 리듬을 타고, 들으라고 해도 내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그 무렵, 나는 은수가 탭댄스를 추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음악을 틀어놓고 고개를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발끝으로 리듬을 밟기 시작하더니, 발뒤꿈치를 탁탁거리며 공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끊어지지 않는 선 위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그녀의 몸은 탄력을 받아있었다. 처음보고 나는 기쁜 마음에 이름을 물어보려고 다가갔다. 그녀는 나를 흘끗 보기만 했을 뿐, 침묵을 했다. 그리고는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고 말했다. 댄스화 줄이 풀렸네. 나는 부끄러웠다. 댄스화 줄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허둥댔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학원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선생님에게 들었다. 정은수. 이름이 예뻤다. 그렇지만 그녀의 눈빛은 따가웠다. 그녀가 춤을 추는 모습처럼 그 눈빛은 너무나 꼿꼿했다. 아마 그 때부터일 것이다. 내가 그녀를 지켜보기 시작한 것이.

 

    나는 그녀와 함께 리듬을 타는 상상을 한다. 꿈도 꿨다. 내 발이 무거운 주머니가 달려서 나는 발바닥 전체로 쿵쿵 거리며 그녀의 주위를 걷자, 그녀는 마치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처럼 내 앞에서 발끝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우리는 돌고, 돌고 돈다. 눈을 마주보며 서로의 발소리를 들어준다. 그녀의 발은 인간의 발이 아닌 빛나는 쇠붙이로 된 발 같다. 그녀는 쇠붙이로 된 발로 쉼 없이 춤을 추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내 발은 원시적인 인간의 발이 맞다. 나의 발은 송곳에 찔리면 피가 흐르는 살점으로 이루어진 발이다. 나는 어서 이 모래주머니가 떨어지기를 바라며 내 발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그녀는 쇳소리를 내며 이미 저만치 춤을 추며 사라져간다. 내 발은 상체기에 피가 나고, 발은 그 피에 적셔져서 바닥에 끈적이며 달라붙는다. 나는 잠에서 확 깨어난다. 그녀와의 춤은 오늘 밤에도 실패이다.

 

    은수야. 야 정은수.

권태가 부른다. 은수는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서 있는다. 권태가 은수 앞으로 뛰어간다. 요즘 통 보이지 않던데, 또 춤 췄냐? 은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은수는 대학원을 그만두었지만 학교에 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대학교에는 연못이 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그곳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헤드폰을 끼고 MP3를 듣는다. 권태는 은수가 대학원을 그만두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듣고 걱정했다. 권태는 은수 같은 여자를 알기에는 너무 FM이다. 그가 이해하는 것은 은수가 도서관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읽는 책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녀는 주로 소설을 읽는다. 지금도 그녀의 손에는 겨울, 아틀란티스라는 책이 들려있다. 권태는 책 제목을 대충 보고는 20대 후반의 여성이 읽는 감성 소설 정도로 짐작한다. 권태는 은수에게 항상 한결같다. 은수가 말을 안 하고 묵묵히 있어도 그는 항상 배려해서 말을 한다. 권태는 은수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갈 수 있을지 잠시 고민을 한다. 그의 지갑 속에 있는 지폐를 떠올려본다. 그녀를 데리고 어느 정도 레벨의 식당에 갈 수 있을지 생각한다. 은수는 권태의 표정을 보고 알아차린다. 나 점심 갖고 왔어. 권태는 화들짝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놀란 표정이다가, 곧 말한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 너 또 고구마 싸왔지? 은수는 별 다른 표정 없이 응이라고 답한다. 둘은 말없이 실랑이를 벌인다. 은수는 발을 톡톡 거리며 좀 심심하다는 표정이다. 권태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은수의 마음을 어떻게 돌릴지 머릿속을 굴린다. 권태는 이내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럼 나랑 잠깐 편의점에 가자. 나도 너랑 공원에서 점심 먹게 간단한 먹거리를 좀 살게. 은수는 그래 라고 말하고 함께 편의점으로 향한다.

 

    공원은 서서히 오르막이고, 아래 지점에 작은 연못이 있고, 윗 지점에 벤치가 있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고, 햇살이 나무 사이로 비친다. 벤치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서 이곳저곳에 커플이 앉아있기도 하고, 솔로가 앉아있기도 하다. 권태와 은수는 나무로 만들어 놓은 계단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나 음악 들을게. 은수가 말한다. 권태는 아쉬운 얼굴이지만 그래 라고 말한다. 은수는 노래를 들으며 고구마 껍질을 깐다. 그녀는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몸무게가 많이 줄었다. 권태는 그녀가 날씬해 진 것이 싫지는 않지만, 예전 모습이 더 편했다. 지금은 은수가 솔직히 더 고고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있는 모습으로 그의 앞에 있다. 둘은 대학원에서 만났다. 영어 영문학과에서 은수는 바이런의 시를 공부하고 있었고, 권태는 경영학과 대학원에서 영어로 된 논문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처음 본 은수는 주로 서서 책을 보았다.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 적었다. 그녀는 책장에 기대어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조용히 걸으며 읽기도 했다. 권태는 움직이는 사람을 인식하다가 그녀의 얼굴을 익혔고, 어느 날 그녀에게 커피를 뽑아주었다. 은수는 권태가 준 커피를 말없이 받아들더니 다 마실 때까지 권태의 얼굴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권태는 그녀의 표정이 좋았다. 그 후부터 그는 은수에게 항상 변함없이 다가갔다. 은수는 권태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권태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권태가 은수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은수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갖기 때문에 권태가 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녀가 홀로 있을 거라고 짐작하면 그는 마음이 놓였다. 시간을 천천히 갖다보면 자신의 마음을 은수가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나 석사 논문 심사가 거의 막바지야. 아마 한창 바빠져서 한동안 얼굴 보기 힘들걸. 은수는 가볍게 권태의 어깨를 치며 파이팅한다. 권태는 은수가 추는 춤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탭 댄스라고 했다. 그는 소리가 나는 춤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 춤이 얼마나 리드미컬하고 감각적인지는 짐작도 못한다. 은수가 그 춤을 출 때 얼마나 빨려 들어서 그녀의 발을 움직이는지 상상조차 못한다. 그는 그냥 그녀가 춤을 잘 추긴 하나보다 하고는 금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은수는 그런가하면 권태 옆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자신의 발을 상상한다. 귀에 얹어있는 헤드폰으로 그녀가 추는 춤곡이 흐른다. 그녀는 옆에 권태를 두고 홀로 나무 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자신을 떠올리고 있다.

