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오늘의 젊은 문학 5
문지혁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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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치유되는 지점… 사람이 사람으로 치유되지 못하는 지점…

오늘 좋은 영화를 보았다.
Mass
수술칼을 뜻하는지는 찾아봐야할 것 같고.
오늘 아침 문지혁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중에 첫단편
‘다이빙’을 읽었다.

오늘 이 둘이 '우연히' 서로 닮은 부분이 있고,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Mass는 <나는 가해자의 어머니입니다>를 바탕으로 했고, ‘다이빙’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나는 드라마로, 하나는 SF로 만들어졌는데, 둘 다 사람의 죽음을 다루고 있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오는데, 가해자 부분에서 이 두 작품은 갈라진다.

Mass에서는 가해자의 부모가 가해자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고 있기에 두렵고 괴로워도 마음에 품으려고 한다. 그래서 피해자의 부모 역시 그 마음을 알아챈다. 알아채고는 결국 가해자의 부모와 가해자 청소년을 용서한다. 그들은 분명 ‘세월호’처럼 정부와 경찰에 의해 적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종교의 힘으로 또 인간의 노력으로 서로가 공감한다.

하지만 문지혁 작가의 ‘다이빙’은 다른 지점에 있다. 피해자의 가족은 사고가 난 해상 지역에 다이빙을 하며 죽은 가족의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한 명씩 그 지역에서 다이빙 하는 것을 포기하고, 마지막에 남은 두 명 중 한 명이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최후의 한 명은 끝없이, 끝없이, 슬픔 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간다.

이것이 무엇의 차이인지 잘 모르겠다.
한국은 10년 차이로 선진국을 쫓아간다고 한다.
미국 영화인 Mass는 몇 년을 더 쫓아가야 갈 수 있는 지점일 지 잘 모르겠다.

총 6장으로 구성이 된 short story ‘다이빙’은 읽고 다시 읽으면 무언가가 바다 표면으로 떠오르듯이 이야기 할 꺼리가 많을 것이다. 왜 이렇게 짧은지, 왜 6장 구성인지, 왜 ‘다이빙’인지, 왜 SF인지 말이다.

오늘 좋은 영화 Mass와 슬프고 생각에 잠기게 하는 소설 ‘다이빙’을 생각하며 5월 20일을 마감하고 있다. 지금 이 땅에서 먼, 우크라이나에서는 ‘다이빙’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고, 그곳과 다른 땅에서는 아가들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고, 미국 어디에서든지 총기로 인한 죽음이 계속되고 있다. 난 글을 쓰고 불을 끄고 잠이 들면 다시 새아침을 맞이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르다는 걸 한 번 생각해본다.

두 작품 모두, 제목이 갖고 있는 은유가 무엇인지 한 번 더 떠올려본다.
이 밤, 평화와 사랑이 어딘가에는 꼭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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