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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꼬똥꼬똥꼬똥꼬

준은 리드미컬하게 똑같은 말을 한다. 보는 사람마다 일단 이 말부터 하고 본다.
준은 이 곳 아동복지센터에서 끝장을 봐야 버릇을 잠시 숨기는 아이이다. 새로 온 선생님에게 찰싹 붙어서 이상한 몸동작-성적인-을 보이거나, 틈만 나면 혼자서 스마트폰으로 야동을 본다. 준은 머릿속에 똥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어른이 질색할 정도로 성에 사로잡혀 있다. 오늘도 새로 봉사 활동을 온 어린 여대생을 보고는 안녕하세요 대신 ‘똥꼬’라고 했다. 어린 여대생은 그 말보다 그 말은 내뱉는 준의 표정에 질려버렸다. 이제 겨우 3학년인데, 이마에 잔뜩 힘을 주고 미간에 주름이 잡힌채로 이 말을 랩이라도 하듯이 내뱉었다. 여대생은 잠시 얼어있다가 슬슬 준을 피하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도 준을 슬슬 피한다. 준은 자꾸 찰싹 달라붙어서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벌레처럼 꿈틀댔다. 준을 3년 동안 관찰해 온 센터장 선생님만이 준을 다스렸다. 사실 다스렸다기보다는 센터장이 준을 혼자 세워놓고 벌을 주었고, 그러면 준은 마치 금단 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몸을 벌벌 떨면서 벽을 보고 서 있었다.

어떤 날은 그 자리에서 벌벌 떨다가 오줌을 쌌다.준은 점점 구석에서 야동을 보게 되었고, 그러고나면 더욱 더 ‘똥꼬’를 노래부르며 오는 사람들마다 아는 체를 했다. 야동을 보고, ‘똥꼬’라고는 해도 자위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다른 지역 센터장이 말하기도 했다. 요즘 극단까지 간 아이들은 벌써부터 자위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숨지도 않고 말이다. 준은 남에 몸에 붙어있는 것을 즐겼지만, 자신의 몸에 먼저 손을 대는 것에는 불같이 화를 냈다. 오히려 매질을 당하는 것을 참았지, 스킨쉽은 참을 수 없어 했다.

어느 날, 새로 온 여대생 봉사자가 아프다고 연락이 왔다. 센터장은 난감해하며 대신할 사람을 보내달라고 전화로 말하려 할 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얼굴은 이쁜데, 화장은 안 했고, 옷은 군복이라도 빌려 입은 것처럼 밀리터리 룩이었다.

‘안녕하세요. 진희 대신 온 지영이라고 합니다.’
센터장은 인사를 받고, 잠시 설명을 하고는 오늘은 자신이 바쁘다고 말하며 특별히 한 아이를 좀 봐달라고 말했다.
‘준-’
벽을 보고 서 있던 작은 아이가 뒤를 돌아서자 역시나 그 입에서 ‘똥꼬’가 튀어나왔다.
센터장은 너무나 바빠서 밀리터리 룩에게 맡기고는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밀리터리 룩은 말했다.
‘그래 나 똥꼬 있어, 넌 없냐?’
‘똥꼬똥꼬똥꼬똥꼬.....’
지영은 삐딱하게 고개를 움직이며 준과 눈싸움을 시작했다.
폭발할 것 같은 준의 이마와 미간의 주름, 지영의 째진 눈.
준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씨발’이라고 하자, 지영은 입술을 비틀며 ‘계속해봐’라고 했다.
준이 다시 똥꼬 똥꼬 똥꼬 그러고는 지영이의 허벅지에 찰싹 붙더니 몸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준이 붙은 힘은 완강해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준을 떼어내기 역부족인데, 지영이 오히려 준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히 꼭 붙들고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준도 지영도 어른들 눈에는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빙글빙글 돌았을까. 둘은 바닥에 넘어졌고 그래도 준은 여전히 허벅지를 놓지 않았고, 지영은 꼭 붙들었던 손으로 준의 몸을 간질간질 하기 시작했다. 준이 갑자기 확 지영을 밀치고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영은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준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센터장이 한시간은 족히 넘게 공부방에 있다가 로비로 나왔다.
놀랍게도 양반다리를 한 지영 한 쪽 다리에 준이 앉아서 동화책을 보고 있었다.
센터장은 처음에 준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영에게 한마디를 하려고 다가갔는데, 그 아이는 준이었다. 센터장은 더 놀라워했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지영이 아니고 준이었다. 준이 유일하게 읽는 동화책이 하나 있는데, 늑대가 도망다니는 동화책이다. 그 동화책을 준은 지영에게 3번째나 읽어주고 있었다. 지영은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꼭 붙어 있었다. 센터장이 가까이 가도 둘 다 미동도 없이 책에 빠져 있었다. 센터장은 준의 목소리를, 그런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둘은 그렇게 첫 날을 보냈다.

센터장은 아프다는 여대생에게 말했다. 밀리터리 룩을 고용하고 싶다고. 여대생은 지영에게 알렸고, 지영은 고용하면 얼마나 일을 해야하느냐고 물었고, 지영은 일을 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으며, 센터장은 지영의 핸드폰 번호로 직접 통화를 했다.

‘지영씨, 어제 준이 동화책 읽어주는 모습을 처음 보았어요.’
‘...’
‘지영씨가 절 좀 도와줄래요? 준이 저한테 지영씨 이름을 다 물어보네요.’
‘전 일을 할 생각은 없지만 놀러가고는 싶네요.’
‘그럼 봉사할 시간만이라도 와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튿날이 되었다. 준은 아무것도 안 하고 현관 입구에서 지영을 기다렸다. 지영이 와서 준을 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둘은 손가락으로 살짝 스킨쉽을 했는데, 마치 ET와 엘리엇 같았다. 지영이 앞서 걷고, 준이 졸졸 따라왔다. 둘은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준은 더듬 더듬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 동화책은 유령이 나타나는 것을 무서워하는 곰돌이 인형이 주인공이었다. 잘 모르는 단어는 지영이 나직히 읽었고, 나머지는 느리고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준이 읽고 있었다. 센터장은 그 모습이 여전히 놀라웠고,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준이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신기했다. 2시간은 족히 읽었을 것이다. 지영은 준에게 헤어지기 전에 헤드폰으로 노래를 들려주었다. 지영이 좋아하는 노래였고, 준은 처음 듣는 노래였다. 둘은 노래가 끝나자 인사했다. 이렇게. ‘안녕 똥꼬’

셋째 날이 되었다. 주말 전날이었다. 센터장은 조용해진 센터가 너무나 놀라워서 주말 전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주말 전에 그 안도감이 아니라, 오히려 센터가 아늑해진 것만 같았다. 밀리터리 룩이 나타난 이후로 준이 해 왔던 훼방이 눈 녹듯이 없어진 것이다. 센터장은 여전히 공부에는 집중은 안 하지만 조용히 센터 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을 바라보고는 대체 무슨 조화일까 싶었다. 밀리터리 룩은 봉사자 여대생보다 별로 일을 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직감이 틀렸다. 밀리터리 룩이 나타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준은 동화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동화책이었다. ‘놀랠 노자군’

그 날 지영 양반다리 위에 앉은 준은 지영이 갖고 있는 스마트 폰으로 동영상을 보려고 했다. 지영은 그대로 두었다. 그러자 준의 손가락은 귀신같이 야동을 찾아냈고, 그것을 틀었다. 지영은 준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준은 뚫어지게 야동을 쳐다보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금방이라도 또 몸에 찰싹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지영이 준을 가만히 두고 야동이 끝날 때가지 있었다. 플레이가 스탑이 되었을 때, 준은 지영을 쳐다보고 ‘똥꼬’라고 했다. 지영은 ‘너 똥꼬가 어떻다고’ ‘똥꼬’ 준이 다시 이 말을 할 때 눈이 빨개지면서 울기 시작했다. 지영은 우는 아이는 그대로 두는 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영은 휴지를 가져다 주고 준이 스스로 눈물을 닦을 때까지 기다렸다.

센터 입구로 나가는 지영의 손을 준은 슬며시 잡으며 ‘내 똥꼬 아팠어’라고 말했다. 지영은 가만히 준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마주침과 함께 지영은 준의 손가락을 살짝 꼬집으며 ‘이렇게?’라고 말했다. 준은 도리깨질을 크게 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준은 지영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물었다. 지영은 소리지르지 않았고, 준은 물은 손가락을 내려놓았다. 지영은 준에게 별 말 안했다. 다시 말했다. 인사로. ‘안녕 똥꼬’

지영이 가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준은 손을 흔들었다. 지영이 한 번 돌아봤고, 지영이 준을 보고 ‘월요일에 보자 준!’하고 크게 소리쳤다. 준은 갑자기 낄낄거리며 웃었다. 센터에 있던 아이들이 준이 웃는 모습을 보고 센터장을 불렀다. 모두들 준이 몸을 들썩이며 웃는 모습을 보고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았다. 준. ‘똥꼬 대장’ ‘야동 중독자’ ‘벌레같은 준’ ‘고집쟁이 준’ 이제 준은 달라질까... 준이 돌아서자 다들 혼비백산 도망쳤다. 준은 여전히 낄낄대었다. 그리고는 화장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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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와 H



                      H의 슬프고 어려운 산책 

    H는 결국 뛰쳐나왔다. 골목을 지나 그는 숨을 고르고 운동화를 제대로 신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길을 걸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데 애써 변명했다. "산책이야, 그냥 산책. 평화로운 일상의 여유를 즐기는, 그런 무덤덤한 산책 같은 거." 
 H의 산책은 슬펐고, 어려웠다. H는 평온한 마음을 위해 아름다움이 필요했다. 눈앞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기 위해 노력했다. 쓰레기통 옆 민들레, 새 모양의 구름, 초록색 신호등, 찰랑거리는 머릿결, 버려진 캔 음료에 반사된 햇빛. 낙서로 더러워진 공책을 지우개로 지우듯. 그의 낙서는 J다.

    J가 빨간색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부터였다. H의 아버지는 어느 날 복통으로 간 병원에서 위암 말기를 진단받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둔 가족이 으레 겪는 어떤 분노와 허무, 회환과 희망이 닿기도 전에 날아간 것이다. H의 가족, 그래봤자 H와 J는 비약적인 스토리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관을 안치하고 나서야 그 영화는 자신들의 삶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H와 J는 그렇게 조금씩, 조용히, 조각났다.   그들의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물건은 촌스러운 빨간 립스틱이었다. 간호사를 통해 전해 받은 싸구려 립스틱이 그가 J에게 남긴 유언이었던 것이다. 

    H는 세상을 알고 싶지 않은데 다 알아버린 것만 같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데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데리고 온 J, 아버지 죽음, J가 매일 새로운 남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외면하는 것이라는 것 뿐. 모두가 어쩔 수 없었고,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슬퍼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그는 아직은 슬프고, 어려웠다. 아직은 그러고 싶었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걷고 있던 H는 갑자기 화가 났다. 그는 당장 무엇이라도 이기고 싶었다. H는 태양을 노려보았고, 새삼스럽게도 가을의 태양은 강했다. 그는 있는 힘껏 눈을 세게 감았다. 암흑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태양은 빨갛고, 강하고, 끈질겼다. H는 눈을 감은채로 걸었다. 무섭지 않았다. 보이는 것들이, 실재가 두려웠다. 자동차 엔진 소리,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새 소리, 아이 울음소리. 그 소음들의 접점에는 차가운 공백이 존재했다. H는 그 속에 들어갔다. 정확히는 흡입 되었다. 푹신한 빨간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H는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는 그 소용돌이에서 몸을 잃었다. 얼굴만 남은 H는 눈을 떴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J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몸을 뒤섞고 있었다. J는 찡그리지도 않은 채 신음소리를 냈고, 남자는 넥타이를 풀지도 않은 채 그녀의 몸을 애무하고 있었다. H는 있었지만 없었다. H는 분노하지도,궁금하지도,지루하지도,달관하지도 않았다. H는 벽장처럼 모든 것을 목격한 채 묵묵히 놓여 있었다. J와 남자는 절정인 듯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는 부르르 떨었다. J가 남자를 향해 비밀을 말하듯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이곳은 지옥일까? 천국일까? 넌 알아?" 그녀는 말을 마치고 H를 바라보았다. 없지만 있는 것처럼. 