 

    나는 또 다시 이 공원을 걷는다. 역시 그녀와 그 놈이 앉아있다. 1주일에 서너 차례 그 둘이 앉아있는 걸 보면,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 옆을 서성이다가 앉을 자리를 찾는다. 둘은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지만, 그 놈이 은수를 쳐다보는 걸 보면 다정한 눈길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내가 그녀 옆에 있다면 그녀와 함께 춤에 대해 이야기 나눌 것이다. 이 녀석은 그런 이야기도 할 줄 모르는지 그녀 옆에서 희번덕거리며 웃기만 한다. 나의 그녀 은수는 오늘도 고구마를 까먹고 있다.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은 건강한 손톱으로 얇은 고구마 껍질을 까고 한 입 베어 물고는 꼭꼭 씹는다. 물을 마신다. 그녀의 발은 그러나 춤을 추고 있다. 리듬을 타는 모습이 내 눈에는 보인다. 그녀는 타고난 춤꾼이다. 그녀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지점에 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배고픔을 참고 있다. 나는 점심을 항상 거르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 나의 의식이라면 의식이다. 그녀에 대한 내 심정은 이토록 순정이다. 그런데 이 자식은 헤헤거리며 그녀 옆에서 뭘 처먹고 있다. 나는 그 자식이 은수를 잘 모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은수 역시 그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안다. 나의 그녀 은수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오직 고구마와 자신의 리듬에 빠져 있을 뿐이다.

 

    나는 수학을 전공으로 한다. 나는 과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수학 그 순수한 공식에만 관심이 있을 뿐 부수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 수학을 문제로 푼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만 푸는 인간들은 수학을 습관화 할 뿐이다. 수학은 이론을 천천히 이해하고, 그것을 그림을 그리듯이 머릿속에 내 방식대로 이해한 후에 문제를 분석해야하는 것이다. 많은 문제를 풀고 좋은 성적을 내는 인간들은 결국 새로운 공식과 접근 방법에는 도대체 아이디어를 내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책을 읽었다는 듯이 자신의 유식함을 자랑하지만, 책 하나를 두고 자신의 목소리로 그 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수학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균형을 잡고 있을 뿐이다. 나는 수학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보다,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접근하기를 택한다. 그리고 공부를 안 하는 나머지 시간에 내 일상이 얼마나 수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찬찬히 생각한다. 일테면 플러스와 마이너스라는 쉬운 수학 접근을 보면 나의 하루는 플러스보다 마이너스가 많은 것이 더 낫다고 여긴다. 플러스가 많으면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생긴다. 욕심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서서히 나의 치부를 들추어낸다. 마이너스가 많으면 다소 의기소침하더라도 세상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많이 보여주지 않게 된다. 그것은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사람들은 나를 내성적인 인간으로 보겠지. 좋다. 나는 그런 시선 속에 있을 때 스스로 더 자유롭다. 많은 인간들 앞에서 내 애기를 꺼낼 필요도 없고, 그 사람들 얘기를 있는 대로 다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적당한 거리감은 오히려 공손한 분위기를 낸다. 그렇지만 예외는 있다. 바로 은수이다. 나는 그녀와 내밀한 관계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녀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다 그녀는 나에게 안드로메다와 같다. 너무 멀지만, 너무 신비로운. 그리고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는.

 

   신발끈이군요.

    ...

    우리 학원에서 만났잖아요. 그 때, 신발끈이 풀려있던 분이죠.

    아. 안녕하세요.

    이상하네. 여기서 자꾸 만나네.

 

    신발끈이군요.

    뭐라구요?

    못 들었으면 됐어요. 저 아시죠? 학원에서 봤잖아요.

    안녕하세요.

    여기에서 자주 만나네요. 제가 여기에 자주 오는데,

    저 따라오신 거예요?

 

    신발끈이군요.

    ...

    나는 그녀를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말이 원래 없으신거예요?

    ...

    저는 이곳에 자주 오는데, 그 때마다 저 벤치에 앉아 있는 걸 봤어요.

 

    신발끈이 또 풀렸네요.

    나는 그녀가 앉아있는 벤치 곁을 슬그머니 곁눈질하며 지나가다가 

    그녀에게 덜미를 잡혔다.

    놀라지 마세요. 항상 제 옆에서 지켜본다는 걸 다 아니까.  

    제 이름은 알 테고, 이름이 뭐예요?

 

    나는 혼자 상상을 한다. 그녀가 언젠가 내게 말을 걸어주기를. 그와 그녀가 점심을 다 먹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둘은 천천히 공원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나는 그 둘을 쫓아간다. 그 때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나는 순간 깜짝 놀란다. 내가 걸어가는 속도를 늦추지 못하고 나는 그들보다 몇 계단 앞으로 간다. ‘정채가 너 대학원 그만 둔 거 아까워하더라. 교수님도 너 대학원 휴학을 하지 왜 자퇴를 했냐며 자주 언급하신대.’ ‘정채는 공부 잘 마칠 수 있을 거야. 나는 공부하기에는 잡념이 많은 것 같아. 바이런 시를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도 바이런처럼 인생에 뛰어들어야겠다고. 언제까지고 상아탑에 머무를 수는 없잖아.’ 나는 둘이 하는 얘기를 더 들으려고 발걸음을 그들의 보폭에 맞추려고 한다. 계단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그들은 영화를 보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내일 저녁 8시이다. 나는 영화제목을 듣는다. 나는 그들을 따라 영화관에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이다. 나는 내일 저녁에 있을 과모임을 못나가겠다고 거짓말로 둘러댄다. 과대표는 너 또 못 오냐며 짜증 섞인 목소리이다. 나는 간단히 말한다. 나 내일 부모님이 시골에서 올라오셔. 과대표는 매번 부모님이 오시냐며 비아냥거린다.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나는 묵묵히 듣는다. 내일 은수를 볼 생각을 하고 참는다. 과대표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내 어깨를 툭 건드리고 지나간다. 나는 숨을 쉬고 참는다. 그게 상책이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은수와 그놈과 함께 보는 날. 나는 늦지 않기 위해서 잘 타지도 않는 택시를 불러 세운다. 영화 상영 시간까지 15분이 남았다. 어두운 상영관 어디에 그들이 앉아 있을지 모르지만, 같은 공간에서 그녀와 영화를 볼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뛴다. 그녀, 은수와 나라면 팝콘과 콜라 같은 것 필요 없이 영화에 푹 빠져서 볼 것이다. 분명 그녀의 시선과 나의 시선은 하나의 스크린 안에서 똑같은 씬에 꽂힐 것이다. 나는 그러리라고 느낀다. 영화를 보며 시시덕거리는 연인들과 우리는 다르다. 눈은 영화를 쫓아가고 있지만, 그 영상이 움직일 때, 우리의 숨소리는 하나가 될 것이다. 이심전심. 택시가 도착했을 때, 이미 영화는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만원이었다. 나는 발이 빠르지 않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몇 번이고 휘청거린다. 겨드랑이에 촉촉이 땀이 난다. 내가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그 놈 옆에 앉아 있을까? 어두컴컴한 상영관 안에서 나는 정은수를 찾는다.

