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국화 화분에는 어김없이 자주빛 국화가 피었어요. 꽃향기가 그윽하게 피어오르고, 방 안에는 그 향기가 가득합니다. 국화를 방 안에 두어서 자주 창문을 열어줍니다. 꽃향기가 어찌 보면 독하기도 하거든요. 창문 밖으로 가을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서 방 안이 다소 춥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기분이 맑아집니다. 오늘 신청곡은 김동률의 귀향입니다. 언제나 저는 그가 제게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네. 신지연씨가 목요일 그대에게 띄우는 신청곡 코너에 오늘도 사연을 보내셨네요. 감사합니다. 라디오에서는 여자 디제이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린다. 디제이는 말을 마치고 음악 큐사인에 맞추어서 귀에 꽂고 있던 헤드폰을 내린다. ‘이번에도 신지연씨 사연이네요. 이 여자 분 이제 10개월째 아니에요. 지난 12월부터 사연을 보내왔죠?’ ‘선곡이 좋잖아. 누구를 기다리는지 모르겠지만 애틋하기도 하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항상 밝히지를 않아서 정말 궁금해요. 지난 번에 소개된 사연에는 그 사람이 신던 구두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죠? 그의 갈색 스웨이드 구두는 항상 적당히 구겨져 있었어요. 그는 구두를 신으면 발뒤꿈치가 아파서 오래 못 걸었어요. 꼭 여자 같았죠.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이 여자분 사연은 꼭 소설을 읽는 기분이에요.’ ‘귀향노래가 끝난다.

 

   아침 10시이다. 그녀는 라디오에서 들리는 귀향을 듣고 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의 방 안에는 책상 하나, 서랍장 하나, 행거 하나, 작은 선반 위에 국화 화분이 전부이다. 방 안이 선방처럼 깨끗하고 물건이 없다. 책상 위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소리가 흐른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쉐도우라는 이름을 가진 고전적인 라디오 모습을 갖고 있다. 높이가 있는 부채꼴 모양 프레임이 나무로 되어 있고, 가운데에 중세풍 꽃무늬로 만들어진 스피커가 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맞추어서 몸을 움직인다. 비비적거리는 듯, 꿈틀거리는 듯, 몸을 이리 저리 흔든다. 그녀는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춘다. 핸드폰 벨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깜짝 놀란다. 핸드폰을 든 손이 떨린다. 흐느껴 우는 듯 그녀는 이상한 신음소리를 낸다. 여보세요. 다소 하이톤의 목소리이다. 지연아 엄마다 왜 전화가 없었니? 그녀는 양미간을 좁히며 목소리를 낮춘다. 요새 스터디가 있었어. ? 왜라니, 엄마가 전화하는데 무슨 말버릇이 그래. ... 얘 지연아 너 소개팅 시켜줄까? ... 삐리릭 하고 핸드폰을 끈다.

 

 

 

   오늘은 그와 함께 걷던 공원에 가보았습니다. 오리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던 작년 봄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는 그 때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지요. 우리 이렇게 변치 말자.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제 곁을 떠났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친구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그를 기다립니다. 그는 내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 꼭 예전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저는 그의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그는 꼭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정말로 그의 눈가는 젖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제 어깨를 끌어안았습니다. 이제는 더는 보지 못하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며 저는 오늘 또 신청곡을 띄웁니다. Empty Rooms. 오늘이 마지막 신청곡이 될 것 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자정을 넘긴 목요일에...

 

 

  어김없이 목요일 아침 10시이다. 선방 같은 그녀의 방이 국화 꽃밭이 돼있다. 국화 화분이 가득 차 있고, 그 꽃들 사이에 그녀가 반듯하게 누워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고요한 얼굴빛에는 어딘가에 모를 그 이상한 미소가 띄워져 있다. 두 손을 깍지 껴서 아랫배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았다. 국화 향기는 온 방안에 가득해서 숨이 턱 막힌다. 자줏빛, 노란빛, 하얀빛. 국화꽃이 며칠을 갈까? 그녀는 그 국화꽃이 다 시들어 썩은 내가 날 때 까지 잠에서 깨지 않을 태세이다. 그녀는 먼 꿈나라로 갔다. 어딘지 모를 처연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있다.

 

   그녀의 선곡 Empty Rooms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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