    남자는 예약 알람이 설정 되어있는 것 마냥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바지로 가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J에게 주며 말했다. “열어봐. 선물이야.” J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리고 기대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열었다. J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그리고 잠깐 비웃었다가, 이내 무덤덤해졌다. H는 그 표정을 본적이 있다. 아, 언제였지.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는데, 당장 알아내지 않으면 큰 위험이 닥쳐올 것 마냥 그는 기억들을 게걸스럽게 헤집었다. 

    written by Black-bird

                                       집 

    어머니는 집을 떠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 적막해진 집을 처분하고 한적한 소도시로 이사를 했다. J는 집에 없었다. 선물은 그대로 나의 주머니 안에 깊숙이 들어있다. 작은 상자 속에 있는 것은 큐브이다. 아주 작은 큐브는 세밀하게 만들어져서 손톱을 이용해서 만지작거리면 부드럽게 조각이 맞춰진다. J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으로 이것을 맞춰나갈 것이다. J와 H는 가족이지만 피는 안 섞였기에 몸을 섞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녀는 나와 오직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한다. 그녀는 밤이 되면 내 집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나는 한 번도 그녀를 돌려세운 적이 없다. 그녀는 밤이 되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멍한 표정으로 일어나더니 나에게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간다. 

    분홍색 책상 앞에 가서 앉는다. J를 위해 내가 마련한 책상이다. 그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매니큐어 손톱 손질 도구와 수많은 색깔의 매니큐어이다. 갈치의 짙은 은빛을 연상 시키는 매니큐어, 신부님의 긴 보라색 복식을 연상시키는 매니큐어, 달걀노른자를 깨뜨린 듯 한 매니큐어, 검은 타르를 연상시키는 매니큐어, 가장 이상한 매니큐어는 우윳빛 매니큐어이다. 나는 J가 이 우윳빛 매니큐어를 바를 때 심하게 욕망이 들끓는 것을 알겠다. 그것은 순수한 백치미를 떠올린다. 하얀 방을 떠올리기도 한다. 심하게 구역질이 나는 듯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나에게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하얀색 방안에 있었다. 오직 수술 도구만이 은빛이었고, 그 밑에 깔린 어두운 녹색 천이 전부였다. 나는 아랫도리가 벗겨져있다. 내 나이는 이제 막 중학생이 되어있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이곳에 왔다. 엄마는 포경선이 떴다며 나를 이곳에 데려왔다. 나는 포경선이 왜 떴는지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눈을 나에게 고정시키고 애매한 미소를 짓더니, 너의 고래를 잡으러 왔다고 했다. 무슨 암호 같기는 했는데, 고래라고 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뱃멀미가 날 것 같았다. 시술은 금방 끝났다. 짧은 마취와 아랫도리의 미묘한 느낌이 전부였다. 그러나 마취가 풀리고 나서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나는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J에게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인지 나는 물어본 적이 없다. 나는 그녀를 그냥 둔다. 그녀는 대신 매번 다른 색상의 매니큐어를 바르고 그 손으로 내 앞에서 밥을 먹고, 내 앞에서 대화를 하며 손을 까닥거릴 것이다. 그녀는 내게 하나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색깔로. 그녀는 색깔을 계속해서 변화시킴으로써 나를 조정한다. 나는 밥을 먹으며 그녀의 손톱을 바라보며 입맛을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좋다. 그녀의 손톱은 내게 자극제이다. 나는 우윳빛 색깔의 매니큐어를 바르고 하얀 옷을 입은 그녀가 내 앞에서 대화를 하기를 바란다. 그 날이면 아마 나는 밤마다 문을 나서는 그녀를 돌려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볼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상상하며 내 주머니 안의 큐브를 만지작거린다.

    written by kitty99

                                     오로라

    J는 아까부터 거울 앞에 서서 옷을 갈아입는다. 옷을 벗자 하얀 색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은 그녀가 서 있다. 방 앞에 걸린 발 너머로 그녀의 몸이 드러난다. 하얀 색 브래지어 앞에 손을 얹자 그녀의 보라색 매니큐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밤마다 나가기 전에 속옷을 점검한다. 그리고 새로운 색상의 매니큐어를 바른다. 하얀색과 보라색이라. 나는 갑자기 북반구의 오로라가 떠오른다. 하얀 설원 위에 부드러운 보라색 스카프가 드리워진 것 같은. 바람에 하늘거리는 그 스카프가 그녀의 손톱 위에 있다. 나는 말한다. ‘보라색이네’ J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퍼플 이라고 해야지’ 라며 나무란다. 그녀는 하얀 색 속옷에 어울리는 스타킹을 찾아본다. 회색 스타킹인데 잔잔한 펄감이 있다. 그녀는 서서 그것 안에 발을 집어넣더니 천천히 종아리를 거쳐, 튀어나온 무릎을 지나, 살찐 허벅지에 다다른다. 왼쪽 다리로 서서, J가 돌아본다. ‘계속 거기에 서 있을 거야?’ 나는 무심히 지나친다. 커피 잔의 커피가 살짝 흐른다. 

    아홉시에서 열시 사이에 J는 항상 치장을 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다. 그녀가 나갈 때, 훅 차가운 바람을 타고 그녀가 뿌린 만다린 향이 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향수는 그녀가 항상 뿌리는 향이다. 그녀는 도발적으로 보이는 치장을 굽 낮은 구두 속에 숨겨버린다. 그래서 그녀의 외모에는 악센트가 있다. 손톱과 다리, 그리고 그녀의 무거운 입술에 칠한 빨간색 립스틱. 그녀의 빨강은 죽은 빨강이다. 그녀의 입술은 보라색 손톱과 비슷한 톤으로 어둡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 죽은 빨강 입술은 활시위처럼 강약을 갖고 파르르 떨린다. 밖으로 나가며 내게 오더니 핑그르르 한 바퀴 돈다. 다리에 감겨 진 회색빛 펄이 불빛 나는 팽이처럼 눈을 부시게 한다. 오늘따라 그녀는 오로라처럼 더욱 빛난다. 나는 한 쪽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던 큐브를 손에 쥔다. ‘나 간다.’ J는 한참동안 치장을 마치고 언제나 내 앞에서 눈도장을 찍는다. 나는 큐브만 손에 꼭 쥐고 있다.

    J의 구두는 항상 낮다. 그녀는 자신의 발이 높은 힐 안에서 고통 받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블랙 단화를 신고 소리 없이 문 밖을 나선다. 사뿐히 밟고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혼자 상상한다. 그녀의 날렵한 종아리는 항상 계단을 걷기 때문에 잡혀진 곡선이다. 발끝으로 가볍게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그녀의 다리는 낮은 굽의 단화 덕분에 발레리나처럼 육감적이다. 그녀의 단화를 거쳐, 보드라운 스타킹을 지나 그 안에 있는 것은 내가 상상해 보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녀가 내게 건네주지 않는 단 한 가지 비밀이 그것이 아닐까. 나는 그 비밀을 조심스레 더듬어보고 싶지만, 손 안의 큐브에 의식을 둔다.

    자정이 지났다. 내 방 책상 위에 커피가 식어있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다. 이런 나 자신을 J는 즐기는 것 같다. 내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잠을 청하면, 그녀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잠결에 그녀의 낌새를 알아채지만, 나는 아침 식사를 할 때까지 그대로 누워있다. 내가 잠을 자는 시간은 그러니까 새벽 4시에서 아침 9시 정도까지이다. 종종 그녀가 나를 단련시키는 것 같다. 나의 욕망을 말이다. 나의 욕망은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유령처럼 배회한다. 나는 오직 내 숨소리에 의지해 그 시간을 버틴다. 이런 나 자신을 타일러본다. 잠을 청하자. 잠을 청하자. J는 내가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동안 조용히 집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하며 나는 스르르 잠이 든다. 또 밤이 지나간다.

    written by kitty99



                                 우윳빛

    J는 우윳빛 매니큐어를 들고서는 주방으로 간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뒤쫓는다. 그녀는 매니큐어 뚜껑을 열더니, 하얀 액체를 개수대에 따라버린다. 그녀는 울고 있다. 나는 그녀가 왜 우는지 모른다. 나는 왜 내가 그녀와 동거를 하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버려진 하얀 액체를 손으로 문지른다. 그녀의 손바닥이 끈적이는 우윳빛 매니큐어로 덮였다. 그녀는 울면서 계속 문지른다. 나는 다가간다.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그녀가 눈물짓던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녀가 울고 있다. 나는 어쩔 줄 모른다. 아니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아준다. 그녀가 끈적이는 손으로 내 허리를 쥐어 잡는다. 그녀의 눈물로 내 가슴이 적셔진다. 

    J는 더 이상 밤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그 날, 우윳빛 매니큐어 속에서 함께 멘붕이 되었다. J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고, 나는 웃으며 계속 그녀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웃었지만, 그녀는 울었다. 그런 희비의 교차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안았다. 세상은 참 이상하다. 그녀를 항상 예의 바르게 대했던 나였는데, 나는 우윳빛 매니큐어를 버리는 J를 보고 처음으로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나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내 허리를 꼭 끌어안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우윳빛 속에서 섞였다. 

   J는 더 이상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는다. 그녀는 말간 손톱으로 내가 준 작은 큐브를 풀었다가 맞췄다가 한다. 그리고 나를 보고 씽긋 웃어준다. 나는 한 쪽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그녀가 웃는 모습을 넌지시 쳐다본다. 그녀의 분홍색 책상 위에는 매니큐어 대신에 뜨개질이 가득하다. 그녀는 따뜻한 솜털실로 목도리, 조끼, 가디건, 장갑, 모자를 뜬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색상의 털실들로 책상 위를 뒤덮는다. 끈적였던 매니큐어 대신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실은 그녀의 건강한 손톱 아래에서 하나씩 완성된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 

    J와 함께 산책을 한다. 그녀가 뜬 옷을 입고 산책을 나섰다. 우리는 두 손을 맞잡고 걷는다. 내 눈으로 비치는 태양은 여전히 따갑지만,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부드러운 선을 이으며 나를 행복하게 한다. 우리는 함께 자랐고, 동거를 했고, 섞였고, 이제는 행복이다. 나와 J의 산책은 매일 매일 새롭다. 내 손에는 촌스러운 빨간 립스틱이 쥐어져있다. 우리는 그것을 꺼내서 땅에 하트를 그린다. J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까르르 웃는다. 아버지가 준 마지막 유품이 J와 나를 두근두근하게 했다. 아버지의 유품을 우리는 땅에 다 바르고 나서, J와 나는 그 하트 속에 들어가 꼭 안아본다. 둘 다 따스한 솜털 옷을 입고, 마주보며 웃어준다. 그들이 H와 J이다.

    witten by kitty99 


  이 단편은 2015년 핵노답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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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색 머릿결이 출렁인다. 천천히 발 끝으로 계단을 오르는 그녀. 9센티미터 굽의 분홍색 구두를 신은 그녀. 피곤하다. 그녀의 남자 친구가 그녀가 산 가방을 두고 된장녀라도 되냐고 버럭 화를 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잘근 씹으며, 그의 말을 핸드폰 너머에서 들어줘야 했다. 분명 남자 친구는 언젠가 너에게 근사한 핸드백을 선물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설마 그 기억을 잊은 건가? 남자 친구의 화풀이를 다 듣고 나서 그녀는 딱 한 마디 했다. ‘헤어져!’