     메기가 알바로 일하는 곳에서 손님들 눈치를 보며 남은 음식을 호일에 싸는 장면일 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다. 정은수이다. 혼자이다.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더니, 내가 앉은 좌석 앞에 앉는다. 그녀에게서 몸내음이 난다. 춤을 추다가 왔는지, 짙은 땀내가 난다. 왜 혼자서 왔을까. 그 놈은 그녀를 혼자 영화관에 보낸단 말인가? 내 손이 미끄러워진다. 그녀의 몸내음을 맡자 몸이 뜨거워진다. 그녀는 왼쪽으로 삐딱하게 고개를 두고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린다. 가늘지만 길다. 나는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 가까이에 코를 갖다 대었다. 그녀의 숨이 머리 꼭대기로 느껴진다. 고요한 숨소리가 들리고, 좋은 몸내음이 나고, 움직임이 없다. 나는 그녀가 자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녀는 이곳에 쉬려고 온 것이다. 춤을 추고, 땀을 식히러, 이곳에 온 것이다. 영화는 막바지이다. 메기는 안락사를 선택했고, 프랭키는 그녀의 뜻대로 도와준다. 프랭키가 홀로 아일랜드 레몬 케잌을 먹는다. 그녀가 손을 들어 얼굴을 훑는다. 아마 그녀는 눈물을 흘리리라.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무겁게 일어선다. 그녀는 주제가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다.

 

    영화관에서 나와서 그녀는 발걸음을 명동 방향으로 꺾는다. 나는 그녀가 무서워하지 않게 조심히 쫓아간다. 그녀의 뒷모습은 춤 출 때 보았던 모습과 다르게 쓸쓸해 보인다. 그 놈과 함께 오지 않아서일까. 그녀는 걷다가 잠깐씩 스텝을 밞는다. 그녀의 발을 훔쳐보며 나는 그 신발 속의 그녀의 은빛 발을 상상한다. 매끄럽고, 번쩍일 것이다. 무척 단단할 것이다. 그녀의 발소리가 울리며 내 귓가를 때린다. 나는 어느새 그녀와 함께 춤을 추는 나를 떠올린다. 나는 혼자 상상하며 걷다가 그녀를 놓쳤다. 시야에서 벗어난 그녀. 나는 멈춰 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그 때, 저 찾으세요? 그녀다. 나는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서 있다. 두 발짝 앞이다.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그녀는 왼쪽 볼에 작은 점이 있다. 나는 그 점을 쳐다보며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말이 없다. 우리는 계속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그녀의 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왼발과 오른발이 직각으로 벌어져 있었다. 왼쪽 발뒤꿈치를 조금씩 톡톡거리는 모습이 그녀가 듣는 음악과 박자가 일치했다. 그녀가 한 발짝 걸어왔다. 숨이 멈췄다.

 

    그녀는 내게 귓속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울고 싶었다.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 그 말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그녀는 나를 알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그 말 속에 함축되어 있었다. 그녀가 귓속말을 하고 두 발을 돌려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 작은 방에는 큰 사진이 하나 있다. 그 사진 속에는 생명체가 크게 클로즈 업 되어있다. 나는 그 생명체를 위해 항상 잠자기 전에 인사를 한다. 오늘 그 생명체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 말을 큰 사진 위에 마커로 적어 놓는다. ‘신발끈이 또 풀렸어요.’

내가 상상했던 대로 그녀는 내게 말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항상 신호를 보냈는데, 그녀가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내가 항상 그녀를 만나러 연못 벤치에 앉아있을 때 혼자 떠올렸던 대화대로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내일 그녀를 만나러 댄스학원으로 갈 것이다. 그녀를 위해 무엇을 준비할까? , , 음반.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밤 나는 그것을 골똘히 생각해야겠다.

    나는 정은수이다. 나는 이름이 정은수인 것이 싫다. 자기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내 주변에는 남자들이 많다. 그리고 내게 관심을 갖는 남자가 몇 명 있다. 오늘 그 중에 한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났다. 아니, 그 사람이 나를 쫓아왔다. 그 사람은 항상 퀭한 모습으로 있다. 나는 그 점이 항상 궁금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데, 왜 그렇게 퀭할까? 오늘 권태가 나를 차고 말았다. 내가 차게 도와줬다. 권태는 나랑은 안 어울린다. 권태는 FM이고, 나는 예술가이다. 권태는 내가 춤을 추고, 소설을 읽는 것을 잘 모른다. 그는 나랑 점심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면 졸리다. 편해서 졸린 것이 아니라 지루해서 졸리다. 권태에게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너랑은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 권태는 내게 별 말이 없었다. 의외였다. 권태가 순순히 내 말을 받아 준 것이. 돌아서자 화가 났다. 권태도 내가 그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만난 걸까? 다시 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기분이 똥 같아서 신나게 춤을 췄다. 춤을 다 추자, 권태가 보자던 영화가 떠올랐다. 그래서 보러갔다. 가서 한참을 졸았다. 막바지에 가서 여자 주인공이 전신마비로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녀에게 안락사 주사를 놓고는 혼자 케잌을 먹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훔쳤다. 그 때 누군가가 내 머리 뒤에서 숨을 쉬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이 그 퀭한 사람이었다. 극장을 나와서 명동으로 걸어가는데, 그 사람이 나를 쫓아왔다. 나는 슬쩍 옷가게로 들어갔다가 나를 찾는 그 사람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 사람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권태랑은 달랐다. 그 사람은 기다렸다. 나는 보았다. 신발끈이 풀려있었다. 생각이 났다. 신발끈이 풀린 그 사람을 댄스 학원에서 보았던 것을. 나는 그 사람이 무안할까봐 귓속말을 해주었다. 그 사람은 내 귓속말을 들었는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 퀭한 사람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꽃을 샀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꽃이 무엇인지 꽃집에 가서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꽃은 선인장이다. 선인장은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쳐다보는 눈길에서 그 가시가 어울린다고 느낀다. 선인장은 수많은 가시와 철갑 같은 잎 때문에 투박해 보이지만, 꽃을 피우는 순간은 매우 아름답다. 그 꽃이 피는 순간 선인장은 숨어있던 매력을 발산한다. 그녀 역시 그럴 것이다. 그녀는 숨어있는 매력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처럼 화장과 옷에 신경 쓰지 않지만, 그녀는 춤을 추며 자신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능력이 있다. 그녀는 보통과는 다르다. 그녀는 알면 알수록 수없이 많은 껍질을 뚫고 나올 여자이다. 마치 선인장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여리고 고운 빛깔의 꽃을 피울 그런 여자이다. 나는 선인장을 두 손에 들고 걸었다. 내 걸음은 무겁다. 나는 모래 주머니를 달은 남자이다. 나는 신발끈이 잘 풀리는 어리숙한 남자이다. 나는 수학을 사랑하지만, 재빠르게 생각할 줄은 모른다. 내 눈은 그러나 다르다.