 

그녀는 Red이다. 그녀는 불길에 뜨겁게 달군 흙덩이처럼 열정적이다. 그녀의 긴 생머리, 그 까만 생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를 하고 9센티미터 굽의 힐을 신으면 남자들은 그녀를 쳐다보기 바쁘다. 그녀는 그 빨갛고 도톰한 입술에서 말을 꺼내기 힘들어한다. 그녀가 하는 표현은 그녀의 메이크업과 그녀의 패션 스타일이다. 그녀는 아쉽지만... 콧소리를 내는 애교가 없다. 그녀는 오히려 논리적이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화를 내면, 따박따박 말을 붙히기 보다 다 듣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그러면 남자친구는 넌 왜 말대꾸를 하냐며 또 성을 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전포고는 미안하다이거나 헤어져이다. 이 두 개의 마지막 카드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선택에 달렸다.

 

오늘 그녀는 남자친구가 된장녀라고 한 말에 심히 자존심이 구겨졌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말을 자신에게 쉽게 내뱉을 수 있을까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자 친구를 사랑하지만, 남자 친구의 궤변에는 골치를 썩였다. 남자 친구는 그녀가 말을 안 하고 듣고 있으면, 머리 굴리지 말라며 대답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는 그 빨간 립스틱을 바른 도톰한 입술이 얼마나 과묵한지 모른다. 그녀는 생각을 한다. 왜 그녀의 출렁이는 긴 생머리와 빨간 립스틱과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에서 마치 그녀가 빈 깡통일 거라고 느끼는 걸까? 그렇게 느끼는 남자가 그녀의 남자 친구라니. 그녀는 어의가 없다. 그동안 그녀는 미안하다라고 말했지만, 이번 카드 만큼은 절대 뒤집힐 수 없었다. 그녀는 헤어져라고 말하고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방에 들어온 그녀는 천천히 회색 스타킹을 벗는다. 해가 저물녘에 그녀의 다리는 조금 부어있다. 외출복을 모두 벗고, 샤워를 한다. 따뜻한 샤워기 물을 그녀의 몸에 적셔준다. 그녀는 이제 헤어졌으니 한동안 자신의 몸을 애무해 줄 남자가 없다는 것에 한숨을 폭 쉰다. 그녀의 열정은 그녀의 몸이 말해준다. 그녀는 남자 친구와 몸을 섞을 때 그 기쁨을 잊지 않는다. 그를 위해 새 옷을 장만하고, 새로운 화장술을 익히고, 그를 위해 맛있는 요리도 했다. 그것이 여자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녀는 그 모든 행위를 기쁘고 행복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사랑했다. 그와의 시간이 그녀의 존재를 더 아름답게 해준다고 여겼다. 바디 샤워 거품을 몸에 문지르며, 그러나, 그녀는 생각을 달리 한다. 그것은 기쁨조였구나라고. 그것은 그녀의 참 행복이 아니었구나라고. 그녀는 자신을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와의 시간이 된장녀라는 말 한마디에 여지없이 무너진 것을 그녀는 인정해야했다. 그녀는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녀는 그녀 안과 밖을 모두 사랑해 줄, 그리고 인정하고 지지해 줄 누군가를 원한다. 짙은 자주색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훔치며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아무래도 그는 그녀를 진정 아껴줄 그 누군가가 아니었구나. 그런데 그녀는 왜 우는 것일까?

 

밝은 브라운 색상의 책장 옆에 있는 그녀의 침대에 몸을 눕힌다. 그녀는 벌거벗고 있다. 아직도 눈물이 흐른다. 회한일까? 아니면 자존심이 아직도 상해서 일까? 그녀는 눈물이 저절로 멈출 때까지 그냥 둔다. 이 침대에서 그와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몸을 탐닉했는데, 어째서 그 시간동안 그녀의 진정한 자아를 그는 몰라줄 수 있지? 그녀는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아름다운 자신의 몸을 알아주는 그가 좋았다. 그녀의 몸을 탐하는 그가 좋았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녀는 그를 위해 변신에 변신을 반복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녀는 좀 더 다양한 패션 감각을 익혔고, 나름 씀씀이가 많아졌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즐거워했다. 그러나. ‘된장녀그 말에서 그가 그녀를 어떻게 보고 있는 지 그 시선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눈물이 다 마르자, 그녀는 일어나서 몸에 바디 로션을 정성껏 바른다. 다소 곳게 뻗은 그녀의 목선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조금 각이 있어 보이는 어깨를 따라 기다란 팔뚝을 향해 로션을 듬뿍 발라준다. 그녀의 가슴은 빈약하지만, 그것을 대신해 줄 짙은 색의 젖꼭지가 오똑 서있다. 그곳에도 로션을 듬뿍 발라준다. 가슴 아래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뱃살에도 장미향이 나는 그 로션을 바른다. 그리고 그녀의 튼튼한 두 허벅지에도 미끄덩거리는 로션을 바른다. 허벅지 위에 둥그스름한 그녀의 둔부를 쥐었다 놓는다. 그녀는 그녀의 몸을 열심히 애무해준다. 이제는 그녀의 몸을 그녀가 아껴줘야 한다. 그녀는 발목까지 장미향의 로션을 바른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새로운 의식이 된 듯하다. 그녀의 몸을 구석 구석 애무하기.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가벼운 산책을 할 요량으로 스포츠 웨어를 입는다. 그리고 가벼운 운동화를 신는다. 문을 열고 나온다. 백팩을 맸다. 그녀는 집 밖으로 나와서 시내로 걷기 시작한다. 곧 겨울이 온다. 쌀쌀한 바람이 콧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의 걸음을 빠르지만 힘든 줄 모른다. 오히려 그 움직임 속에서 그녀는 해방된다. 그녀가 가진 자신의 몸이 얼마나 고마운지 느낀다. 그녀는 팔, 다리가 자유롭고, 잘 걷고, 숨 쉬고, 느낀다. 홀로 있음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새삼 깨닫는다. 얇은 운동화 바닥을 통해 딱딱한 땅을 치고 올라오는 그 기운을 느낀다. 그녀는 건강하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느낀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가고 싶은 곳이 정해졌다. 오랜만에 그녀가 서점으로 향한다.

 

12시까지 하는 서점은 딱 그 곳 한 군데 밖에 없다. 그녀가 그 곳에 간 지 벌써 몇 년은 된 것 같다. 그녀는 한동안 책을 멀리했다. 그녀는 된장녀가 아니다 그녀는 한 때 문학을 사랑했다. 그녀는 서점에 가서 문학 코너를 찬찬히 살펴볼 생각이다. 문학. 그녀는 고교시절에 문학 소녀였다. 그녀의 과묵함은 문학을 읽고, 느끼고, 생각하며 만들어진 인성이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녀의 내면은 그녀의 외면 못지 않게 피어오를 수 있다. 그녀는 생각이 있는 여성이다. 된장녀. 그녀는 생각한다. ? 된장이란 말이지. 그 구수한 된장이 얼마나 맛있는데. 된장으로 끓인 국과 찌개를 생각하자 그녀는 피식 웃음이 나온다. 좋아. 나 된장녀 될래. 나는 된장녀이고, 된장녀를 맛있게 끓일 수 있는 능력있는 남자를 만날래. 그녀는 웃는다. 저 멀리서 높은 빌딩이 빛을 낸다. S서점이다. 그곳에 가서 그녀는 된장처럼 숙성된 책을 찾을 것이다. 그녀의 진짜 모습은 빨간 립스틱과 아이라이너와 마스카라 아래에도 있지만, 이렇게 쌩얼에 가벼운 차림으로 서점을 향하는 모습에도 있다. 오랜만이구나. 그녀는 가슴이 뛴다. 그녀가 살아있음이 행복하다. 그녀는 서점 문을 활짝 열고 한 발 들어선다. 그녀의 시선이 똑바르다. 그녀가 보고자 하는 것이 그 안에 있다는 것처럼. 그녀는 눈물을 흘렸던 그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 곳이 그녀가 갈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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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걷는다. 내 신발이 걷는다. 내가 걷는 것과 신발이 걷는 것은 다르다. 내가 걸으면 이렇게 가볍고 신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내 신발이 걷는 것이다. 나는 그저 신발 위에 몸을 의지하고 있으면 된다. 아하. 참 편리하지 않은가. 내 귀에 꽂은 이어폰 덕분이다. 이어폰을 통해 귀에 익은 노래가 흐른다. 새 노래라도 상관없다. 신발은 밑창이 얇고 가벼울수록 좋다. 발 뒤꿈치가 땅에 닿고 발가락으로 땅을 밀어내는 순간,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노래의 박자가 잘 어울리면 나는 기분이 좋다. 어디든지 걸을 수 있다. 어디든지.  

 

이번 노래는 부드럽다. 신발과 노래 그리고 마음까지 함께한다. 유영을 하는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물 속처럼 나는 이 노래 소리와 신발의 움직임 속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인다. 멀리 시선을 두고 앞을 바라보게 되면 나는 내 걸음이 아주 길고 먼 여행길에서 한 지점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린다. 내 걸음. 그 긴 여행에서 하나의 점들이고 그것이 모여서 길이 되고 내 인생이 된다. 나는 어리지만 언젠가 어른들이 ‘인생(人生)’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 귀를 기울였고, 중학생이 되어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사람 인(人)은 걷고 있는 사람을 붓으로 그린 것이다. 나는 걷고, 내 인생도 걷고, 나는 그 여행길에서 노래와 함께 이렇게 스텝을 밟는다. 

 

이번 노래는 심각하다. 나의 신발은 이번에 다소 긴장하고 있다. 걸어야 할 지 지그재그로 스텝을 밟아야 할 지 판단을 못 내린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노래가 내 귀속으로 들어오자 나의 마음은 이상한 곳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심각하게. 급박하게. 그러나 신발은 스텝을 밟으면서. 강한 비트음이 들리자 땅에 붙어버린다. 지그재그도 아니고 스텝도 아니다. 땅을 뚫고 있다. 조금씩 제자리에서 점프를 한다. 쿵. 쩌억. 신발이 땅보다 강하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린다. 신발과 이어폰으로 흐르는 노래 소리가 이렇게 강한 에너지를 만든다.  

 

신발은 점프를 하며 서서히 공중을 넘어서 하늘로 높이 올라간다. 스텝을 공기 중에 밟는다. 나는 어지럽지 않다. 나는 오히려 자유롭다. 스텝을 살금살금 밟다가, 갑자기 끼이익 미끄러져보고, 탁탁탁 발박자를 밟다가, 신발은 180도 부채꼴로 멀어진다. 다시 모아져서 까치발을 하고 까딱까딱한다. 신발은 아주 신이 났다. 리듬의 왕이 된 듯 내 생각이 미처 다다르지 못하는 움직임을 구사한다. 난 신발을 바라보며 나의 몸을 느낀다. 나의 몸은 무겁다. 그러나 내 신발은 상관없다. 신발은 이어폰과 그것을 통해 흐르는 노래만 있으면 땅을 뚫고, 하늘에서 춤을 춘다. 나만이 알아챌 수 있다. 아. 저기에서 나를 부른다.  

 

야. 마시마로. 

... 

나는 마시마로로 통한다. 나는 그 별명이 좋다. 마시마로는 덩치 큰 토끼이고, 비장의 능력으로 깜짝 놀랄만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 못한다. 나는 마시마로이고, 내 신발은 마시마로의 에너지에 견줄 만 하다.  

 

야. 마시마로 오늘은 왕돈까스 2인분 해치울 거지? 난 쫄면 시킬테니, 네 돈까스 좀 먹자. 

나는 김밥나라로 재우와 함께 들어간다. 재우는 나를 좋아한다. 내 신발의 능력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재우는 고글을 쓰고 있다. 고글 너머의 재우 눈은 비범하다. 내가 내 신발과 걷고, 스텝 밟는 것을 다 알아챈다. 재우는 고글을 한 번도 벗은 적이 없다. 재우의 고글은 블랙이고, 렌즈 표면은 마치 비누방울처럼 투명하게 번쩍인다. 재우는 고글 너머에서 썩소를 날리고 있다. 

 

야. 마시마로. 오늘 너가 깜빡 죽을 노래 하나 줄게. 

... 

재우는 이런 친구이다. 녀석은 내게 신발의 능력을 평범치보다 끌어올리는 에너지를 노래 한 곡으로 가능케했다. 나는 왕돈까스 2인분 중에 거의 1인분을 녀석이 먹을 수 있게 한다. 재우는 또 썩소를 날린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고글 너머의 재우의 눈은 마치 귀와 같다. 녀석은 한 번 들은 소리를 머릿 속에, 아니 자기 몸 속에 저장하는 능력이 있다. 그런 특별한 능력으로 녀석은 내게 여러 멋진 노래를 주었다. 나는 재우가 준 노래로 걷고, 춤추고, 유영한다. 나는 마시마로이다. 왕돈까스 1인분을 거의 3입 만에 먹어치우는 마시마로. 나는 뚱보가 아니다. 마시마로이다. 

 

야. 마시마로. 이 노래 너 줄려고 갖고 왔다. 네 신발을 우주로 초대할 것이다. 

재우는 쫄면과 돈까스 1인분을 거뜬히 먹어치우고는 내게 노래 제목을 적은 쪽지를 주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 노래를 튼다.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바람 소리 가운데 여자의 주문이 들린다. 모래 바람이 불고, 하늘에 달과 해가 좌우 대칭으로 떠있다. 내 신발이 스스스하고 땅을 가른다. 온갖 물체, 생명체, 그리고 사막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또 다시 바람이, 폭풍이 닥치고 내 신발은 그 곳을 벗어나서 북극에 다다른다. 북극에 홀로 헤엄치는 북극곰이 보인다. 빙하가 와르르 무너져 바다로 떨어진다. 바람은 더 더 더 고음의 소리로 불어대고, 내 신발은 어느 꼭지점에 가서 박힌다. 마치 신밧드가 어느 동굴에서 빠져 나올 때 동굴 입구가 서서히 좁아지는 것처럼, 내 신발은 깔때기 같은 곳으로 빨려들어간다.  이이잉... 나의 신발이 사라짐. 

 

눈을 떴다. 하늘에 내가 떠 있다. 겨울에 한마당에 쌓인 눈을 쓸어 놓은 것처럼 창공에 구름이 펼쳐져있다. 손가락으로 거품을 떼어내듯이 구름 한 점을 내 손에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침대에 누워있는 것 처럼 두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는데... 

 

이것봐라. 뚱뙈지! 여기에 철퍼덕 자빠져있네. 

상일 중학교 녀석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뚱뚱한 돼지이다. 뚱뙈지. 나는 무려 123Kg이 나간다. 나는 재우에게는 마시마로이지만, 이곳에서는 뚱뙈지이다. 나는 하늘에 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발 끈에 걸려서 뒤로 넘어진 것이었다. 이상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재우 말대로 나는 우주까지는 아니지만, 이 세상 끝 지점에 다다랐다. 그리고 내 몸은 중심을 잃고 기우뚱 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녀석들이 위에서 나를 쳐다보는 것에 응시했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다음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여전히 누워서 신발 끝을 맞부딪히며 노래에 빠져있다. 

 

뚱뙈지! 

누워서 춤도 추냐? 

 

나는 그들이 나를 귀엽게 부르는 것을 안다. 뚱.이라는 어감이 주는 말의 뉘앙스에는 그들이 즐거우라고 붙힌 단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시마로보다는 별로이지만, 뚱.뙈.지...도 좋다. 한 명이 손을 내밀어서 나에게 일어나도록 손짓을 한다. 나는 좌로 누워서 두 손으로 지탱한 후, 상체를 구부리며 무릎을 받쳐서 일어난다. 그동안에 시간이 흘러서 녀석들은 가버린다. 나는 출근을 했다. 등교가 아니라 출근이다. 삼촌은 내게 그랬다.  

 

사람은 태어나서 사는 것이 일이여. 먹고, 싸고, 자고, 그러기만 하면 못 써. 니도 학생이랑께. 학교가는 게 일인게여. 자 출근 준비 하랑께. 

 

삼촌은 아침부터 나를 챙겨주느라 형식이 아저씨가 집 밖에서 회사차로 한참을 빵빵 거렸다. 나는 신발, 이어폰, 노래가 있으면 마시마로가 되지만, 교복을 입으면 박희수가 된다. 아주 보통 인간이 되어서 재우도 만날 수 없고, 내 신발 위력이 떨어진다. 내 신발은 평범한 네이비 색깔 스니커즈이고, 신발끈은 매번 풀려서 이렇게 하늘에 붕 떠 있다고 착각을 한다. 멀리서 수업 시작 예비종이 들린다. 어여 가야겠다. 내 신발은 네이비 색이고, 스니커즈이고, 종소리는 내 신발을 뒤뚱거리게 한다. 종소리는 멀리 퍼지는 파장만큼 내 신발을 짓누른다. 

 

교실 안이다. 이 곳에서는 인간 박희수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소심하고, 긴장한다. 키도 체구도 큰 나는 뒷자리에 앉아있다. 내 등판이 넓어서 어쩔 수가 없다. 반 친구들이 내 등판을 보면 침대 같다고 자꾸 비벼댄다. 나는 소심하고, 나약하고, 긴장해서 대체로 가만히 있다. 키가 이만큼 크기 전에는 뒷자리 앉은 친구가 내 등판에 이런 저런 낙서를 해서 테이프로 붙혔다. 하루는 나도 모르게 화장실을 가는데, '내 똥 굵다'라고 쓴 낙서지를 붙히고 가야했다. 사실 정말 화장실에 가야 할 상황이었다. 나는 그런 장난을 힘들어 하지만, 친구들은 희희낙낙이다.  

 

나는 교실에 앉아서 이어폰, 노래, 신발을 사용할 수 없다. 나는 36명이 앉아있는 교실 안에서 나의 숨을 넓게 멀리까지 퍼뜨리기 위해 집중한다. 물에 퐁당 돌이 떨어지면 물결이 멀리까지 동심원을 그리는 것처럼 나의 숨이 반 친구들과 교실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하는 것이다. 나의 숨이 깊고 느리게 퍼지는 동안 교실 안은 평온하다고 상상한다. 어떤 친구는 꾸벅 꾸벅 졸고 있고, 어떤 친구는 몰래 만화책을 보고, 어떤 친구는 열심히 공부한다. 나는 그 모두에게 다 집중한다. 그것이 내가 학교에서 하는 일이다. 아쉽지만 마시마로는 교실에서 인간 박희수가 되어서 인간들 주파수에 나를 맞춘다.  

 

인간 박희수는 그러나 초인이 아니다. 길고 무더운 여름 한 낮의 교실에서 나 역시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눈꺼풀을 감았다가 뜨는 횟수가 점점 느려지더니 내 얼굴이 천천히 책상 쪽으로 기운다. 나는 5교시부터 쉬는 시간을 넘어 6교시 과학 수업 때까지 엎드려 잔다. 깨어나 보니 6교시는 과학실에서 진행을 한다. 이런... 나는 어떻게 할까 잠시 머뭇거린다. 나는 교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다.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1학년 교실 풍경을 넌지시 바라본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싶다가도 이 또한 내 일이구나 싶다. 저 멀리서 교감 선생님이 걸어온다. 나는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교감 선생님은 내게 ‘어디가냐?’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어깨를 토닥인다. 나는 그 길로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한다. 참 이상하다. 내가 학생이긴한가? 나는 거울 속에서 나를 보며 잠시 멍을 때린다.  

 

그 때,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재우가 등장한다. 귀에 헤드폰을 끼고는 나에게 손짓을 한다. 재우 가까이로 내가 가자 헤드폰을 내 양쪽 귀에 씌워준다. 내 눈이 스르르 감기고, 밟고 있던 땅이 푹 꺼진다. 빠르고 다소 거친 전자 기타 소리가 내 몸을 어두컴컴한 쇠파이프 속으로 초대한다.  물미끄럼틀을 타듯이 쭉쭉 빠지는 파이프 속에서 나는 버둥댄다. 나는 쇠파이프를 너무 오래 타서 뱃속이 미식거린다. 아.아.아. 나는 그만 헤드폰을 집어치운다. 재우가 고글 너머에서 내게 혀를 끌끌 찬다. 난 울렁거리는 속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먹은 것을 몽땅 토한다.




#2 

 

  깨어나니 양호실이다. 나는 123Kg이 나가는 뚱보이다. 나를 여기까지 어떻게 옮겼는지 모르지만, 내가 자주 오는 곳이다. 똥머리를 하고 있는 양호 선생님이 여전히 계신다.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빨대를 꽂은 야쿠르트를 2개나 주신다. 나는 선생님의 똥머리를 한 번 스윽 만져보고 싶다. 반들반들하고 통통하고 둥그스름한 머리카락이 달려있는 모습을 보면 내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귀여운 덧니가 있는 선생님은 웃으시며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신다. 나는 기분에 대한 대답 대신 빨대를 입에 물고 쪽쪽 달큰한 야쿠르트를 빨아들인다. 양호실을 나서며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를 한다. 재우처럼 썩소를 날려주고 싶지만, 나는 무표정이 제격이다.  

 

  학교 수업은 다 마쳐졌다. 빈 교실에 들어가니 내 가방과 누군가의 가방이 덩그러니 책상 위에 있다. 가방을 매고 나서려는데, '희수'하고 나를 부른다. 학급 모범생 '호형'이다. 나만큼 키가 큰 호형은 내게 자신의 집에 함께 가지 않겠냐고 한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호형의 집은 근사한 주택이다. 학교 근처에 이런 비싼 집이 있는 줄 몰랐다. ㄷ자 모양으로 생긴 집은 첫 획에 거실과 부엌이 있고 둘째 획에 호형의 방이 있고 마지막 획에 부모님 방이 있다고 했다. 호형은 자신의 부모님은 둘 다 산부인과 의사라고 말하며 1주일에 2번 보면 많이 만나는 거라며 씁쓸하게 말한다.  

-에스더 과일 쥬스 2잔 주세요. 

 

  긴 흑발을 묶은 한 여자 분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호형 말로는 필리핀 여성이라는데, 피부가 하얀 편이라서 나는 짐작도 못했다. 에스더는 초코 바나나 쥬스 2잔을 탁자 위에 두고 방문을 닫으며 뒷걸음질로 나간다. 호형은 그 때까지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내 귀에서 빼내더니 듣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 한 쪽 벽면을 모두 뒤덮어 꽂혀있는 LP를 찾아낸다. 내가 듣는 노래의 같은 아티스트이다. LP 플레이어에 음반을 꽂는다. 조용한 가운데 음반 소리만 들린다. 호형과 나는 가만히 서서 노래에 몰두했다. 하모니카와 기타가 어우러진 노래이다. 기타는 뚱뚱뚱 타악기 마냥 연주를 하고 멜로디를 하모니카가 멋지게 연주한다. 우리는 잠시 이 인생길 한 지점에서 우연히 노래 하나로 엮어진 것을 알아챈다. 순간 호형이 교실에서 묵묵히 공부하는 모습이 어디에서 나왔는 지 알 것 같다. 