 

     그가 왔다. 퀭한 차림은 여전하다. 나는 모른 척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의 발이 서서히 빨라졌다. 탭소리를 들으니 내 몸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소리만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빛이 있다. 권태가 생각났다. 권태는 내가 춤을 추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권태라면 어쭙잖은 박수를 치며 좋아할 것이다. 그러면 내 발은 멈추겠지. 이 퀭한 사람은 그런데 멀거니 쳐다보고 있다. 그 쳐다봄이 나를 긴장시킨다. 발 박자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음악과 맞지가 않았다. 아니, 음악을 뛰어넘어서 내 발 리듬이 살아나기 시작했달까. 나는 창문 너머 퀭한 사람을 쳐다보며 추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작은 화분이 들려있었다. 그 화분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발을 빠르게 움직여서 그것이 무엇인지 가까이에서 보려고 했다. 그것은 노오란 꽃이었다. 꽃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마술인가. 나는 잠시 멈췄다. 전자 드럼소리가 나를 계속 춤추라고 들려오는데, 나는 더 이상 춤을 출 수가 없었다. 퀭한 사람과 나는 서로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나를 통해 춤을 추고 있었다.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눈빛 속에 내 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내가 처음 보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녀. 정은수가 내가 왔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다. 그녀가 춤을 멈췄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나는 그녀의 발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들고 있는 선인장을 보았다. 우리의 시선은 서로 엇갈렸지만 정확히 볼 것을 보았다. 나는 그녀를 통해 나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는 선인장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틀어놓은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그녀의 탭댄스 소리가 멎었다. 나는 천천히 눈길을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녀의 눈을 쳐다보기는 처음이다. 우리의 시선이 팽팽한 줄이 되어서 탭댄스를 추는 그녀를 묶어버렸다. 그녀는 그 안에서 나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다. 나를 기다렸다고. 나는 알 수 있다. 우리는 함께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시선이 팽팽한 줄이 되어서 탭댄스를 추는 그녀를 묶어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까부터 핑크 로즈 립밤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주머니에 넣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곳 매장은 감시가 삼엄하지만, 그만큼 연우 마음에 드는 제품이 많다. 프로럴 머스크 향이 매장 여기 저기에서 향을 뿜는다. 요즘 유행하는 향이다. 짙은 아카시아 향만큼은 아니지만, 달콤한 꽃향기가 연우 마음을 이리 저리 휘젓는다. 눈이 마주치면 안 된다. 연우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비비적거릴수록 아르바이트하는 점원 눈에 띠기 쉽다. 한꺼번에 고등학생 여러 명이 매장에 들어온다. 이 때다. 연우는 핑크 로즈 립밤을 슬쩍 손에 쥐고는 다른 코너로 간다. 주머니에 넣지 않은 이유는 혹시나 주머니에서 발각되면 이도 저도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에 쥔 립밤을 소매 속에 감춘다. 이번 코너는 향수 코너이다. 아까부터 플로럴 머스크 향이 났는데, 이번에 제대로 향을 뿌려봐야겠다. 연우는 시향지를 공중에 들어올리고 향수를 한 번, 두 번 뿌린다. 달콤함 속에 시원한 향이 들어있다. 향 노트를 보니 백합이 있다. 백합 때문일까? 백합은 향이 독하기로 이름 난 꽃이다. 노트에는 은방울꽃도 보인다. 연우는 은방울꽃을 떠올리니 사고 싶은 기분에 휩싸인다. 좋아. 이것은 구매하고, 립밤은 접수한다. 계산대로 연한 노랑 빛의 향수를 갖고 간다. 향수액은 살짝 연두빛깔을 머금은 노랑 빛이다. 계산대에 있는 아르바이트생은 연우만한 나이이다. 향수를 건네자 아르바이트생은 몇 가지 이벤트를 알려준다. 연우는 자신이 소지한 카드를 생각해보고는 그 중에 포인트 차감으로 살 수 있는 이벤트를 선택한다. 그렇게 해도 향수 금액은 6만원이 넘는다. 향수는 정사각형 상자 안에 고이 모셔진다. 연우는 묵직한 소매를 의식한다.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다. 인사를 건네며 향수가 든 상자를 아르바이트생이 연우 쪽으로 건넨다. 연우는 깜찍한 눈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하고는 룰루랄라 매장 밖으로 나간다. 차가운 공기를 흡 들이마시고, 핸드폰을 꺼낸다. 건우에게 전화를 건다.

 

- 나 배고파

- 너 배고프면 전화하지, 나 바빠.

- . 나 그 날 이란 말야.

- 그 날이 무슨 이웃집 개 이름이냐. 너는 그 날만 되면 왜 날 갈구냐.

- ... 너 그럼... 연식 선배한테 전화한다.