 

  호형과 주말에 걷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호형이 음반을 갖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기대도 되고, 친구와 만나는 것이 처음이라서 가슴이 발랑발랑 뛰기 시작했다. 

 

‘삼촌 저 주말에 친구 만나러 가요.’ 

‘그려, 너가 이제 재우 말고도 새 친구 사귈 때가 됐을랑께. 옛다 2만원. 맛있는 거 먹고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해라.’ 

 

  삼촌은 내게 용돈을 주며 재우 말고 새 친구를 사귄 것에 대해 굉장히 기뻐했다. 재우는 내게 여전히 특별하지만, 호형에 대한 내 기대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호형은 조용하고 침착해 보였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음악을 나만큼 듣는 친구라는 것이 무척 좋다. 

 

  내가 123Kg이나 나가게 된 것은 DK300이라고 적힌 알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이 알약은 나의 엔트로피 법칙을 제어하는 독특한 약이다. 의사 선생님은 내 머리를 쉽게 설명하려고 엔트로피 법칙을 따르는 인간이라는 말을 했다. 대부분은 엔트로피 법칙을 따르기보다 그 반대 법칙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란다. 쉽게 말하면 나는 점점 어지럽히고, 점점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갖췄는데, 대부분은 때가 되면 정리하고, 가지런히 멈추고,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 에너지가 몸이 반응을 할 때까지 넘쳐 흘러서 결국 재우를 만나 노래를 한 곡 얻고 나는 하이 상태가 된다. 

 

  나는 이 에너지를 감당하기 위해 한동안 방구석에서 잠만 잤다. 삼촌은 내가 방구석에 머물면서 무려 35Kg이나 몸무게가 늘어나자 의사 선생님에게 말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체중 증가라는 부작용은 없다며 의아해했다. 삼촌은 내가 방구석에서 머무는 것을 탈출시키기 위해 스니커즈와 MP3 플레이어 그리고 이어폰을 사주었다. 그 후부터 나는 걷기 시작했다. 걸으며 내 엔트로피 법칙을 통제하고자 했다. 쉽지 않았다. 엔트로피 법칙이 시작되면 나의 이어폰의 음악은 무척 강렬해진다. 아마도 내 뇌에서 작용을 하기를 귓바퀴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가 증폭된다고나 할까. 재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 였다. 재우는 내게 노래를 하나 준다. 그러면 나는 그 노래에 빠져서 엔트로피 법칙을 이겨낸다. 노래 속 에너지를 통해 나는 걷고, 스텝을 밟고, 춤을 춘다. 내 스니커즈가 그러는 것이다. 재우는 소리 소문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재우를 보는 사람은 나 뿐이다. 재우는 그래서 특별하다. 

 

  나는 방 안에 누웠다. 재우가 준 그 노래를 다시 듣는다. 바람 소리같던 노래는 작은 흐느낌처럼 좀 무섭다. 그 노래 소리에 가까이 다가가면 나는 방 안이 아니라 다른 곳에 와 있다. 분명 내 등짝으로 방바닥이 느껴지고, 내 배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귀로 들어오는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가 내게 기운을 주는 것 같다. 내게 후~하고 입김을 넣어서 나를 깨워주는 것처럼 나는 방 안에서 다른 곳으로 공간 이동을 한다. 아무런 설명이 없이 들은 노래일 때, 그 입김은 보다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노래로 전해지는 입김. 정말 노래를 부르는 행위자가 그 입술로 마법을 거는 것처럼 내 귀로 들어오는 음성은 내게 주문을 걸고, 나는 꼼짝 못하고 소리에 빠져버린다. 3분에서 5분 정도 시간 동안 모든 것을 잊고 내게 기운을 주는 숨결을 따라서 방 안을 유영한다. 내가 자유로워 지는 시간이다. 아무런 노래도 없는 세상이 된다면 사람 귀는 닫혀버릴 것 같다. 아마 입술을 보고 말을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언젠가 청각장애인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노래를 부르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분명 그 소리는 괴성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청각장애인의 표정과 입술, 그리고 눈빛에서 표현하는 자의 열정이 묻어있었다. 그 모습으로 노래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내게 노래는 전달되는 그 무엇이다. 아름답고, 슬프고, 즐겁고, 신나고, 환상적이고, 조용하고, 이상한... 이 형용사들을 모두 꺼내어 보아도 충분하지 않은 것이 노래 소리는 무언가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재우는 그 열린 세상에서 나온 친구이다. 예전에 내 세상은 닫혀있었다. 내 이어폰으로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내 세상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재우도 곧 만날 호형도 내게 바람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바람이 되고 싶다. 바람. 시원한 바람, 피부로 와 닿는 바람. 소리로 들리는 바람. 바람은 곧 노래이다. 노래는 바람에 실려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퍼져나간다. 나는 눈을 감고 바람이 부는  방 안에서 잠을 청한다. 

 

     #3 

 

  호형과 걷고 있다. 호형은 발목을 까딱까딱하며 아주 가볍게 걷는다. 난 그 반대이다. 육중한 몸을 한 발 한 발 도장 찍듯이 걷는다. 뚱뚱이와 홀쭉이. 뒤에서 보면 그런 캐릭터로 그려질 듯 하다. 호형은 손에 CD를 들고 있다. 케이스가 종이로 되어 있고, 노을 지는 풍경이 케이스 앞면의 반을 덮고 있다. 처음 보는 음반이다. 호형은 말 없이 걷는다. 호형이 말 없이 걷는 것을 나는 가만히 느껴본다. 우리 둘 앞에는 길이 뻗어있다. 자전거 도로이다. 산책하기에 눈을 감고도 가능하다. 우리는 눈을 감지 않았다. 정면을 응시하고 똑바로 걷는다. 안전한 자전거 도로이지만, 길은 길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걷게 되겠지.안전하게. 호형이 왜 말이 없는 지 궁금하지 않다. 하늘과 그 아래 솟은 건물들, 강처럼 구비구비 이어진 자전거 도로. 끝을 향해 걷는다. 마지막에 다다르면 호형이 CD를 줄 것이다.  

 

  나는 잘 걷는다. 이어폰이 없어도 잘 걷는다. 호형이 걷는 것과 내 발 박자가 제법 맞는다. 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길 끝에는 다시 길이 있었지만, 호수가 함께 있어서 도착점을 찍을 수 있었다. 호형은 말없이 벤치에 앉았고, 나도 옆에 앉았다. 내 엔트로피 법칙은 놀랍게도 휴지기였다. 몸이 시원하다. 걷고,  앉았고, 이제 쉰다. 다닥다닥 여우비가 내린다. 내 팔뚝에 있는 잔털이 오소소 일어나고, 빗물에 적셔진다. 호형이는 여전히 말이 없다. 여우비가 움직이며 지나가고,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는 구름 틈바구니에서 시작되어 파란 하늘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사라지는 지점인가. 

 

- 여우비에다가 무지개라니. 우리가 뭐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무슨 날이 이러냐! 

- 여우와 호랑이가 결혼을 한다잖아. 무지개는 그래서 떴겠지. 

- 나도 그 얘기 알아. 미국에서 읽은 동화책에서 봤어. 미국에서는 꿈도 못 꾸는 날씨지. 

- 둘이 결혼하는 건 알겠는데, 왜 여우와 호랑이인지 기억이 안 나. 

- 그 반대 아닌가? 호랑이한테 차여서 여우가 슬퍼서 우는 거. 

- 햇살이 비치는 사이에 비가 내리는 거잖아.  행복해서 우는 거여야지. 

- 햇살이 비치는 곳에서 울어봐. 그게 더 슬퍼. 

- 그 CD는 처음 보는거다. 

- 너가 듣는 음악들과 분위기가 좀 달라. 

- 난 아무거나 다 들어. 

- 네 귀는 아무나 못 따라가겠다. 나는 너 따라가려면 죽었다 깨어나야할거다. 

- 재... 아니 내 친구 덕분이지. 내가 듣는 노래는 대부분 그 친구 통해서 알게 되었거든. 

- 너한테 친구가 있는 줄 몰랐다. 나처럼 외톨이인 줄 알았는데. 

- ... 

 

  그 말을 끝으로 호형이 CD를 건넸다. 외톨이. 뚱뙈지. 마시마로. 어느 것이든지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놈이다. 외톨이가 뚱뚱해서 마시마로가 되고 싶어하는. 호형은 재우와 다르다. 고글을 쓰지도 않았고, 썩소를 날리지도 않았다. 호형은 질문을 했다. 외톨이 아니냐고. 화가 나지 않았다. 뜨금하기는 했다. 구름처럼 느릿느릿한  내 마음 속 수면 위에 호형은 물제비를 던진다. 물제비는 멀리까지 날아가고 있다. 한 번 질문이 들리자 내 마음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내가 외톨이였나 싶게. 

 

-호형 너 예전에 미국에 살았다며... 

-... 

-거기는 어떤 곳이니? 워낙 큰 나라라서 나는 도통 상상이 안 된다. 

-나 역시. 집, 학교, 치유 센터 세 곳만 다녀서 잘 몰라.  

치유 센터라는 말에 나는 물어보기가 힘들어졌다. 호형은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가만히 있더니 말을 먼저 꺼냈다. 

-실어증이었거든. 부모님 입맛에 맞는 공부를 하다가 내 능력이 부족한 걸 알게 되자 말문이 꽉 막힌거지. 바이올린, 미술, 발레, 피아노 그 밖에 것들을 배우다가 내가 지쳐 버렸지. 집에 오면 아무도 없고 가정부만 내 가방을 챙기고 간식을 주었어. 가정부 돌리 아줌마는 그래도 내가 조용히 있으면 재밌는 얘기를 해주셨지. 집중 언어 치유 교실에 다니면서 나는 천천히 내가 독서에 흥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치유 센터 담당 선생님이 내게 흥미있는 책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그의 입술 모양을 따라서 소리를 낼려고 했거든. 그 후에 점차 말문이 열리게 되었지.  

-말이 없어지다니... 신기하다. 

-말이 없어지면 세상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져. 들리는 소리도, 만지는 느낌도, 먹는 것도 예전보다 흥미로워지지. 내가 실어증에 걸렸을 때, 나도 너처럼 몸무게가 많이 나갔었어. 헌데 역시 우리 부모님은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둘 분들이 아니지. 물론 그 때는 내가 어리기도 했으니, 개인 트레이닝과 수영, 식이요법으로 몸무게를 줄였어. 

 

  나는 호형이 하는 말에 어떠한 슬픔도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슬퍼졌다. 호형은 애어른이 된 것 같았다. 호형은 마치 고등학생 형 같았다. 키가 크고 마른 호형은 나를 쳐다보며 그런다. 

-너한테 하는 말인데, 나 사실 너보다 2살이나 많아. 

-그렇구나... 형. 호형이 맞네. 

 

  호형은 먼저 갔다.  

- 어 그래. 

- 학교에서 봐. 

호형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CD를 듣기 시작했다. 벤치에 앉아서 CD를 다 들었다. 해가 저물어갔다. 나는 눈이 감기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여러차례 보았다. 밤이었다. 사람들이 그래도 별똥별을 보러 서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머릿 속에서 불꽃놀이가 일었다. 나는 뛰었다. 거의 걷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나는 뛰고 있었다. 내 스니커즈가 정말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숨이 가빠지면 잠시 땀을 닦고 다시 뛰었다. 뛰면서 알았다. 나는 뚱보가 아니라는 걸. 내 안에 나는 아주 멋진 놈이라는 걸. 내게 재우와 호형이 있다는 것은 내가 멋진 놈이라는 것이다. 다리를 지날 때는 정말 스텝을 밟았다. 다리 난간에 있는 쇠창살에 내 발 박자를 맞추며 스텝을 보였다. 아무도 보지 않았겠지만, 나는 내가 춤을 춘다는 것을 실감했다. DK300을 복용할 시간이 넘어갔는데, 내 몸에 이상이 없다.  

 

  집에 돌아와서 문을 큰 소리가 나게 열어재꼈다. 나는 땀범벅이 되어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나는 삼촌 나 약 먹어야해!라고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삼촌이 나를 방바닥에 앉히고는 너 괜찮니?라고 묻지 않는다. 삼촌 역시 가만히 있다. 내 숨소리가 점점 사그라질 때 나는 잠이 들었다.이불 아래에서 눈을 떴을 때, 천장이  어지러웠다. 나는 엔트로피 법칙이 시작되는가보다 했다. DK300을 찾아보았다. 항상 있던 자리에 약이 보이지 않았다. 어지럼증이 점점 더해지더니 몸이 덜덜 떨리고 한기가 느껴졌다. ‘삼촌!’ 불렀지만 나 혼자 집 안에 있다. 

 

  천천히 방안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방 안을 치우지 않는다. 삼촌은 내 방을 엔트로피 법칙의 최종판이라고 했다. 물건이 하나씩 탑이 되어간다. 방 안이 마치 홍해가 갈리듯이 길이 생겼다. 방 안 물건이 어느 정도 치워지자 약 봉지가 눈에 띤다. 나는 만지작거리며 먹을 지 말 지 고민을 해본다. 재우라면 알려줄까? 호형은 어떻게 얘기해 줄까? 나는 무슨 베짱인지 약 봉지에 있는 약을 몽땅 꺼낸 후에 화장실 양변기 속에 버리고 물을 내렸다. 나는 조금 흥분이 되었고, 기분은 날아갈 듯 했다. 바닥이 드러난 홍해에 드러눕는다. 천장이 여전히 어지럽다. 잠이 들었다. 

 

- 갈 수 있는 곳 한군데 얘기해봐. 

- ...  

- 너한테 비행기 티켓이 딱 한 장 있어. 어디로 갈래? 

  나는 쌍둥이 폭포로 갈거야. 그 곳에 떨어져 보는 것이 내 소원이야. 

- ... 

- 나는 예전부터 쌍둥이가 좋았어. 샴 쌍둥이도 괜찮지 않냐? 

- 난 우주. 

- 뭐? 

- 우주에 가서 실컷 노래를 듣겠어. 우주 미아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야. 

- 우주. 노래 듣기 좋은 곳이다. 

 

  눈을 떴을 때 호형과 나눈 대화가 끝났다. 벽에 걸린 은하수 사진이 보인다. 은하수가 빙글 빙글 돌아간다. 호형은 나에게 은하수이다. 나는 블랙홀이고. 은하수 호형. 블랙홀 희수. 그러고보니 우리는 같은 ㅎ자를 쓴다. 왜인지 모르게 나는 눈물이 흘렀다. 내 감정 꼭지가 망가진 것 같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삼촌이 없어서 나는 아주 크게 울었다. 내 안에서 블랙홀이 터졌다. 광활하고 어두운 그 곳에 깜빡이는 불빛이 보인다. 나는 그것을 따라서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은하수 사진이다. 빙글거리는 은하수. 내 블랙홀 안에 은하수가 들어왔다. 나는 꿈에서 깼다. 

 

    #4 

 

-너 일어나. 

-왜요? 

-몰라서 묻냐. 

-싫은대요. 

 

  수학 선생님이 키가 크고 마른 학생을 지목했다. 목소리가 지훈이다. 지훈은 무섭지도 않나보다. 선생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말하는 학생은 우리 반에 지훈이 혼자이다. 지훈은 성적도 널을 뛴다. 반에서 상위권 성적에 들다가도, 갑자기 성적이 곤두박질 치기도 한다. 소문으로는 엄마가 술집 사장이란다. 교무실에서 지훈이 엄마가 선생님들이 다 보는 앞에서 지훈이에게 뺨따귀를 여러 번 날리는 것을 본 당번이 그렇게 이쁜 엄마는 처음 봤다며 소문을 냈다. 지훈은 엄마가 학교에 찾아올 시기에는 성적이 올랐다가, 엄마가 바쁘신지 소식이 없으면 학교에서 문제아로 전락했다. 수학 선생님은 학생 주임이고, 그런 지훈이를 매섭게 몰아세운다. 머리가 좋아서 성적이 잘 나오는 지훈이가 선생님 앞에서 말대답을 지지않고 한다는 것에 분개하는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지훈이가 말대답을 하는 걸 보면, 가슴이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때론 놀랍기도 하다. 어디서 저런 기개가 나오는 지 솔직히 부럽기도 하고 동경이다. 나한테 저런 용기가 있으면 나는 어떨까 싶다. 지훈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고, 수학 선생님은 교무실로 내려오라고 엄명을 놓았다. 지훈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학 시간은 지훈이 덕분에 살벌하게 진행되었다. 수학 선생님 목소리는 처음 날 선 목소리 그대로 수업내내 계속 되었고, 반 아이들 전부 다 긴장이 되어서 꼼짝을 못했다. 지훈은 딴 짓은 안 했지만, 가끔 가방을 통채로 가져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날 다음에는 꼭 새 가방을 들고 학교에 왔다.  

 

  쉬는 시간이 되어서 지훈은 교실에 없었고, 교실 한 곳에서 아이들이 모여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야. 지훈이 말야 곧 학교 전학 간대. 

-그걸 너가 어떻게 알아? 

-내가 들은 얘기로는 지훈이 가방이 없어질 때마다 걔 엄마가 조폭 남친한테 덤비는 지훈이를 살려내느라고 가방을 뺏겨다고... 

-야. 그만해 

-어라. 니가 뭔 상관이냐? 

-... 

-그 정도가 아니야. 고딩 씹새들이 지훈이를 스카웃 했다더라.  

-지훈이 아빠도 조폭 아닐까? 엄마가 술집 사장인데... 

-야. 지훈이 데려가는 술집 여자들 봤지. 걔네 엄마가 누군지 솔직히 어떻게 아냐? 

 

  호형이는 화가 났는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지훈이 진짜 아빠는 교도소에 있다는 둥, 아니다 지훈이 엄마가 술집 여자라서 누가 아빠인지도 분명치 않다. 지훈이는 아마 고아인데 데려다 키우는 걸 지도 모른다. 지훈이랑 그 엄마랑 나이 차가 별로 안 나는 걸 보면, 지훈이 엄마가 10대에 낳았다는 둥.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나는 지훈이가 교무실에서 돌아올까봐 조마조마했다. 반 아이들은 지훈이가 대단해보이면서도 동시에 비운의 주인공이기를 바랐다.   

 

  새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지훈이 자리는 비어있다. 책가방도 없어서, 정말 전학이라도 간 것 같았다. 나는 지훈이가 선생님 앞에서 말대답을 하는 것은 봤어도 선생님 흉을 보거나, 반 친구들에게 욕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지훈은 호형처럼 어찌보면 모범생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호형이라면, 지훈이는 꼭 자신의 생각을 바로 표현하는 카리스마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호형도 지훈도 나이를 어떻게 먹었는 지 모르게 둘 다 어른스럽다. 다른 반 친구들이 오리처럼 꽥꽥 거릴 때, 둘은 백조처럼 우아하다. 한 명은 흑조이긴 하지만. 나는 학교가 끝날 때까지 지훈이 자리를 자주 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호형이 곁으로 갔다. 호형은 잠시 엎드려 있었다. 아까 지훈이 소문에 대해 호형이 버럭 화를 낸 것이 마음에 걸린다. 호형은 지훈과 친한 걸까? 나는 살며시 호형이 를 깨웠다. 

-집에 가냐. 

-응. 아니 삼촌 가게로 가. 

-나 좀 도와줄래? 

-... 

 

  호형이 도와달라고 하다니, 무슨 일인가. 교문을 나서서 떡볶이집과 편의점 사이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내 앞으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호형이 그 사람을 붙잡았다. 지훈! 나는 호형이가 지훈이를 부축하며 걸어가는 것을 뒤쫓았다. 지훈은 누군가가 쫓아올까봐 계속 겁내고 있는 듯 보였다. 심하게 얻어터진 부위가 몇 군데 있었고, 한 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호형과 지훈이 함께 가는 모습이 꼭 의형제 같았다.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두 갈래길 중에 좀 더 가파른 길에 올라가니 녹슨 파란 대문이 열려있었고, 둘은 그곳을 향해 들어갔다.  

 

  마당에 수도 시설이 되어있고, 짧은 마루가 붙어있는 낡은 한옥집이었다. 호형은 거의 실신하려는 지훈을 마루에 기대어 놓고 내게 약국에 다녀오겠다며 지켜달라고 했다. 지훈은 옆에 누가 있는 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지훈이 상처를 가까이에서 보았다. 혼자서 여러 명에게 얻어 맞은 것인지, 지훈이보다 힘이 좋은 사람한테 일방적으로 맞은 것인지 잘 분간이 안 되었다. 나는 싸움이라는 것은 해 본적이 없다. 말싸움도 몸싸움도. 지훈이 가위 눌리는 지 이상한 신음 소리를 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도 조금씩 불안해졌고, 이상한 집에 들어온 것도 그랬다.  

 

  나는 조용히 옆에 앉아서 지훈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봤다. 신음 소리에는 누나라고 부르는 소리와 보내달라는 소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기도라도 해야하나. 나는 뭔가를 해야할 것 같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이상한 집을 둘러보고, 지훈 머리에 받칠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방 안에는 물건이 별로 없었다. 누구 집인지 알 수 없었는데, 벽에 걸린 액자에 유치원 남자아이와 여중생이 찍혀 있었다. 방 안에서 수건을 하나 갖고 나와서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물을 적시려고 했다. 물이 끊겼는 지 나오지 않는다.  

 

  호형이 약봉지를 들고 대문으로 들어섰을 때, 지훈이 깨어났고, 나는 둘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서 있었다. 호형은 파스, 연고, 소독약으로 지훈이 상처를 응급처치 했다. 무릎은 심하게 부어있어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 쟤는 왜 데리고 왔지? - 내 친구야. 나는 둘이 대화 나누는 것을 듣고 주눅이 들었다. 호형이가 없으면 무서워서 도망갔을 것이다. -알바를 가야 해. -이대로는 힘들 걸. 두 사람이 대화나누는 걸 들으니 둘은 가까워 보였다. 나는 묵묵히 있다. 지훈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매섭다.호형은 지훈이 몸을 추스리는 걸 보고 더는 말을 안 하고 나를 데리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나는 둘이 어떻게 친하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호형 옆에서 걷기만 했다. 호형은 아무 말이 없는대다가 오늘따라 걸음걸이도 무겁다. 나는 덩치에 맞지 않게 쭈뼜대고 있다. 삼촌이 나를 기다린다고 말하고 얼른 헤어지고 싶었다. 그 말조차도 꺼내기 힘들게 호형은 너무 조용하다. 횡단보도에서 기다릴 때, 호형이 말한다. - 지훈한테 너가 밥을 좀 갖다줄 수 있겠니? 네 삼촌이 주방장이라며.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호형은 그 말만 하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나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받은 사람처럼 삼촌 일하는 곳으로 가서 도시락을 3개 싸달라고 했다. 삼촌은 친구들과 먹는 거냐고 묻더니 바쁜 시간이라서 요리를 해줄 수 없다며 김치볶음밥을 3인분 해준다. 나는 그걸 들고 최대한 빨리 그 골목길을 찾아갔다. 그 대문에 다다랐다. 가쁜 숨을 고르고는 들어갔는데, 지훈은 그 곳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훈이 그 몸으로 어디를 갔나 걱정이 앞서기보다 이상한 집이 무서웠다. 이대로 호형을 기다리느냐 아니면 떠나느냐 고민을 했다. 그 때 구두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옥집과 화장실 사이 벽 틈에 몸을 숨겼다. 