 

   건우는 연식 선배를 싫어한다. 특히 연우 볼을 꼬집으며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고나서는 건우는 더욱 연식 선배를 라이벌로 느꼈다. 연우는 그런 건우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필요할 때 선배 얘기를 꺼내서 속을 뒤집어 놓는다. 연우는 귀염성 많고, 조잘 조잘 말을 잘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간파한 듯이 말을 할 때면 솔직히 정이 떨어진다. 그러면 연우는 용케 건우 눈치를 알아보고는 팔짱을 끼며 건우에게 살갑게 대한다. 또 그러면 연식 선배는 술을 자작하면서 건우를 째려본다. 건우와 연식 선배는 동아리 선후배인데, 건우가 다크호스이다. 영어 신문을 어찌나 잘 해석하는지, 다들 건우가 영어 신문을 발표할 때는 동아리 멤버가 거의 전원 참석한다. 연식 선배는 건우를 경계하지만 한껏 포용하고 칭찬을 한다. 둘은 허허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고 서로 뚫어져라 쳐다본다. 둘 사이에 연우가 있다. 연우는 연식 선배가 밥 사주고, 술 사주는 것을 좋아한다. 연우는 동아리에 들어와서 영어는 잘 못했지만, 붙임성이 많았다. 연우는 영어로 대화를 해야 할 때도 한국어를 떠들어댔는데, 여자 멤버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남자 멤버들은 조잘대는 연우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연우는 파트너 칭찬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연우는 소매에 든 새 립밤을 뜯는다. 연우는 그 날이 되면 화장품을 하나씩 슬쩍한다. 그 아슬아슬함을 느끼며 물건을 손에 꼭 쥐어보면 아랫배 통증을 잊는다. 이 버릇은 한 신문기사를 보고 직접 실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생겼다. 미국의 헐리우드 여배우가 PMS로 상품을 수시로 도난했는데 결국 CCTV에 여러 번 찍혀서 범법행위자로 잡혔다는 기사였다. 그 때 연우는 고등학생이었고, 평소에 그 날이 되면 생리통이 심했다. 연우는 방과 후에 자신이 잘 가던 문구사에 들렸다. 복부 통증은 허리까지 퍼져서 그녀는 발을 질질 끌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문구류를 찾아냈다. 그것에 집중하자 놀랍게도 통증이 잊혀졌다. 연우는 보라색 펜을 집어서 교복 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방과 후라서 학생들이 많았다. 첫 도난행위를 무사히 마치고, 연우는 꼭 한 번씩은 그 날이 되면 상품을 접수했다. 그녀는 은밀한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꼈을 뿐, 도둑질이라는 생각을 안 했다. 그 이유는 꼭 도난을 하면, 물건을 하나 샀기 때문이다. 연우가 가진 손버릇은 그 후로 대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되었다.

 

- 나 떡볶이 먹고파.

  연우 입술은 매끄러운 핑크빛으로 물들어있다. 하얀 치아가 보이게 웃는다. 건우는 연우가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연우는 역시 끌리는 매력이 있다. 분홍빛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이자, 건우는 움찔한다. 여자애들은 왜 핑크색을 그렇게 좋아할까. 핑크색은 금방 질리는 색이라고 건우는 생각하는데, 연우 입술은 질리지 않을 것 같다. 건우는 연우와 함께 잘 가는 떡볶이 집으로 향한다. 연우는 앉자마자 핑크 로즈 립밤을 꺼내서 입술에 문지른다.

- 금방 떡볶이 먹을 텐데, 뭐 하러 바르냐?

- 떡볶이한테 잘 보여야지. 오늘 산거야. 어때?

- 핑크색이네.

- 핑크색이네. 흥 그게 다야? 나도 그건 알거든.

- 너 그거 안 발라도 보기 좋아. 저번에 갖고 있던 분홍색이랑 뭐가 다른 거니?

- 이건 핑크 로즈고, 코랄 핑크, 로즈 핑크, 퍼플 핑크, 인디언 핑크. 다 달라.

- 배는 안 아파? 너 그 날 이라며?

- . 이제 괜찮아졌어. 건우 너 덕분이야.

 

   연우는 핑크빛깔 입술 사이로 중지 손가락만한 떡볶이를 입 안 가득 넣는다. 눈웃음 보내는 연우를 보는 건우는 마음이 놓인다. 연식 선배에게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연우는 쌀쌀한 늦가을인데, 미니 스커트 차림이다. 여자애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도 추운 날씨를 끄떡도 안하고 걸어 다닌다. 건우는 그 점도 참 신기했다. 그렇지만 연우라면, 연우의 예쁜 다리라면 미니스커트가 좋다고 생각한다. , 연우는 그 날이라고 했는데... 건우는 잠시 상상하다가 고개를 도리질한다.

-? 무슨 생각하는 거야?

건우는 떡볶이가 목구멍에 걸리는 것 같다. 물 컵에 든 물을 쭉 들이킨다. 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건우에게 계속 추궁한다.

-아니야.

-아니긴 뭘. 얼굴에 다 보인다 보여.

건우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연우는 그 모습을 보자 흐뭇하게 웃더니, 떡볶이를 건우 입에 쏘옥 넣어준다.

 

 

   연우는 건우와 떡볶이를 다 먹고, 팔짱을 끼고 걷는다. 시내를 걸으며 연우는 쉬지 않고 조잘 조잘 떠든다. 건우는 연우 얘기에 집중하려고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튀는 공인지 모르겠다. 친구 얘기, 화장품 얘기, 드라마 얘기, 뉴스 얘기 등등. 이 주제, 저 주제 많이도 얘기를 해서 어떤 타이밍에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건우는 그냥 응응 하면서 열심히 듣는다. 말을 쉬지 않고 하면서, 연우는 쇼윈도에 디스플레이 된 옷을 놓치지 않는다. 연우가 걷다가 건우에게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말한다.

- 지하상가로 내려가자.

- . 거기는 화장실이 깨끗하지가 않잖아.

- . 그럼 카페로 갈까?

연우는 건우 팔짱을 더 꼭 낀다.

 

   카페에는 젊은 대학생들이 많다. 연우는 화장실 급하다면서 자리를 먼저 맡고는 천천히 커피를 고른다.

- 나 바닐라 라떼.

- 골랐으니까 어서 다녀와.

건우가 더 걱정한다. 연우는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는 그녀가 고른 플로럴 머스크 향보다 질 나쁜 달콤한 향기가 난다. 연우는 킁킁 향을 맡더니 아까 구매한 향수를 꺼낸다. 연두빛 노랑이 찰랑거린다. 향수를 공중에 분사시키고는 한 발짝 움직인다. 연우 몸에 골고루 뿌려진 향수는 은은하다.