 

- 지훈아. 누나가 말했잖아. 그 사람 좀 찾지 말라고. 

- ...- 

- 밥이나 먹자. 얼굴은 누가 그렇게 치료해 줬니?  

- ... 

- 너 무릎. 병원에 가보자. 

 

  나는 좁은 틈에서 내 배가 보일까봐 조마조마했다. 지훈과 누나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누나라는 사람은 화장을 짙게 하고 아주 짧은 스커트 차림이었다. 곧 중국집 짜장면이 도착했고, 그와 동시에 호형도 왔다. 호형이가 지훈에게 나 보지 못했냐고 물었고, 키가 커 보였던 지훈 누나가 누구?라며 물어보았고, 나는 어쩌지 못하고 있다가 화장실도 급했고 해서 비실비실 걸어나갔다. 지훈은 한 쪽 눈을 안대를 하고 있어서 어떤 표정인지 몰랐다. 지훈 누나는 나를 보더니 방긋 웃으며 어머 지훈 친구구나하고 환대했고, 호형은 제 친구에요했다. 나는 들고 있던 김치 볶음밥을 건네주고 화장실로 도망갔다. 

 

  대체 이 세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  

지훈 누나는 화장이 짙었지만, 대학생 누나같았고, 지훈은 애꾸눈 해적같았고, 호형은 돈 많은 귀공자같았고, 그 가운데 나는 완전 쪼다같았다. 헌데 세 사람은 정말 친했다. 말을 별로 안 하는 지훈과 호형이에게 계속 말을 하는 누나는 아주 편해보였다.  

-너는 이름이 뭐니? 누나가 물어봤다. 지훈과 호형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박희수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 말에 지훈이가 피식 웃었다.  

-저랑 친구인데 괜찮아요. 호형이 말했다.  

-이 김치볶음밥 정말 맛있다.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는다. 호형과 지훈은 그러고보니 분위기와 외모가 비슷했다. 마치 쌍둥이같이... 아니 거지와 왕자같다고 해야하나. 지훈은 좀 긴장하고 있었고, 얼굴에 인상이 잔뜩 들어갔다. 호형은 지훈을 챙겨주며 누나와 말을 건넸다.  

- 희수 삼촌이 주방장이에요.  

- 희수는 삼촌이랑 사는구나. 지훈이는 나랑 살아. 나는 지훈이 누나야. 나이 차가 좀 나지만, 그래서 지훈이가 좀 외톨이였지. 이제는 지훈, 호형, 희수 이렇게 셋이서 지내면 된건가?  

 김치볶음밥을 다 먹은 나는 목이 메여서 우물 우물 대답한다.  

- 저는 재우라는 친구가 있어요. 호형에게 말한 적 없지만, 제가 호형을 알기 전 유일한 친구였어요. 저는 엔트로피 법칙에 지배를 받아요. 그거 아세요? 

- 호형, 너 친구 좀 이상하다. 지훈은 삐딱하게 고개를 젖히며 나를 바라본다. 

- 있지. 재우는 내 눈에만 보이는 친구야. 나는 엔트로피 법칙 때문에 가끔씩 실신을 하고는 해. 그 때 마다 내게 노래를 하나씩 남기고 가는 친구가 재우야. 그게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걷기 시작하면서 나는 재우를 만나게 되었어. 

호형과 지훈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는다. 둘은 나보고 너처럼 독특한 친구는 우리도 처음이라고 둘 다 그렇게 말한다. 지훈이 물었다. 

- 너 눈에만 보인다고? 그렇다면 그건 미친거잖아. 

- 지훈아! 

- 너가 아프다는 것은 소문으로 알고 있었는데, 너의 병명이 뭐니? 

호형이 차분하게 물었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엔트로피 법칙에 걸린 것이다라고. 

 

       # 5 

 

  지훈과 호형이 내 인생에 불쑥 들어왔다. 둘은 친해보였고, 그렇담 나도 지훈과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 내가 호형과 친해질 거니깐. 방 안에 앉아서 생각해보았다. 지훈이 오른쪽, 호형이 왼쪽, 내가 가운데라면 어떨까! 대단한 삼인방이 될 것이다. 나는 마시마로이다. 내가 말했다시피, 내게는 분신인 재우도 있다. 그러고보니, 약 복용을 멈춘 지 1주일이 지났고, 그동안 재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솔직히 그동안 지훈과 호형 생각하느라 재우는 쏙 빼놓고 지냈다. 재우는 내게 노래를 주는 멋진 친구이고 비밀에 싸인 친구이다. 왜냐! 바로 내 눈에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삼촌은 처음에 의사 선생님과 의논을 했다. 간혹 나 같은 환자의 경우에 환청, 환각, 환후, 환시가 있을 수 있다며, 그럴경우 약 복용량을 늘리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 용량을 복용한다. 하지만 재우는 여전히 나타났다. 그 친구가 나타나면 내  엔트로피는 마구 증폭되어서 나는 표정도 이상하고, 행동도 거칠고, 급기야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히 나는 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심하게 하지 않기에 가만히 두고 나면 나 스스로 수습을 하고 실신에서 깨어났다.  

 

  삼촌에게 넌지시 알릴 때가 된 것 같다. 재우가 그동안 보이지 않았다고, 또 약을 안 먹은 지 2주가 넘어간다고. 삼촌이 내게 저녁을 먹으라고 한다. 두부와 야채로 덮힌 덮밥이다. 두부는 적당한 한 입 크기로 썰어져서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고, 야채는 송송 썰어져서 빨갛게 양념이 되어서 밥 위에 뿌려져 있다. 달콤하고 매콤한 덮밥은 한 입 떠서 입 안에 넣자 살살 녹는다. 삼촌은 주방장인데, 한 그릇 음식을 잘 만들고, 형식이 아저씨는 한 그릇 요리에 어울리는 국을 잘 만든다. 오늘 국은 내가 좋아하는 오이 미역 냉국이다. 가지런히 얇게 썰린 오이가 식초와 설탕과 소금으로 간이 된 시원한 냉국 위에 미역과 적당히 배분되어 있다. 오이가 아삭아삭한 식감으로 씹히고, 미역은 후루룩 한 입 시원하게 마시자 목구멍으로 꿀덕 넘어간다.  

 

-삼촌 나 약을 안 먹어도 되지 않을까? 

-잉? 그게 뭔 소리여? 

-사실... 약을 끊은 지 1주가 좀 되었어. 

-네가 약을 끊고 지냈다고랑께? 맨 정신으로? 

-... 

삼촌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만져보았다. 정말인지 아닌지 믿겨지지 않은가 보다. 삼촌은 병원에 함께 가보자고 한다. 그래야 될 것이라며 내게 저녁을 어서 먹으라고 재촉했다. 삼촌은 다행히 화를 내지 않는다. 삼촌이 화 내는 모습을 내가 본 적이 있지만, 그 모습은 너무 예전이라 내가 꿈을 꾼 것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다. 삼촌은 병원 예약 날짜를 미리 앞당겼다. 다음 날이 되어서 나는 삼촌과 함께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신다.  

-위험한대. 이렇게 짧은 시간 재발이 되지 않았다고 약을 아예 끊어버리면 나중에 큰 일 날 수 있어요. 삼촌은 고개를 끄덕이신다. 나는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재우 얘기를 꺼내볼까. 

-선생님 제게 보이던 친구 재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아요. 그게 제가 반 친구 중 한 명과 친해지고 나서 부터였어요. 그 날 집으로 뛰어왔는데, 몸이 떨리고 추웠고 꿈을 꿨어요. 그리고 나서 약을 끊고 지내게 되었죠. 

-그건 아직 일시적인 거야. 휴지기라고 해도 다시 어떤 자극을 받고 너의 엔트로피 법칙이 폭발할 지는 알 수 없어. 자... 최소용량과 아티반이라는 안정제를 줄테니, 최소용략의 메인 약은 그대로 복용하고, 혹시나 불안하거나 힘들면, 이 노란 알약 아티반을 하나 복용해봐라. 

-감사합니다. 

 

  삼촌과 나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나는 기분이 별로였다. 나는 다 나은 것 같았다. 의사선생님은 일촉즉발일지 모를 내 병은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것이 예방책이라고 하신다. 삼촌은 나에게 별 말을 안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초코 바나나 쥬스를 사주신다. 삼촌이 내게 너가 좋아진 것은 분명하다, 호형과 잘 지내면서 너 모습이 전보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보인다, 분명 차도가 있을 것이다, 다음 번에 호형이 데리고 식당으로 와라, 맛있는 요리를 해주마, 그리고 너 재우는 그립지 않냐?라고 물었다. 나는 씨익 웃었다. -재우는 내 마음 속에 항상 있지, 삼촌. 재우가 준 노래들을 나는 꼭 MP3에 저장해 놓잖아. 근데 있지. 호형이 준 그 음반을 요새 많이 들었어. 재우가 준 노래와는 다르게 마음이 편안하고 차분해져. 삼촌은 그려 걱정 안 할랑께.하고는 말했다. 삼촌과 나는 쥬스 가게에서 나왔다.  

 

 

      # 6 

 

  오늘 아침에는 지훈도 호형도 나오지 않았다. 반 친구들이 이상한 이야기를 해대는 것을 들으니 난 괴로웠다. 지훈은 다쳐서 병원에 갔을 것 같았지만, 왜 호형은 나오지 않았을까? 며칠 전에 넷이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질 때만 해도 아무 일 없었는데. 반 친구들  사이에 지훈 엄마가 교무실에 와서 자퇴를 시켰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지훈 엄마가 남편까지 데려와서 교무실에 훼방을 놓았다고 쑥덕대는 반 친구들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어제 간 지훈 집에는 부모님 흔적이 안 보였다. 함께 있는 사람은 누나였고, 지훈 누나가 돈을 벌어오는 가장 역할을 하는 것 같았지만, 술집에 다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짙은 화장에 짧은 치마라고 모두들 술집에 드나드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상냥하고 친절한 누나로 보였고, 지훈도 의젓한 동생같았고, 호형은 의형제 같아 보였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나는 몹시 궁금해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희수? 어디 안 좋니? 

-저... 호형이가 왜 안 왔나해서요. 

-호형이? 호형이 오늘부터 부모님 따라 며칠 어디 다녀온다더라. 

-... 

-뭐. 또 궁금한 거 있니? 

-지훈이는 어떻게 된 거에요? 

담임이 왜 그러나 싶었는 지, 의자를 고쳐앉고는 나를 향해 바라볼 때 학생 주임이 나타났다.  

-희수 너 호형이랑 친하냐? 

-... 

-호형이와 지훈이가 친하다는 걸 알아서 그래. 너는 그 녀석들과 어떻게 알고 지낸거지? 

-... 

담임이 내가 조용히 있자, 학생 주임에게 눈치를 주었다. 학생 주임은 헛기침을 하고 자리를 떠났고, 담임이 나를 불러 앉히고는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호형이와 지훈이가 친하다는 걸 알고 있구나 너. 

-어제 알았어요. 저는 호형이랑 얘기나누게 된 지 얼마 안됐어요. 

-호형 부모님이 지훈 때문에 호형이를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아. 그래서 호형이가 며칠 학교를 쉬는 거란다. 호형이가 지훈이를 도와주려고 부모님께 말을 했나보더라. 

-제가 보기에도 호형이는 지훈이를 많이 챙겨주었어요.  

-지훈이 얘기를 좀 하자면... 너가 알아둬야 할 것 같은데, 누나랑 둘이서 지내는 결손 가정 아이야. 

 

  호형이가 내게 말을 안 하고 훌쩍 며칠 학교를 쉬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핸드폰으로 문자라도 남겼을 법한데,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것이 심상치가 않다. 학교 주임이 호형과 지훈 사이를 내게 묻는 것도 이상했다. 반 친구들 소문을 잘 들어보면, 지훈에게 누군가가 있긴 있는 것 같다. 자꾸 돈 많은 사람내지 힘 있는 사람한테 맞고 다닌다는 얘기들을 주로 했다. 가방이 새 것으로 바뀌는 것도 이상하다. 지훈 집에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어보일 정도로 집 안에 물건이 드물었고, 부모님이 없는 결손 가정이라고 담임이 말했다. 나는 노트를 꺼내놓고 수업은 뒷전이고 낙서를 했다.  

 

호형-지훈 & 누나  조폭 아빠?  

호형이네 집, 지훈이네 집, 샴 쌍둥이... 

 

  아무 연관이 없는 것 같았지만, 호형이가 내 꿈에서 샴 쌍둥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치만 그건 꿈이었고, 나는 내가 상상한 것을 물어볼 곳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 시간이 되자 반 친구들은 호형이가 나오지 않은 것은 지훈의 조폭 아빠에게 맞았기 때문이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지훈이는 부모님이 안 계신대. 반 친구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뚱땡이. 너 호형이랑 친해졌다고 지훈이랑도 사귀냐? -맞어. 너하고 호형이하고 학교 끝나고 손 붙잡고 가던데. 다들 한바탕 웃었다. -뚱땡이. 얼굴 존나 빨개진다.  

 

  나는 마시마로이다. 나도 힘 쓸 수 있다. 속으로 그런 목소리가 나왔지만, 그들 앞에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머릿 속이 쿵쾅대고, 맥박이 빨라져서 나는 엔트로피 법칙이 다시 시작되는 줄 알았다. 겁이 나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호형 덕분에 DK300이 줄었지만, 반 친구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일 뿐인데, 반 친구들이 툭 하면 나와 호형, 그리고 지훈이 관계를 물었다. 

 

  학교 끝나고 그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호형이와 지훈이를 따라서 갈 때는 이 정도로 어지럽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골목길이 복잡하다. 나는 이렇게 된 김에 이어폰을 끼고 걸었다. 재우를 안 만난 지 꽤 되었다. 재우는 없지만, 이제 호형과 지훈이를 찾아서 나는 걷는다. 골목길은 매우 좁다. 나같은 뚱보는 비스듬히 몸을 움직여야 겨우 빠져나갈 길이 여러군데이다. 대부분 낮은 담벼락이고 발로 걷어차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이 허술했다. 골목길에 대문이 대체로 녹슬어 있고 굳게 걸려있어서 이웃들 간에 왕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어디인지 모르게 길을 헤매다가 흉가도 보았다.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집 한채가 휑하니 있었다.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길을 잃었고, 해도 져물어 갔다.  

 

-할아버지 

나이가 많이 든 아저씨가 내 앞에 섰다. 나는 이 분에게 물어서라도 길을 찾아야할  것 같았다.  

-학생이 나 불렀는가? 

-네 어르신. 제가 길을 잃어서요. 

-길을 잃어? 내가 보기에는 사지가 멀쩡한디, 길을 왜 잃어? 

-... 

-아니 보아하니 몸도 아주 건장하고, 한창 나이인데, 길을 잃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 

-어디 보자. 여기가 사우동이고 307번지 근처인데, 자네가 찾는 곳은 어디인가? 

-아. 저는 집주소는 몰라요. 

-몰라? 그럼 길을 잃어야 쓰겄네. 길 잃고 가다보면 어디서 길이 나오겠지. 

암암. 그 나이 때는 길도 잃었다, 찾았다 하는 게야. 험험. 

 

  할아버지는 내게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고는 스쳐 지나가신다. 아주 정정한 몸에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두운 골목길로 접어드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아예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나는 할아버지와 말을 더 나누고 싶었지만, 나와는 방향이 달랐다. 앞으로 계속 걸었다. 할아버지 말 덕분에 식은땀이 흐르던 것이 멈췄다. 저녁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몸이 시원했다. 

 

  마지막 골목길이다 생각하고 접어들었다. 갈래길에서 높은 언덕 길을 택하고 올라갔다. 그렇지만, 그 대문이 아니었다. 다른 색깔의 대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안에 사람도 없어 보였다. 되돌아 갈 수 있을까? 난 골목길에 우두커니 서 있다. 이어폰에서 호형이 준 CD 음반이 흐른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가로등이 드문 드문 켜지기 시작했고, 밥짓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두런 두런 낮은 담벼락 너머로 말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없는데, 마치 유령 마을에 온 것 같았는데, 사람들 사는 소리가 들리고 냄새가 났다. CD 음반에서 한 곡을 반복해서 듣고 있다. 좀 무서워서 그런다. 조용하게 그 음악에 맞춰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들어서자, 누군가 실루엣이 보인다. 

 

-너. 

 

  나는 어둠에서 가까이 오는 발걸음을 향해 섰다. 호형이었다. 교복을 벗고 있어서 고딩 형 같아 보였다. 호형은 백팩을 큼지막하게 들고 있었다. 양 손에는 봉지를 들고, 그 안에는 라면이 가득했다. 호형은 딱 보아도 멀리 떠날 사람 같아 보였다. 

 

      # 7 

 

  호형이 아무 말도 안 한다. 그 집에 다시 가니, 아무도 없었다. 양 손에 비닐을 들은 호형. 나는 호형에게 역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둘 다 빈 집 마루에 앉았다. 비닐에 있는 라면을 보니 나는 배가 고팠다. 배에서 소리가 나자 호형이 라면을 하나 부스러뜨리고 스프를 넣어서 섞었다. 나에게 건넨다. 나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생라면을 입에 문다. 호형은 배가 고프지 않은 걸까? 담벼락 옆에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채 마루에 앉은 우리는 쓸쓸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말한다.  

 

-여기에 있지 말고 나랑 삼촌한테가서 저녁 먹자 

-... 

-지훈이와 누나에게 메모를 남기고 가자. 

-그들은 떠났어. 나보다 먼저.  

-... 

 

  호형이 얼굴에 밤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피곤하고 귀찮다는 표정일까? 아니면 슬프고 고단한 표정일까? 나는 라면을 먹으며 목이 메어왔다. 슬프고 힘든 것은 호형이일텐데, 왜 내가 울음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라면이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내내 나는 울음을 참느라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호형은 미동도 없다. 아예 옆에 없는 것 같다. 내가 마시마로인 것은 순 헛것인걸까. 재우도 나타나지 않고, 이제 내 옆에는 호형이가 그리고 호형 옆에는 지훈과 누나가 있는데, 왜, 이다지 버겁게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걸까? 내가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비참한 것인지, 호형이가 혼자 버려졌다는 것이 슬픈 것인지, 둘 다인지 나는 애써 생각해내고 있었다.  

 

-지훈은 나와 쌍둥이야. 몰랐니? 

-... 

-지훈이만 누나와 지냈고, 나는 어릴 때 지금 부모님에게 입양되었어. 

-우리는 중학생이 되어서 만나게 되었고, 서로를 금방 알아봤지. 

-... 

-지훈이와 누나는 내가 찾아오는 걸 피하려고 먼저 떠났어. 그렇게 나를 버리고... 

 

  내가 쓰러져 잠을 자는 동안, 호형은 큰 가방만 메고 떠났다. 라면이 가득 들은 봉지 두 개가 남겨있었다. 새벽이었고, 날이 추워져서 나는 잠에서 깼다. 호형이 내가 잠들기 전에 메마른 울음으로 울었고, 아주 길게 그 소리가 지속되는 속에서 나는 설핏 잠이 들었다. 호형이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새벽 찬 기운을 뚫고 뚜벅 뚝벅 걸어나왔다. 어스름 여명 속에서 고개 숙인 가로등 불빛이 깜박이며 하나씩 꺼져갔다. 나는 마시마로이고, 나는 외톨이고, 그리고 뚱보이고, 블랙홀이고... 그리고 바보이다. 나는 호형을 두고 잠이 들었고, 친구를 도와줄 수 없었다. 나는 엔트로피 법칙이 다시 시작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차라리 깊이 파인 이 마음을 잊게 해줄 것 같았다.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호형이 준 음반을 들으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내 스니커즈는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았다. 이제 나는 마시마로가 아니다. 나는 인간 박희수임을 알아야했다. 

 

      # 8 

 

  병원에 가는 날이다. 삼촌은 왠 일인지 나 혼자 병원에 보냈다. 의사 선생님은 의례적으로 묻고 나도 역시 네,네 하고 단답을 한다. 선생님은 마지막에 나에게 말한다. 그러고보니 ‘몸무게가 많이 줄었다. 운동을 했나보지?’ 나는 아무 대답없이 진료실에서 나왔다. 정말 내 몸무게는 줄어있었다. 약을 안 먹고, 학교는 계속 걸어다녔고, 게다가 혹시나해서 그 골목길을 방과 후에 걸어다녔다. 학교에 가자, 지훈은 전학을 갔고, 호형은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담임은 내게 호형이가 편지를 줬다며 건네주었다. 

 

  너한테 혹시라도 해서 부탁한다. 지훈이를 나중에라도 만나거든 내 메일을 알려줄래? 너와도 연락을 계속 하고 싶고. 너가 내 옆에서 울고, 나도 울고 그 날 밤에 나는 부모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부셨어. 부모님은 여전히 집에 안 계셨고, 나는 조금 다쳤지. 지금 이 편지는 병원에서 쓴 거야. 내일이면 나는 미국으로 떠난다.  

0718hohyeong@............ 

 

  반 친구들이 의외로 조용했다. 아무도 지훈과 호형 얘기를 내게 묻지 않는다. 나는 점점 지훈과 호형처럼 날씬해졌다. 약이 최소 용량으로 줄어든 지 3개월이 지났고, 나는 반에서 뒷자리에 앉았다가 조금씩 앞으로 갔다. 몸무게가 줄고, 외모가 날렵해지자 반 친구들은 내게 축구와 농구를 하자고 말을 붙혔다. 헌데 나는 싫었다. 내 몸은 엔트로피 법칙에 길들여진 마시마로이다. 여전히 나는 재우를 꿈꾸고, 호형을 꿈꾼다. 

 

  삼촌에게 말했다. 알바를 해서 돈을 모아서 호형을 만나러가겠다고. 그러나 아무 대답 없는 삼촌을 보며 내 말은 그냥 지나갈 말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나는 메일 주소를 내 다이어리에 옮겨 적는다. 은하수 호형이라고 적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 이 다이어리를 보게 되면 그 때 연락을 하리라. 막연히 그렇게 기도를 했다. 호형이 내게 준 음반은 테이프로 밀봉해서 서랍 안에 두었다. 나는 재우가 준 노래들을 선곡해서 MP3에 담고는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뒤뚱거리지도 않았고, 스텝을 밟지도 않는다. 점점 가벼워진 몸으로 평범하게 걷는다. 인간 박희수는 그렇게 인생길을 하나씩 걸어나간다. 내 스니커즈는 네이비 색에서 하얀 색 스니커즈로 바꼈다. 이제 나는 정말로 외톨이가 되었다. 누군가를 만날 그 날을 꿈꾸는 외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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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12
김중혁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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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박힌 색! 우주색! 까망~ 흰 별~ 핑크? 그리고
백퍼센트 코미디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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