 

   카페 안에는 머룬 파이브 노래가 흐른다. 건우가 고개를 들자 연우가 저쪽에서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걸어온다. 오늘이 정말 그 날 맞나? 건우는 의심이 생긴다. 연우가 자리에 앉자 달콤하지만 코 끝을 찌르는듯한 향이 난다. 건우는 머릿속이 어찔해진다. 연우가 바닐라 라떼를 한 입 마신다.

- 어디서 무슨 향기 나지 않니?

- ? 어디서?

연우는 향기를 맡는 흉내를 낸다.

- 향이 어떤데?

- 글쎄, 좀 독한 것 같아.

- . 너 취향은 대체 어떤 거니? 이 정도면 은은하고 달콤한 건데. 저번에는 장미향을 지리다고했잖아. 너는 대체 향에 대한 감각이 없구나.

- ...

- 내가 뿌린 향수야. 마음에 안 드는 거지?

- 너 그런 거 안 뿌려도 된다고 했지.

- 내 맘!

- 나는 샴푸에서 나는 향 정도가 좋더라.

- . 여자들한테 향수는 쉴이야.

- ?

- 그래 방패라고. 여자들은 거리에서 지나칠 때도 상대방 향기를 다 맡으며 생각하지. . 이 여자는 소녀 취향이구나, 이 여자는 섹시하구나, 이 여자는 보이쉬 하구나. 남자들이 향수를 쓸 때는 알만한 여자애들은 다 경계하려고 해. 좋아할 것 같지? 아니야. 남자들이 향수를 잘 쓴다는 것은 분명 여우 목도리를 갖고 있다는 거거든. 헌데, 마치 솔로처럼 굴지.

- 넌 뭘 그런 걸 다 아니?

- 우리 건우가 그걸 모르는 거지. 영어 박사님.

- 쉴드이면 방패인데, 대체 어떻게 보호막이 된다는 거지?

- 너가 방금 싫어했잖아. 이 향을 싫어하는 사람은 일단 접근이 쉽지 않겠지. 너는 스컹크가 악취를 왜 뿜는지 모르니?

- 향수는 좋으라고 뿌리는 건데, 왜 스컹크랑 비교하는거지?

- . 스컹크도 다 제 짝이 있거든. 연식 선배는 내가 뿌리는 향수 다 좋다고 하던데, 너는 왜 그러니?

- 연식 선배 얘기 좀 그만해라. 넌 나랑 있는데, 왜 그 인간을 거들먹 거리냐.

- 그럼 지금 뿌린 향에 대해 다시 품평해봐.

건우는 머리를 긁적인다. 다시 맡으려니 향이 흐려진 것처럼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얘기하자.

- 아침에 일어나서 맡은 꽃향기 같긴하다.

- ? 무슨 꽃? 얼렁 말해봐.

- . 그게 국화 향기 같으면서 달콤해.

- 국화?

- 좀 짙은 향이 끝에 느껴졌거든.

- 맞아. 이 향기 노트에 백합이 있어.

- 백합은 방 안에 두면 안 되는 꽃이잖아.

- 그렇지. 그래도 하얗고,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잖아. 나랑 어울리니? 이 향이.

- . 근데 섹시하고, 보이쉬하고, 소녀같다는 것을 어떻게 향수 취향 하나로 편견을 갖니?

- 들어봐. 소녀 같은 여자애가 있어. 그런데 이 애는 자신이 소녀로만 보이는 것이 싫어지지. 왜냐고, 여자들은 다 그래. 그래서 그런 여자애들이 은근히 섹시한 샤넬 넘버 5같은 것을 뿌리고 다니지. 게다가 화장도 짙게 하고.

- 그럼 보이쉬한 여자애는?

- 나도 그 타입은 좀 애매하긴한데, 좀 드물거든. 그런데 내 생각에 그런 여자애들은 자기 개성이 강해. 그래서 남자향 같다고 여자애들이 품평을 해도 끄떡없어. 한 마디로 남자같은 기질이 있는 여자애들이지. 간혹 아주 여성스러운 애들도 보이쉬한 향수를 즐겨 써. 그런 애들은 향수가 어마 어마하게 많을 걸. 처음부터 그런 향수를 선택한 진짜 보이쉬한 애들하고는 달라.

- 그럼 섹쉬한 여자애는?

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한다.

- 몰라서 물어?

- 뭐가?

- 바로 앞에 두고 그러냐고.

   

  건우는 순간 움찔한다. 갑자기 연우가 1.5배는 더 예뻐 보인다. 연우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바닐라 라떼를 세 모금쯤 쭉 들이킨다. 연우는 커피를 홀짝 홀짝 마시지 않고, 생수라도 마시듯이 한꺼번에 들이키는 타입이다. 연우는 간혹 말과 행동이 다를 때가 있다. 바로 이럴 때이다. 작은 새처럼 포로롱 날아드는,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자애였다가, 이렇게 거침없이 말을 내뱉고 커피를 원 샷 인양 들이키는 모습을 보인다. 건우는 움찔한 자신을 가다듬는다. 건우는 곧 군대를 가야하는데, 그동안에 연우가 어떻게 될 지 생각하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그동안에 연식 선배랑 지낼 연우를 상상하면 탈영병이 되는 군인들이 이해가 된다. 연우가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정말 연우말대로 무척 섹시해 보인다. 그게 눈에 그린 아이라이너 때문인지, 카키색으로 눈두덩이에 바른 아이쉐도우 때문인지, 로즈 핑크를 바른 도톰한 입술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그 모든 변장 뒤에 숨어있는 진짜 연우 얼굴이 이런 순간에 드러나서 일지 모른다. 말이 없는 연우는 좀 지쳐보인다. 속 쌍꺼풀 눈이 조금 풀려서 가느다래지는 눈매 때문인 것도 같고, 턱을 살짝 앞으로 빼고 생각에 잠긴 표정 때문인 것도 같다.

 

   건우는 말이 없는 연우의 모습을 보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든다. 어쩌면. 어쩌면. 건우는 연우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건우 눈이 긴장이 된다. 연우가 그동안 자신을 만나면서 항상 자신을 나무랄 때, 연우는 지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건우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테이블 아래 건우 손이 주먹을 쥐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연우는 커피를 들이마시고 스마트 폰으로 혼자서 놀고 있다. 건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점점 초조해진다.

 

- 연우야.

- ?

- 우리 사귈래?

빼꼼히 고개를 든 연우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 바보.

- ...

- 바보. 바보. 바보.

- ?

- 모르니까 바보지.

- 그러니까 말해 봐.

- 너는 내가 너랑 사귀는 게 아니면 이러고 시간을 보내러 왔겠니. 그 날인데.

- 그래. 그 날만 되면 너는 꼭 나를 찾았지.

- . 영어 박사님이 드디어 연애에 눈을 뜨시네. 그럼 다시 품평해봐.

- 뭐를?

연우는 엄지를 들고는 자신을 향해 손짓한다.

- . ...

- 그래 나 이연우를 품평해봐. 제대로 안 하면 이제 국물도 없는 줄 알아.

- 잠깐. 너부터 나를 품평해봐.

- 건우 너는 말 그대로 범생이지. 내가 조잘댈 때, 얼마나 실없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모범생. 아마 내가 매우 그럴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믿나본데, 사실은 아니야. 그냥 떠벌 떠벌 시간 보내느라 나도 진땀을 뺀다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계속 들어주고만 있지. 만약 내가 그렇게 떠들어대며 너 팔짱을 끼지 않았다면, 건우 너 자신이 바보인 걸 알았을까?

분명 우리는 계속 눈치만 봤겠지.

- ...

- 계속 해볼까? 나 그날이라 날카로울 수 있어. 내가 연식 선배를 정말 좋아하는 줄 아니? 그 담배 냄새 풀풀 내는 노땅을 말이야.

- ...

- 연식 선배를 싫어하는 너를 알고는 더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너가 경계할 정도로.

-자. 너가 이번에 내 품평을 해봐.

건우는 할 말을 잃었다. 연우가 이렇게 톡 까놓고 이야기를 하자 건우는 할 말을 잃고 머뭇거린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긴장을 풀려고 한다. 피식 웃음이 난다. 연우가 팔짱을 끼고 기다린다. 건우는 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 나는 너를 그동안 잘 몰랐다.

- 남자가 여자를 어떻게 알겠니? 그 반대는 말이 돼도.

- 우리 사귀자. 너에 대한 품평은 나중에 해줄게.

 

  연우는 한숨을 쉰다. 그러더니 의자를 뒤로 밀고는 핸드백을 든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아래층 현관문까지 가는 동안에, 건우는 착각을 했다. 연우가 화장실에 가는 거라고. 연우는 건우를 두고 나가버렸다. 연우 자리에 미색 정사각형 상자가 놓여있다.

 

 

- 어서오세요.

 

  연우는 매장을 둘러본다. 아까 왔던 그 매장이다. 천천히 걷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들으며 상품을 만지작거린다. 연한 보랏빛 향수병이 눈에 띤다. 친구들이 그 향수가 가장 달콤한 향수라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장 달콤한 보랏빛이라. 연우는 그것이 마음에 든다. 어깨에 든 핸드백을 슬그머니 연다. 보랏빛 향수병이 든 상자를 핸드백 속에 넣는다. 콧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던 연우는 자신이 그 날에 두 번째로 물건을 접수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잠시 망설인다. 눈썹 용품이 있는 코너에 다다른 연우는 마스카라를 하나 집는다. 그동안 마스카라를 안 했던 그녀였다. 이제는 마스카라 변장술까지 하나 더 늘어난다. 계산대 이른 그녀는 그러나, 핸드백에 들어있던 향수 상자를 계산대에 꺼내 놓는다. ‘바보같이 실수하면 안 되지.’ 연우는 눈웃음하며 아르바이트생이 계산을 하는 것을 바라본다. 인사를 하고 마스카라와 향수를 핸드백에 넣는다. 매장 문을 열고 나오니, 첫눈이 내리고 있다. 어스름 저녁에 첫눈. 스마트 폰이 울린다. 건우이다. 연우는 무시한다. 바보는 접수 안 해. 연우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걷는다. 거리에서가 이곳저곳에서 흐른다. 추운 겨울에 히트한 가요이다. 연우는 슬픈 노래를 들으며 발걸음을 세차게 한다. 건우가 없는 겨울이 연우는 기다려진다. 아마 그녀는 다음번에는 바다향기가 나는 향수를 고를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향에 대해 감각이 있으니까. 연우는 걷다가 쇼윈도 앞에서 멈추고 턱을 빼고는 잠시 쳐다본다. 끝이 없는 매장들을 하나씩 쳐다보며 걸을 연우의 뒷모습이 점점 거세지는 눈발에 묻혀 점점 멀어진다.

연우 자리에 미색 정사각형 상자가 놓여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형석은 속이 메슥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제 마신 폭탄주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목구멍 속 침이 말라왔다. 이럴 때는 해장 커피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걸 벌컥벌컥 마셔야겠다. 스타벅스로 갔다. 안녕하세요. 스타벅스입니다. 웅성 웅성거리는 손님들이 많았다. 형석은 속이 더욱 울렁거렸다. 형석의 차례이다. 아메리카노를 해장 커피로 만들어주세요. ? 바리스타가 다시 묻는다. 해장 커피 말이에요. ! 손님 커스텀 메뉴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사이렌 오더로 주문해주시겠어요? ? 뭐요? 사이렌? 바쁜 바리스타는 재빨리 설명을 하더니, 다음 손님 주문을 받는다. 형석은 어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일단 자리에 앉았다. 핑드 고객님 주문하신 초코초코 브루드 헤이즐넛 나왔습니다. 바리스타가 주문한 메뉴를 목청껏 외친다. 형석은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벽에 스타벅스의 로고가 눈에 띤다. 초록색 여자의 모습이다. 세이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형석의 배 안에서 그 세이렌이 노래를 부르는지 머리가 쿡쿡 쑤신다. 동그라미 안의 세이렌이 세모처럼 형석의 머리를 쿡쿡 찌르는 것이다. 형석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해장 커피가 아니라 비닐이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자 금방이라도 구토가 올라올 것 같다. 형석은 벌떡 일어난다. 화장실로 간다. 나무 빛깔로 인테리어 되어있는 화장실은 깨끗했다. 달콤한 방향제 향기가 난다. 문을 벌컥 열고는 형석은 좌변기를 움켜잡는다. 우욱. 누렇고 멀건 액체가 나온다. 다시 우욱. 형석은 이곳이 카페인지, 아직도 술집에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좌변기 물을 내리고 까끌까끌한 입 안을 물로 헹군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이런 고급 카페와는 거리가 멀다. 큼큼한 냄새가 입 안에서 나는 것 같다.

 

 

 

    형석은 화장실에서 나와서 일단 미지근한 물을 주문한다. 카페는 넓고, 손님들이 많아서 바리스타는 그가 주문을 했는지 안 했는지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형석은 천천히 물을 다 마신다. 물을 다 마시고 조금 기다리자 쑤셨던 관자놀이가 느슨하게 풀리는 듯하더니, 졸리기 시작한다. 그의 눈에 비친 초록색 세이렌이 이번에는 자장가를 불러주는 듯하다. 눈을 감은 형석은 고개를 수그리고 잠을 잔다. 바리스타의 외침 소리와 웅성거리는 손님들의 목소리, 커피 머신 소리가 섞여서 묘하게 인공적인 파도 소리를 내는 것 같다. 그의 귓바퀴 속으로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는 점점 잠 속으로 빠져든다. 구석에 있는, 다리가 기다란 의자에 앉은 그는 고개를 수그리고 석고상처럼 움직임이 없다. 조용한 숨소리가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부이다. 스타벅스의 모든 인간들이, 분주히 커피를 만들고,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눌 때, 그만 홀로 잠에 빠져있다. 그만이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들은 것 같다. 한차례 손님들이 뒤바뀌고 한 시간이 족히 흘렀을 때 쯤, 형석은 갑자기 잠에서 깬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분간을 못한다. A-56번 고객님 주문하신 자바칩 푸라푸치노 나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형석은 이곳이 스타벅스 임을 안다. 의자에서 슬며시 내려온 그는 다시 한 번 벽에 있는 스타벅스 로고를 쳐다본다. 세이렌은 입을 꾹 다물고,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다. 언제 또 노래를 불러줄지 모른다. 형석은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가 부드럽게 만지고 나서 주문대로 간다. 그는 아메리카노 아이스를 시킨다. 테이크 아웃이다. 메슥거렸던 속이 풀렸다. 사정없이 관자놀이를 쿡쿡 쑤셨던 세모도 사라졌다. 비닐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해장 카페 맞네! 하고는 피식 웃는다. 벽에 있는 세이렌이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보낸다. 형석도 곁눈질로 세이렌을 쳐다보며 미소를 띄운다. 그의 손에 얼음이 동동 떠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져 있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분주한 발걸음으로 스타벅스를 나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을이 되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국화 화분에는 어김없이 자주빛 국화가 피었어요. 꽃향기가 그윽하게 피어오르고, 방 안에는 그 향기가 가득합니다. 국화를 방 안에 두어서 자주 창문을 열어줍니다. 꽃향기가 어찌 보면 독하기도 하거든요. 창문 밖으로 가을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서 방 안이 다소 춥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기분이 맑아집니다. 오늘 신청곡은 김동률의 귀향입니다. 언제나 저는 그가 제게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네. 신지연씨가 목요일 그대에게 띄우는 신청곡 코너에 오늘도 사연을 보내셨네요. 감사합니다. 라디오에서는 여자 디제이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린다. 디제이는 말을 마치고 음악 큐사인에 맞추어서 귀에 꽂고 있던 헤드폰을 내린다. ‘이번에도 신지연씨 사연이네요. 이 여자 분 이제 10개월째 아니에요. 지난 12월부터 사연을 보내왔죠?’ ‘선곡이 좋잖아. 누구를 기다리는지 모르겠지만 애틋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항상 밝히지를 않아서 정말 궁금해요. 지난 번에 소개된 사연에는 그 사람이 신던 구두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죠? 그의 갈색 스웨이드 구두는 항상 적당히 구겨져 있었어요. 그는 구두를 신으면 발뒤꿈치가 아파서 오래 못 걸었어요. 꼭 여자 같았죠.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이 여자분 사연은 꼭 소설을 읽는 기분이에요.’ ‘귀향노래가 끝난다.

 

   아침 10시이다. 그녀는 라디오에서 들리는 귀향을 듣고 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의 방 안에는 책상 하나, 서랍장 하나, 행거 하나, 작은 선반 위에 국화 화분이 전부이다. 방 안이 선방처럼 깨끗하고 물건이 없다. 책상 위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소리가 흐른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쉐도우라는 이름을 가진 고전적인 라디오 모습을 갖고 있다. 높이가 있는 부채꼴 모양 프레임이 나무로 되어 있고, 가운데에 중세풍 꽃무늬로 만들어진 스피커가 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맞추어서 몸을 움직인다. 비비적거리는 듯, 꿈틀거리는 듯, 몸을 이리 저리 흔든다. 그녀는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춘다. 핸드폰 벨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깜짝 놀란다. 핸드폰을 든 손이 떨린다. 흐느껴 우는 듯 그녀는 이상한 신음소리를 낸다. 여보세요. 다소 하이톤의 목소리이다. 지연아 엄마다 왜 전화가 없었니? 그녀는 양미간을 좁히며 목소리를 낮춘다. 요새 스터디가 있었어. ? 왜라니, 엄마가 전화하는데 무슨 말버릇이 그래. ... 얘 지연아 너 소개팅 시켜줄까? ... 삐리릭 하고 핸드폰을 끈다.

 

 

 

   오늘은 그와 함께 걷던 공원에 가보았습니다. 오리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던 작년 봄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는 그 때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지요. 우리 이렇게 변치 말자.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제 곁을 떠났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친구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그를 기다립니다. 그는 내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 꼭 예전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저는 그의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그는 꼭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정말로 그의 눈가는 젖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제 어깨를 끌어안았습니다. 이제는 더는 보지 못하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며 저는 오늘 또 신청곡을 띄웁니다. Empty Rooms. 오늘이 마지막 신청곡이 될 것 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자정을 넘긴 목요일에...

 

 

  어김없이 목요일 아침 10시이다. 선방 같은 그녀의 방이 국화 꽃밭이 돼있다. 국화 화분이 가득 차 있고, 그 꽃들 사이에 그녀가 반듯하게 누워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고요한 얼굴빛에는 어딘가에 모를 그 이상한 미소가 띄워져 있다. 두 손을 깍지 껴서 아랫배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았다. 국화 향기는 온 방안에 가득해서 숨이 턱 막힌다. 자줏빛, 노란빛, 하얀빛. 국화꽃이 며칠을 갈까? 그녀는 그 국화꽃이 다 시들어 썩은 내가 날 때 까지 잠에서 깨지 않을 태세이다. 그녀는 먼 꿈나라로 갔다. 어딘지 모를 처연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있다.

 

   그녀의 선곡 Empty Rooms가 흐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